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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18세기 불교계 상황 알려주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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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24  /   조회5,25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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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사서 4| 정조실록正祖實錄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제1대 왕 태조로부터 제25대 왕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전체 1,893권 888책이다. 『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사회·풍속·천문·지리·음양·과학·의약·문학·음악·미술·공예·학문·사상·윤리·도덕·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한편 왕과 신료들의 불교정책을 비롯한 왕실의 불교신앙, 그리고 국가적 불교의례, 불교인식에 대한 사정을 수록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예컨대 태종과 세종대의 출가통제와 사원에 소속된 노비와 토지의 환속, 성리학의 수용과 정착에 따라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과정들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탄압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 역시 살필 수 있어 조선불교가 지닌 이중성과 그 종교적 정체성을 검토할 수 있다.

 

 

사진 1. <정조실록> 표지

 

 

대체로 조선의 불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전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스님들의 전란 참여가 계기가 되어 사회적으로 우호적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교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불교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조실록』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조실록』(사진 1)은 정조가 1776년 3월 10일에 즉위해 1800년 6월 28일에 죽기까지 24년 4개월간에 있었던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서술한 것이다. 56권 56책으로, 정식 이름은 ‘정종대왕실록正宗大王實錄’이다. 정조는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진종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승려들에게 입번을 면제하는 대신에 번전을 징수하는 것은, 바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그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덕聖德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에 승려들을 징발하여 입번시킬 때에, 승려 한 사람이 장비를 준비하는 데 온 절간의 재산을 다 기울이고, 기물을 팔고 토지를 팔고 이웃에게서 징수하고, 친족에게까지 징수하기도 하였다. 암행어사의 계달啓達과 도신道臣의 장계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하는 것 중에 걸핏하면 이것을 가지고 말을 하였었다. 이리하여 임금의 뜻에서 결단하고 번전으로 입번하는 것을 대신하게 하여 6도六道의 승려들로 하여금 모두 안도하고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시행하였으나 이로운 점만 있고 해로운 것은 없었다. 성교聖敎가 만일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미치면 양역良役까지도 함께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직접 들어서 지금까지도 잘 외우고 잊지 않고 있는 일이다. 근래에 승려들의 힘이 어느 곳에서나 다 조잔凋殘하였기에 쓸데없는 비용은 옛날에 비하여 거의 완전히 감면시킨 것과 같으나, 번전을 마련하여 낼 길은 지금에 와서 더욱더 어렵고 힘들게 되었다. 혹은 절은 있어도 징수할 만한 승려가 없고, 혹은 승려는 있어도 독촉하여 내게 할 돈이 없으며, 심지어 마을의 평민平民들이 승려의 신역身役을 대신 부담하게 되었으니, 한두 해 만에 수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9년 2월1일조에서)

 

 

사진 2. 정조 9년 2월1일조.

 

 

경상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올린 건의 사항에 대한 정조의 답변이다(사진 2). 관할지역인 경상도의 사찰과 승려들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부역을 감당하느라 유서 깊은 절이 비고 승려들이 도망간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방을 강화하고자 인조 대와 숙종 대에 스님들을 동원하여 산성을 쌓고, 각각 350명의 스님들에게 경비를 맡게 하였다. 이것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다. 그러나 입번으로 사원경제가 피폐해지자 영조 대에는 돈으로 번을 대신하는 ‘의승번전제義僧番錢制’로 변천되었다. 그러나 스님들의 가혹한 부담은 줄어들지 않아 지역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정조는 “승려들이 쇠잔해져서 돈을 마련하는 것이 거북이 등에서 털을 깎아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하고는 스님들이 납부했던 번전番錢을 반감시켜주었다. 정조는 결코 불교에 우호적인 군주는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이단을 물리치는 일은 ‘우리나라의 가법家法’이라고 하고는 원당願堂을 철폐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세상을 교화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스님들의 도성출입금지 역시 그동안 허술해져 더욱 강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정책은 효과를 보이지는 못한 것 같다. 때문에 그 역시 이전 역대 국왕이 보여준 왕실과 신민臣民이 오래전부터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일시에 혁파하지는 못한 입장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강력한 불교억압정책을 펼치지는 못한 것 같다. 

 

정조는 “불교가 비록 이단이지만, 인국人國에 이익이 있으며, 인적이 드문 산중에 사찰과 승려가 없다면 수어守禦의 공로를 누가 본받겠는가?”라고 하여 스님들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대흥사와 보현사의 청허 휴정의 사당에 ‘표충表忠’과 ‘수충酬忠’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장안사와 신륵사를 중창하게 했다. 또한 개국 1등 공신인 무학 대사의 조그마한 초상을 모사하여 토굴에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는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사액賜額하는 일은 밀양密陽의 표충사表忠寺와 해남海南의 대둔사大芚寺의 전례에 따르고, 대사大師의 호號도 또한 두 절의 전례를 적용하여 사액祠額은 석왕釋王이라 하고 대사에게 호號까지 하사하였다.

 

정조는 사액을 내리기 전에 이미 석왕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14년에는 석왕사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했고 다음 해에는 어제비문御製碑文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심은 동년 5월 “석왕사는 왕업王業이 일어난 곳이므로 다른 곳에 비해 소중하기가 각별하다.”고 하였다.

 

“승도僧徒가 시들고 쇠잔해진 것도 또한 유념을 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되니, 의승義僧에게 복무를 면제해 주고 절간의 승려에게 세금을 덜어주는 것은 대체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근래에 들으니 영읍營邑의 가렴주구에 시달리어 이름난 암자와 거대한 사찰이 텅 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환난을 염려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만일 수령을 만나거든 면전에서 거듭 신칙하여 소생되고 개혁되는 효과가 있도록 하라.”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0권)

 

정조가 안핵어사按覈御史 이곤수李崑秀에게 내린 글이다. 정조가 번전을 반감시켜준 것은 승려들이 “불의의 변고에 공을 바치고, 무사할 때에 힘을 얻게 된다”는 국가사회적 기여의 대가였던 것이다. 

 

『정조실록』은 18세기 조선의 경제상황과 그에 따른 불교계의 사정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또한 탄압일변도의 역대 왕의 불교정책과는 다른 통치 형태도 살필 수 있다. 맹목적인 불교탄압정책이 아닌 합리적인 정책을 펼쳤고, 비록 이단이지만 스님들 역시 조선의 신민臣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정조실록』은 조선 후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상황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사진 1. 『정조실록』 표지.

사진 2. 의승번전의 반감을 논의하는 실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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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후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조선후기 사지寺誌편찬과 승전僧傳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사지와 승전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한국근대불교사론』, 『석전영호대종사』(공저), 『신흥사』(공저)등이 있다. 조선시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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