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의 세계]
삶․죽음 단절아님 깨우쳐 주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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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11:24 / 조회6,869회 / 댓글0건본문
불화의 세계 15 현왕탱화
현왕탱화現王幀畵는 일반적으로 사찰 법당 안의 현왕단現王壇에 모시기도 하고 약사전藥師殿 등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 불자들에게는 법당을 참배할 때에 지나치기 쉬운 존상이기도 하다. 다소 생소한 느낌이 있을 수 있는데 현왕이 우리에게 어떤 가피와 위신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1. 경남사천 다솔사 현왕탱.
현왕탱화는 사람이 죽은 후 3일째 되는 날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명간교주冥間敎主 현왕여래를 중심으로 ‘명계의 대중[冥界衆]’들이 도설되어 있는 그림을 말한다. 사천 다솔사 현왕탱(사진 1)이 보여주듯이 현왕여래가 명계중과 더불어 사후의 인간의 심판을 관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관장한다는 측면에서 신행적 의미에 있어 지장신앙과 함께 어떤 탱화보다 친근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가정의례준칙 간소화에 따라 7일장이나 또는 그 이상의 장례를 3일장으로 일괄 통일시켜 49재 입재하기 전 3일째에 망자를 위해 올리던 현왕불공이 사라지게 됐고, 동시에 현왕과 현왕탱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신행적 효용성을 체감할 수 없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2. 통도사 현왕탱.
그러나 우리가 고찰이나 대찰을 참배하면 거의 빠짐없이 현왕탱화가 모셔져 있었다는 점은 과거 우리의 삶에서 생∙로∙병∙사 가운데 특히 질병과 죽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존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현왕에 대한 교의적 근거는 몇몇의 경전을 통해 확인 또는 유추할 수 있다. 성불 후의 명호名號를 ‘보현왕 여래’라 한 것은 『석문의범釋門儀範』권상의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豫修十王生七齋儀纂要」 중 ‘제5 염라 대왕’조條에 보이는 “於未來世當得作佛, 號普現王如來, 十號具足, 國土嚴淨, 百福莊嚴, 菩薩充滿(미래세에 부처를 이룰 것이니 호는 보현왕여래로 십호를 구족할 것이며, 국토는 엄정하고 백 가지 보배로 장엄하며 보살이 가득하리라).”이라는 구절에 근거한다. 염라 대왕의 본지(本地.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거짓 나타낸 수적신에 대해, 그 본체이며 진실한 진리의 몸인 불·보살을 이른다)는 ‘지장 보살’로 일찍이 석존으로부터 기별記莂을 받으신 분이다. 그래서 ‘지장 보살=염라 대왕=보현왕 여래’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염라 대왕의 본지가 지장 보살이라는 근거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제58에 “菩薩化現爲地獄主, 以敎誨罪人(보살은 지옥의 주인으로 모습을 나투어 죄인에게 진리를 가르쳐 개과천선케 한다).”는 것과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권1 등에 “지장보살께서 불가사의하시고도 견고한 서원력으로 범천, 자재천, 금수의 몸, 지옥 옥졸의 몸, 염라대왕의 몸 등으로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 하신다.”는 내용에 의한다. 지장 보살이 석존의 기별을 받았다 함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상권에 “그때 부처님께서 지장 보살을 찬탄하시며 ‘장하고 장하도다. 나는 그대를 도와 기쁘게 하리라. 그대여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 크게 서원하여 앞으로 널리 중생을 제도할 것이므로 곧 보리를 이루리라.’”고 설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현왕의 위의威儀에 관한 내용이 잘 요약된 「현왕청現王請」 가영歌詠에
“세존차일기염라 世尊此日記閻羅
불구당래증불타 不久當來證佛陀.
장엄보국항청정 莊嚴寶國恒淸淨
보살수행중심다 菩薩修行衆甚多.
세존께서 어느 날 염라에 수기하사
멀지 않은 장래에 부처를 이루리니.
백복 장엄 국토는 언제나 청정하고
수행하는 보살승 국토에 가득하리.”
라고 나온다. 이에 따라 현왕탱화에 도설되는 존상은 현왕 여래를 주존으로 좌보처에 대륜성왕大輪聖王, 우보처에 전륜성왕轉輪聖王, 그리고 판관判官, 녹사錄事, 사자使者, 동자童子 등이 활기 넘치게 그려진다.
사진 3. 안성 칠장사 원통전 현왕탱.
현존하는 현왕탱화의 양상을 보면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진 1>의 사천 다솔사 현왕탱을 비롯하여 1864(고종 1)년에 조성된 양산 통도사 현왕탱화(사진 2)와 안성 칠장사 원통전 현왕탱(사진 3) 그리고 호림박물관 소장의 현왕탱(사진 4)과 동국대박물관 소장의 경국사 현왕탱(사진 5)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다솔사 현왕탱과 경국사 현왕탱은 관련 권속이 모두 등장해 장관을 이루며, 칠장사 원통전 현왕탱은 통도사 현왕탱과 유사한 형식을 보이나 현왕의 시선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현왕은 오른쪽 또는 왼쪽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호림박물관 현왕탱의 현왕은 엄정한 표정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권속들도 좌우가 대칭되도록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사진 4. 호림박물관소장 현왕탱.
이들 가운데 통도사 현왕탱화는 권속들의 배치가 의식문과 관련하여 읽어내기가 용이하여 함께 살펴보겠다. 즉 채색의 경향은 붉은 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녹색과 청색이 적절히 가미되어 시각적으로 명쾌함을 주고 있으며 선과 채색이 단정하여 격조 높은 화격畫格을 보여 주고 있다.
중앙의 현왕 여래는 수묵으로 민화풍의 산수가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계신다.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3일째 되는 날 올리는 현왕재의 본존으로 정의를 지키는 법왕法王이다. 『대일경소大日經疏』에는 “일체 중생의 명근命根을 끊는다.”고 하였다. 명근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번뇌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현왕 여래의 좌측에는 대륜성왕이, 우측에는 전륜성왕이 시립해 있다. 대륜성왕은 현왕 여래에게 망자의 일체 업業을 펼쳐 보이며, 전륜성왕은 악을 위엄으로 굴복시키고 참회를 마친 자는 다시 선계善界와 인연을 지어준다.
사진 5. 경국사 현왕탱.
좌우 협시 옆에는 명계冥界의 일을 총괄하는 소임을 맡은 판관 2위가 망자의 모든 삶[業]이 기록된 문서를 관장하는 녹사 2위가 시립해 있다. 역시 2위의 사자는 망자의 영가를 현왕전에 데리고 오는 역할과 아울러 현왕의 모든 부름에 응하여 부촉 받은 일을 수행한다. 현왕 여래의 바로 옆에는 녹색 주머니를 든 동자와 쟁반에 천도를 받쳐 든 동자가 시립해 있다. 녹색 주머니는 부귀를, 천도는 수명을 상징하는데 이는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현왕 여래의 덕을 상징한다. 병풍 좌우에는 불보살의 덕을 표시하고 법요의 설법을 상징하는 번幡을 든 동자가 각 1위씩 시립해 있다. 현왕 여래를 중심으로 원형의 군도 형식을 취하는 통도사 현왕탱화(사진 2)는 각 존상의 표현이 자유롭고 동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현왕의 여러 권능을 통해 삶과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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