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교단사 체계 정립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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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26 / 조회5,552회 / 댓글0건본문
근대한국의 불교학자들 3 | 김영수
김영수(金映遂, 1884-1967, 사진 1)는 한국불교 교단사의 체계를 정립한 불교학자이자 학승이다. 식민지시기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해방 후에는 동국대, 원광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법명이 영수이고 호는 포광包光, 또는 두류산인頭流山人을 썼다.
1884년 6월 29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양지촌에서 태어났고 아명은 창진이었다. 12세 되던 1895년 4월에 고향에서 가까운 지리산 북쪽 자락의 함양 영원사에서 출가하였다. 은사인 환명 정극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영호남의 여러 이름난 강백들을 찾아가 이력과정의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 과목을 순차적으로 배웠다. 1906년 1월에 건당식을 한 후 영원사의 강주가 되었으며, 이후 1913년에 남원 실상사 주지, 1916년에는 보은 법주사의 주지를 맡았다.
1918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최초의 근대식 불교 교육기관 명진학교의 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능엄경』과 『사분율』, 그리고 불교사를 강의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불교 청년단체를 대표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을 위해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다시 출가 사찰인 영원사로 돌아왔고 다음 해인 1920년에는 함양 법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명개화와 불교 근대화라는 시대 조류의 확산 속에서 일본불교의 전철을 밟아 승려들이 결혼하는 풍조가 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일본 유학승이나 혁신운동을 하던 청년 승려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 또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결국 40세가 되던 1923년에 대처승이 되었다.
1928년에는 중앙학림에서 이름을 바꾼 불교전수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곳은 이능화, 박한영 등 당시 최고의 불교학자와 학승들이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1930년에는 전수학교에서 다시 중앙불교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그는 1931년 5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이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불전은 1940년 6월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을 또 다시 개칭하였는데, 당시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대의 교수를 퇴임한 다카하시 도루가 이때 혜화전문의 학장이 되었다. 그런데 학장으로 취임한 다카하시가 박한영, 권상로 등 한국인 교수들을 파면시키자 김영수도 교수직을 그만두고 순천 선암사로 가서 주지를 하였다.
사진1. 김영수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에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승격 재편되었다. 그는 다시 교수로 취임하여 불교사 등을 강의했고, 1948년 12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동국대의 학장(지금의 총장)을 맡았다. 그런데 학장을 그만둔 지 두 달 만인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 피난하여 낙향하였다. 이를 계기로 1952년에는 전북대, 1953년에 원광대의 교수가 되어 이후 호남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7년에는 원광대에 한국불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고, 1961년에는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1963년에는 동국대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66년에 동국대에서 학술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처럼 만년까지 대외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1967년 1월 10일 84세의 세수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자 사리 15과가 나왔고 고향 함양에 사리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저술로는 주저인 『조선불교사고』(1939) 외에 『금산사지』, 『실상사지』 등의 사지, 그의 논저와 국역 불전 등을 한데 묶어서 수록한 『한국불교사상논고』(1984)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조선불교사고』는 중앙불전의 강의교재로 쓰기 위해 필사본으로 등사한 3편 35장의 한국불교 통사이다. 많은 자료들을 활용하여 삼국시대부터 근대기까지의 불교사를 충실하고 설득력 있게 서술하였다. 삼국시대는 불교의 수용과 교법의 전래, 원광, 자장, 의상, 원효 등 고승들의 활동과 사상에 대해 소개하였고, 화엄, 유식 등 통일신라의 교학 성행과 승정, 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의 성립에 대해 다루었다. 이어 고려시대는 태조의 숭불, 각종 법회와 의례, 승과와 고승 배출, 천태학 전적의 중국 역수출과 의천의 천태종 창설, 교단과 종파불교, 외침의 극복과 대장경 조성, 지눌의 선사상과 선종 중흥, 태고 보우의 선종 통합과 법맥, 고려 말의 12개 종파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조선시대는 유불 교체에 따른 시대변화, 억불정책에 의한 종파의 축소와 통합, 왕실불교와 신앙, 임진왜란의 승군 활동, 법통 정립과 법맥의 전수, 강학과 강경, 사기 등 주석서의 성행, 염불정토 신앙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사사관리서 설립, 원종과 임제종의 창설과 식민지 사찰령 체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이조불교』를 쓴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불교 쇠퇴론과 부정론을 의식해서인지 조선시대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했다. 즉 임제태고법통을 기준으로 한 전법의 면면한 계승과 강학의 성행, 불서의 대량 간행 등에 주목하여 조선후기 불교의 다양한 양상을 그려내는데 『조선불교사고』의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조선시대 불교에 대해 그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먼저 조선은 배불의 시대이지만 태종이나 연산군 같은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태조와 세조는 말할 것도 없고 대개의 국왕들은 오히려 숭불 행위를 용인하고 친불교적 정서를 가졌다고 평가하였다. 다음으로 태고법통은 여말선초의 실제 역사상과는 무관하게 후대에 정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보우를 비롯해 고려 말의 선승들은 조계종에 속했고 조선 후기에 임제법통이 표방되면서 임제종 법맥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제도적으로 교단 규정이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소속 종파의 수계사를 정식 스승으로 삼았지만 종파가 없어진 조선 중기 이후는 오직 전법사의 법맥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포광 김영수의 학문적 업적은 무엇보다 한국불교의 교단사 체계를 세운 선구자라는 점에 있다. 그가 제기한 학설은 통설이 되어 지금까지도 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고려시대를 오교구산五敎九山에서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의 변화로 설명하고 조선전기는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로 정의하였다. 이는 교종과 선종을 포괄한 불교 교단 전체의 공식 명칭이 시기별로 어떻게 바뀌며 전개해 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영수는 중앙불전에서 불교사를 가르치던 1930년대 후반에 「조선불교의 종명과 전등 및 종지에 대하여」, 「오교양종에 대하여」 등의 논문을 잡지에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불교사고』에서도 오교양종 등의 교단 체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오교가 교종에 속하는 열반, 계율, 법성, 법상, 원융이며, 조선 초 실록 기사에 등장하는 시흥종, 남산종, 중도종, 자은종, 화엄종이 이에 각각 해당한다고 보았다. 구산은 잘 알려진 대로 나말여초에 형성된 선종의 대표 산문으로서, 도의의 가지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혜철의 동리산문, 현욱의 봉림산문, 도윤의 사자산문, 무염의 성주산문, 범일의 사굴산문, 도헌의 희양산문, 이엄의 수미산문을 가리킨다. 그리고 양종은 구산선문을 계승한 조계종과 의천이 세운 천태종을 통칭하는 용어로 보았는데, 고려에서는 조계종, 천태종이 모두 선종에 포함되었다. 또 천태종 개창 전에는 교종에 상대되는 선종의 의미로 선적종이 쓰이기도 했다. 한편 국가의 제도적 승정체제가 폐지되고 공식 종파가 존재하지 않던 조선 후기에는 태고 보우가 중국에서 전해온 임제법통이 표방되며,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 밑의 여러 문파로 그 법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김영수는 이 계보가 오늘날까지 연결되는 조선불교의 종통 법맥을 이루었음을 강조하였다.
사진2.『조선불교사고』, 민속원 영인본, 2002.
김영수의 오교양종설에 대해 최소한 신라시대에는 종파로서 오교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또 오교는 다섯 종파가 아닌 교종을 통칭하는 용어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양종이 조계종과 천태종의 선종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럼에도 선종이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온 이후 고려 초에 구산선문이 성립되었고 고려 중기부터 조선 초까지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는 오교양종이라는 명칭이 사료에 빈번히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설이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통설로서의 권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채 그에 기반한 다양한 주장들이 파생되고 있다.
앞서 1930년에는 최남선이 원효를 내세우며 한국의 통불교 전통을 강조하였고, 인도와 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와는 달리 한국은 결론적 불교를 세웠다고 하며 종합불교론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김영수는 신라불교의 대표자인 원효의 화쟁,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이 추구한 선교융섭, 조선시대의 선과 강경, 염불을 함께 하는 삼문수업을 근거로 들며 통불교적 전통을 더 한층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근현대기에 활발히 제기된 한국불교의 종명과 종조를 둘러싼 논란에서 김영수는 이능화, 권상로 등과 함께 조선 후기에 정착된 임제태고법통의 정통성을 지지하였다. 다만 그는 여말선초의 실상을 보면 선종의 종명은 조계종이었고 태고 보우도 임제종이 아닌 조계종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근대에 들어 원종, 임제종, 선교양종 등 다양한 종명이 부침하였지만 일본의 선종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계종을 한국불교의 대표 종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권상로 등과 함께 1930년대 후반 총본산 건립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그 결과인지 실제로 1941년에는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김영수는 학자로서 한국불교 종파와 교단의 역사적 흐름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계종 종명과 중흥조 태고 보우의 조합을 만드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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