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무아의 연기, 다함이 없는 세계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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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1:04 / 조회6,473회 / 댓글0건본문
지구 중심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4원소설로 설명했다. 흙은 무거워서 아래로 떨어지는 속성을 가지므로, 흙으로 이루어진 지구는 낙하할 수밖에 없다. 우주의 중심에 이를 때까지 낙하하므로,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천체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지구중심설(천동설)이다.
양형진 교수(사진: 불광미디어)
밤하늘에서 보듯이, 모든 천체는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원을 그린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우주 전체가 회전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중심설은 우리에게 보이는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다.
태양중심설
지구중심설과 달리 태양중심설(지동설)은 천체의 회전을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설명한다. 태양계를 제외한다면, 태양중심설과 지구중심설은 천체의 회전을 동등하게 설명한다. 우주가 고정돼 있고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과 지구가 고정돼 있고 우주의 모든 별이 회전한다는 것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같다. 이는 모든 운동이 상대적이라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의 차이는 태양과 태양계 행성의 운동을 고려할 때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구중심설은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epicycle 등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역행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운 장치였다. 이와 달리 태양중심설은 행성의 역행이나 내행성의 최대 이각 등 태양계 행성의 특이한 겉보기 운동을 타원 궤도만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금성의 겉보기 크기의 변화, 보름달 모양의 금성, 연주시차, 목성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의 운동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우주가 회전하는가 아니면 지구가 회전하는가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공전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갈릴레이 시절에도 많이 축적돼 있었다. 그러나 지구중심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희생이 따르기도 했다.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브루노는 화형에 처해 졌고,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는 이단심문소에서 자신의 이론을 취소하고 가까스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를 단순히 종교와 과학 사이의 대립 혹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탄압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의식의 근저에 있는 편향성 혹은 경향성이 이런 역사를 가능하게 했던 보다 근원적인 이유일 수 있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 있었던 대립이나 탄압은 단지 인간의 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경향성이 표출된 표면적 현상일 수 있다. 왜 그런가?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기중심적 착각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출이나 일몰을 보면서 지구가 회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물리학자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해가 뜬다고 한다. 하루 내내 지구가 회전하는 걸 느끼지 못하다가, 일출이나 일몰이 돼서야 지구가 회전한다고 느닷없이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기는 하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회전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밤하늘의 별은 하루에 정확하게 한 번씩 회전한다. 열병하는 군대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흐트러짐 없이 움직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천구celestial sphere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무한히 큰 가상의 구다. 이 천구에 모든 별이 박혀 있다. 천구가 하루에 한 번 회전한다고 하면서, 태양계를 제외한 모든 천체의 회전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다.
천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무리수를 두면서도, 내가 회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뛰어가거나 걸어가지 않는 한, 내가 움직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끔 우리 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 터미널에서 내가 탄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면 옆의 버스가 반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감각 경험을 통한 판단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모두 알면서도, 우리는 해가 뜬다고 한다. 이는 우리 사고의 얼개가 갈릴레이를 심판했던 이단심문소의 재판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해가 뜨고 진다고 생각하고 별이 회전한다고 생각하는 게 단순히 편리하거나 쉬워서만은 아니다. 우선,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감각 경험을 진실이라고 믿도록 우리 마음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감각을 통해 파악한 외부 상황을 무시한다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이는 도시 생활에서도 그렇다. 일례가 자동차 운전이다. 감각기관으로 파악한 외부 상황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제어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운전이야 안 하면 그만이지만, 야생에서는 외부의 위험요인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사자 무리 옆에서 임팔라가 풀을 뜯고 있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감각 경험의 한계
외부 상황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생명체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각을 믿어야 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생명체다. 그러므로 감각 경험을 믿는다는 것은 38억 년 진화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흔적이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알면서도 해가 뜬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감각 경험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무수한 세월 동안 생존 경험을 통해 쌓이면서 형성된 아뢰야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을 그런 방식으로 지탱한다.
우리의 감각은 일차적으로 생존을 위한 장치다. 그래서 감각 경험에 의한 판단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지구의 자전을 알면서 해가 뜨거나 진다고 생각하더라도, 감각 경험의 세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감각 경험의 한계다.
무아無我 무자성의 연기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감각은 생존을 위한 것일 뿐,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예를 들어보자. 바닷물에는 소금이 들어있어서 짜다. 그런데 바닷물이 짜냐고 고등어에게 물어본다면 (아직 물어보지 못했지만) 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달리, 고양이는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단맛은 나무 열매를 먹는 동물에게 필요한 감각이다. 고기를 먹는 고양이는 단맛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를 만들지 않게 진화했다고 한다.
그러면 바닷물은 짠가? 아니다. 설탕물은 단가? 그것도 아니다. 어느 것도 짜거나 단 것이 아니고, 짜지 않거나 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물에 소금과 설탕이 들어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소금이 짠맛을 주고, 설탕이 단맛을 준다. 그러나 고등어가 짜다고 하지 않는 소금에 짜다는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고양이가 달다고 하지 않는 설탕에 달다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짜거나 단 결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essence, 즉 자성自性을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성이 없어서 무자성無自性이고, 실체가 없어서 무아無我다.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는 대상이 나에게는 짜거나 달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타나도록 형성된 연기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소금과 설탕만이 아니다. 일체의 객관세계가 모두 무자성이고 무아無我다. 객관세계를 나에게 드러내는 연기緣起가 있을 뿐이다. 내가 보는 세계, 내가 사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무아無我의 연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다.
다함이 없는 세계와 공의 연기
연기緣起는 무아와 무자성의 연기다. 일체의 모든 것이 무아고 무자성이어서 어떤 인연이 맺어지느냐에 따라 다함이 없는 무진 세계가 나타난다. 고등어에게는 바닷물이 짜지 않은 세계가 나타나고 고양이에게는 설탕물이 달지 않은 세계가 나타난다. 우리에겐 짜고 단 세계가 나타나고, 하루에 한 번 온 우주가 회전하는 세계가 나타난다. 한 시간에 한 번 자전하는 별에 산다면 24시간 동안 24번의 일출과 일몰을 보는 세계가 나타나고, 몇 걸음 걸으면 한 바퀴 도는 어린왕자의 별에 산다면 산책하면서 보고 싶은 만큼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세계가 나타난다.
끝없는 세계가 나타나더라도 연기緣起는 무아無我이고 무자성이어서 공空이다. 용수 보살이 말씀하셨듯이, 연기이므로 공이다. 이에 대해선 다시 쓰기로 하고, 지안 스님의 선시산책에 실린 편양 언기 스님의 시로 글을 맺는다.
雲走天無動 구름이 달려가나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舟行岸不移 배가 가도 언덕은 옮겨가지 않는다.
本是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何處起歡悲 어디에 기쁨과 슬픔이 일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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