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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묘엄스님 ⑦ 치열했던 법거량과 불교정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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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  2024 년 7 월 [통권 제135호]  /     /  작성일24-07-04 17:13  /   조회1,0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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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사이에 법거량이나 의기 투합하는 것을 보셨나요? 

 

두 분 스님이 내 듣는 데서는 펴놓고 점잖지 않게 그런 거는 안 하시지요. 그런데 장난한다고 붙어서 레슬링하고 씨름하는 거는 내가 몇 번 봤습니다. 그러면 내가 조금 미안해서 피해 가고 그랬어요.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큰스님네 보면 참 대범스럽게 사는 모습들이었어요. 그분들은 세세한 것들에는 걸림 없이 사시는 것을 보았어요. 

 

사진 1. 해인사 명사품서식 때의 묘엄스님(2007. 10).

 

가르칠 열정으로 가득 찼던 성철스님

 

우리 비구니들이 사는 데는 아무래도 어머니의 소질이 있기 때문에 좀 세밀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뭐 시시콜콜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큰스님네들을 보면서 ‘대범스럽게 사는 것이 참 좋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전에 들었던 것을 한가할 때 다시 물어보기도 하면 큰스님네가 잘 설명을 해주시기도 해요. 그래서 추가로 설명해 주신 것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사진 2. 배우려는 자세를 보이면 끝없이 알려주시던 성철스님.

 

큰스님네 중에 성철스님은 극성극패의 성미가 있어요. 우리들이 탁! 하고 “하겠습니다!”고 해서 기분 좋게 따라주면 성철스님은 끝간 데를 모르게 가르쳐주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중간에 조금이라도 나태한 생각을 내서 어디가 아프다는 둥 근육이 땡기고 뼈도 아프다고 그러면 또 조금이라도 나태심을 낸다 싶으면 그만 오시지를 않아요. 사실 그때 좀 고생스럽게 자급자족도 했지만 우리들 생활도 많이 발전된 것이거든요.

 

지금은 우리들이 수행생활하는데 부처님의 뜻이나 조사의 뜻을 해석하고 이해해서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와 있거든요. 큰스님네의 법문을 안 들어도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것들을 본 사람이 선두에 서서 지도를 하니까 모두 잘 따르게 됩니다. 막말로 표시하면 ‘땟물’이 벗겨진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때보다는 지금은 말만 해도 다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지요. 그때는 참 어려웠어요.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사진 3. 윤필암 전경.

 

▶ 대중생활에서 종무실 상황은 어땠습니까?

 

당시에는 비구와 대처가 갈라진 상태가 아니었어요. 대처승들을 사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판 스님들이 살림을 다 살아주고 있었어요. 분할적으로 식량이나 양념 이런 것을 다 얻어다가 선방에서 드시던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구스님들은 영양실조가 많았어요. 종단적으로 무슨 지시가 직접 내려오고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 것은 큰절 종무소를 통해서 선방으로, 다시 윤필암으로 내려오지요. 공문 같은 것도 거의 없었던 거 같아요. 큰 절에 가면 공문을 보여줘서 보고 베껴 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종무라는 것도 잘 모릅니다.

 

윤필암에서 출입 장부와 금전출납부는 사중에서 하는 것인데 받고, 넘기는 출납장부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종단하고 관계있는 것은 큰 절에서 다 맡아서 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시사항을 듣고 알지 공문과는 별로 연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하에 깨닫는 수행자를 기대했던 성철스님

 

오늘 삭발을 하는데, 성철스님이 또 무슨 짓을 하시겠구나 싶어서 머리를 다 깎고 삭도에 다칠까 봐 얼른 기왓장 가루를 닦지도 않고 칼집에 꽂아 놓고는 “머리 다 깎았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제가 좀 세밀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성철스님이 탁 오셔서 묘명이라는 행자를 보시더니 “네는 머리를 깎았으니 사람도 아니고, 계를 안 받았으니까 중도 아니다. 너는 대체 뭐냐?”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묘명이가 대답을 할라고 입을 들먹하니까 성철스님이 주먹을 가지고 입을 콱 쥐어박아서 고만 입술이 터졌어요. 그래 나는 그동안에 뭔 일이 나지 싶어 얼른 나와서 기왓장 묻은 것도 돌에 문질러서 털고 삭도도 씻으려고 뛰어왔거든요.

 

사진 4. 1989년 봉암사 동안거 모습.

 

그 봉암사 앞에 있는 개울에 내려갔는데 보니까 묘명이가 씻으러 나와서 내 옆에 앉아서 머리에 비누칠해서 씻고 피가 난 입을 씻고 그러는데, 내가 가만히 보니까 뚜드려 맞은 것도 우습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들먹거렸노?” 그러니까 “행잡니다.” 하려고 했답니다. 묘명이 말하기를, 행자라는 소리를 어느 책에 봐서 알고 있다는 겁니다. 묘명이 나한테 “행자입니다.” 대답하려고 하니까 쥐어박는데 “내 대답이 틀렸느냐?” 하고 나에게 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도 안 맞는 소리야!” 그랬거든요.

 

그때 성철스님이 난데없이 뒤에서 제 멱살을 탁 쥐시더니 “맞는 소리 해봐라. 안 맞는 소리인 줄 아니까 맞는 소리도 알 것 아닌가!” 그래서 “맞는 소리로 대답하라!”고 내 멱살을 탁 쥐고 물에다가 첨벙 넣었다가 다시 들었다가 했습니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이렇게 해도 이놈의 화두를 들고 있는가 시험하시는 겁니다.

 

사진 5. 1980년대 법전스님(왼쪽)과 성철스님.

 

말하자면 그렇게 위급하고 다급할 때에도 화두가 있나 없나를 보시느라고 물에다가 넣었다가 다시 들어냈다가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입을 열면 입을 쥐 박힐 겁니다. 그래서 입을 딱 다물고 물에 들어갔다 나갔다만 했습니다. 성철스님은 나를 건져서 땅바닥에 놓고는 편하게 뒷짐을 지고 다시 가시더라고요. 그렇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뜻은 내가 나이가 좀 들어서 생각하니까 스님네가 그렇게 조사선祖師禪을 쓴 것은 옛날 중국의 조사스님들처럼 한마디로 탁! 때리면 그 즉시 언하言下에 깨닫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나기를 바란 것이었어요.

 

그랬는데 우리의 근기라는 것은 큰스님들이 바라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니 뚜드려 맞았죠. 뚜드려 맞는 정도가 아니라 죽어도 올바른 선지禪旨의 대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내가 그때 봉암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요즘 혼자 앉아서 웃습니다. 비구스님도 많이 뚜드려 맞고 지금 종정스님 법전스님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언하에 깨닫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고 그런 방법을 썼는데, 우리가 그 수준이 안돼 있었어요. 그래 헛방망이질한 겁니다.

 

사진 6. 불법에 대처없다는 깃발을 들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스님들.

 

우리는 그 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는데 뚜드려 맞기만 하면 아프거든요. 그래서 보통 이야기하실 때 내가 성철 큰스님께 물었어요. “맞기만 하면 옛날 스님들처럼 언하에 깨달음은 얻을지 모르지만 아프기만 한데 그때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달아나라, 도망가라!” 그래요. 그래서 나는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하고는 그 뒤로 안 붙들리려고 도망다녔습니다. 그 밑에 보리밭에 숨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렇게 깨닫기를 바라고 그러셨구나 싶어서 내가 속마음으로 죄송한 생각이 있어요.

 

열악한 수행환경과 불교정화 운동의 촉발

 

▶ 대처승의 현실이 불교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불교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봉암사 결사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우리가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학인들 싹 다 몰래 서울 올라갔다가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화운동이 일어난 동기를 알고 보면, 수행하는 환경이 너무나 어려운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선객들이 빈손으로 수행하려니까 너무 안정감이 없고, 그래서 그 본뜻은 수행을 좀 더 잘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수행승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절을 차지하려고 정화운동을 일으킨 것처럼 됐거든요. 지금은 비구승이 다 되었거든요.

 

사진 7. 운허스님. 묘엄스님은 1956년 4월 5일 동학사에서 경봉스님으로부터 전강한 후 운허스님으로부터 전강했다.

 

그때 운허스님께서 통도사 계실 때입니다. 운허스님께서 “너희들이 서울에 가려면 책 보따리 다 싸 가지고 아주 나가라.”는 겁니다. “아주 나가고 다시는 내 앞에서 책 펴지 마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랬는데 밤에 지관스님이 기차표를 사 가지고 우리 있는 보타암이라는 암자에 와서 말씀하시길, “향곡스님이랑 모두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참여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관스님한테 “서울로 갈려면 책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 하시더라.” 이러니까, 괜찮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운허스님한테 인사도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갔거든요. 그때 운허스님은 “일하는 사람은 몇몇이 일을 하는 거지 새떼같이 몰린다고 그게 될 일이 아니야!” 그러면서 우리보고 “돈을 안 만지던 사람이 돈을 만지면 돈이 붙어서 안 떨어지고, 청정수행을 하는 수좌들 다 버려놓을 것이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도 그것을 뒷전으로 하고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서 정화운동에 동참하고 일주일 만에 내려왔거든요. 통도사로 다시 내려오니까 우리도 마음이 참 안됐더라고요. 스님 말씀도 안 듣고 달아났다가 다시 책을 가지고 떡하니 앞에 앉았어요. 운허스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눈을 감고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책을 내가 갖다가 앞에다 펴 드리고 또 우리 책은 우리가 보고 새겼어요. 그때 『능엄경』을 배울 때인데, 『능엄경』을 새기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고 앉았다가 “그 정화운동은 다 마쳤느냐?”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끝 안 나는 거 보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가리켰어요. “왜 나한테 인사를 안 하고 갔느냐?” 소리도 하실 수도 없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우리는 계속 공부를 하게 됐어요.

 

사진 8. 운문사 강사시절의 묘엄스님.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수좌들 다 버려놓는다고 걱정을 크게 하셨어요. 결과적으로 대처한 태고종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절을 차지해서 돈 마음대로 쓸려고 정화운동을 벌였다고 하고, 운허스님께서 그 사람들 태고종, 지금의 조계사가 그때 태고사였거든요. “그 대처승들이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고, 아들딸을 낳아서 제자를 계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태고종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태고종이 사라지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운허스님이 말씀하시는 것 보면 항상 태고종 측 입장이라요. 그래서 우리는 정화운동 이야기를 스님 앞에서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운허스님도 안 하시고요. 그때 그런 적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수좌 편인 비구승 측이 좀 생활이 넉넉해졌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수행승이 많이 감소해졌어요. 한편에 또 열심히 수행 잘하는 선객禪客들도 늘어났고요. 또 옛날에는 지식인이 선객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식인들도 선객이 많이 되었어요. 자기가 수행한 바를 표현하는 능력들이 좋아져서 책도 내고 해서 발전된 점이 있지만 또 퇴보한 점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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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obudd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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