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불교]
조선 후기의 차 문화-생강차 등 대용 차 마시는 풍습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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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춘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10:41 / 조회7,433회 / 댓글0건본문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정치·사회·경제 등 방면에서 전반적으로 혼란을 겪는데, 혼란은 당시 불교계의 수행이나 포교, 차 문화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차산지에 위치한 일부 사찰에서 차 마시며 수행하는 풍토가 근근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차 문화 또한 시대적 상황이나 흐름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사찰과 스님들이 주도하던 전대(고려 시대)와는, 차 문화를 향유하는 수준이나 차품茶品, 다구 등이 새롭고 발전적인 형태를 구축하지 못한 채 쇠락해진 경향을 띠었다. 이런 현상은 전란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 및 경제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며, 성리학의 극성도 영향을 적지 않게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차를 향유하는 계층의 다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조선 후기 차 문화의 흐름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여실히 드러냈다.
사진1. 초의 진영.
“작설(차) 대신 생강이나 귤(차)을 쓴다. 관가에서는 찹쌀을 볶아 물에 타는 것 또한 차라고 한다. 근래 풍속에서는 혹 백두산의 삼나무 순을 (차로) 쓰기도 한다[或代以雀舌·薑橘, 官府熬糯米沈水亦謂之茶, 近俗或用白頭山杉芽].”
인용문은 18세기 말, 대용차代用茶의 일종인 생강차나 귤차를 포함해 차[茶]를 정의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설차를 대신하여 생강차나 귤차 등을 차라며 마셨고, 간혹 찹쌀을 볶아 물에 타 마시는 것도 차라고 불렀다는 점이 확인되는데, 이는 종래 차라는 의미가 범용적汎用的으로 사용되어, 대용차를 차로 불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차 문화가 소멸되는 상황은 이덕리(李德履, 1728-?)의 『기다記茶』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가 나는 고장은 호남과 영남에 두루 퍼져 있다. 『여지승람』, 『고사촬요』 등 책에 실려 있는 것은 다만 백 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설이 차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차와 작설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차를 따서 차를 마시는 자가 없다. 일부 호사가는 차라리 북경 시장에서 사 올지라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취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我東産茶之邑, 遍於湖嶺, 載『輿地勝覽』·『攷事撮要』等書者, 特其百十之一也. 東俗雖用雀舌入茶, 擧不知茶與雀舌本是一物, 故曾未有採茶飮茶者. 或好事者, 寧買來燕市, 而不知近取諸國中.]”
사진2. 초의가 쓰던 흑색 다관.(누끼 딸 것)
윗글은 18세기까지도 차가 광범위하게 자생했지만, 차를 알았던 사람이 드물었던 당시 차 문화의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에도 연경에 가 차를 사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한데, 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과시였을 뿐 실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차 문화가 거의 사라질 위기에 있었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차와 타물他物을 섞어 약용으로 사용한 사례가 등장한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운해(李運海, 1710-)의 『부풍향차보扶豊鄕茶譜』에 서술된 7종의 상차常茶가 그런 사례이다. 차가 나는 산지에서 병을 치료하는 일상 약품으로 개발한 것인데, 풍風·한寒·서暑·열熱·감感·수嗽·체滯를 치료하는 향약鄕藥으로 음용飮用했다. 차를 약으로 인식했고, 차와 한약재를 섞어 이질, 감기, 체한 것 등을 치료하는 단방약單方藥으로 사용하였던 사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다飮茶의 가치를 이어간 계층은 승려들이었다. 조선 후기 초의(草衣, 1786-1866, 사진 1·2) 선사와 교유했던 경화 사족들은 찻잎으로 만들 차를 마시는 이로움을 재인식했으며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조선 후기 차 문화가 중흥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의 하나였다. 이런 시대 흐름을 이끈 그룹은 대흥사의 스님들이었는데, 특히 아암(兒庵, 1782-1811) 스님과 그의 제자들, 초의 스님과 그의 제자들이 차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원천적 토대인 차를 만드는데 힘쓴 출가자들이었다. 초의는 선차禪茶를 연구·발전시켜 경화京華 사족士族들이 차에 관심을 갖게끔 촉발시켰던 인물로, 그가 만든 ‘초의차’는 우리 차의 우수성을 부각시켰던 차였다. 그가 우리 차의 우수성을 피력한 내용은 「동다송東茶頌」에서 확인된다.
조선에서 나는 차는 원래 중국과 같아서 東國所産元相同
(차의) 색, 향기, 맛과 기운이 한 가지라. 色香氣味論一功.
육안 차의 맛과 몽산 차 약성을 갖췄으니 陸安之味蒙山藥
옛사람의 높은 판단, 맛과 약성을 다 갖췄다고 하리라. 古人高判兼兩宗.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초의가 우리 차의 수준에 대한 확신은 굳건했다. 차는 맛과 약성이 주된 가치이다. 이는 제다를 통해 완성된다. 초의차가 경향의 인사들에게 칭송받았던 연유는 바로 맛과 약성을 두루 갖춘 차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초의차가 다삼매茶三昧를 이룬 차라고 극찬했으며, 신위(申緯, 1769-1847)와 박영보(朴永輔, 1808-1872) 등은 5백 년 동안 혼미했던 차 문화를 드러낸 인물로 초의를 거론할 정도였다. 초의가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은 「남다병서南茶幷序」와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에서도 확인된다. 초의는 『다신전茶神傳』의 후발後跋에서 조주(趙州, 778-897) 선사의 끽다풍喫茶風이 사라진 당시의 현실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시자방侍者房에 있던 수홍이 다도를 알고자 했기에 차 문화를 일으키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초의의 본의本意는 직접 만든 좋은 차를 통해 탈속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려했다는 점에 있었다. 수행과 결합된 차 문화를 회복해 수행자들이 더욱더 수행에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싶었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3. 대흥사 대광명전.
한편 조선 후기 대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차를 애호하게 된 것은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진도 감목관 이태승의 소개로 만덕사의 아암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다산과 아암 스님은 1805년경 만나 깊이 교유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된 후 아암 스님은 물심양면으로 다산에 도움을 주었다.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한 철을 지낸 것도 아암 스님의 배려 때문이었고, 차를 요구했던 다산의 차 수요를 감당했던 것도 아암 스님과 그의 제자들이다. 이런 사실은 다산이 1805년 겨울 아암에게 보낸 「이아암선자걸명소貽兒庵禪子乞茗疏」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요즘 차를 탐내어 약처럼 먹는다오. 글 중에 오묘한 이치는 육우의 『다경』 3편에서 다 통했고, 병든 속에 큰 탐냄은 결국 노동의 「칠완차」로 해소했소. 설령 (차가) 정기를 침식해 수척하게 한다지만, 기무경의 말을 잊지 않는다오. (차가) 막힌 것을 뚫고, 응어리를 풀어 주니 마침내 (나도) 이찬황의 벽癖이 생겼구려[旅人近作茶饕, 兼充藥餌. 書中妙解, 全通陸羽之三篇, 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侵精瘠氣, 不忘綦毋㷡之言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윗글을 통해 다산은 이미 『다경』이나 노동의 「칠완차」을 숙독하며 차의 이치를 터득했고, 기무경이 말란 ‘차를 마시면 정기가 쇠해진다’는 음다의 폐단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겐 이미 ‘다벽茶癖’이 생겼다는 것이다. 후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818년경 그가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茶信契」도 아암 스님을 만난 후 차를 향유하는 즐거움을 좋아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초의 선사가 다산을 만난 인연 역시 아암 스님 때문이다. 초의가 대흥사(사진 3)로 거처를 옮긴 건 1809년이다. 당시 초의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었고, 대흥사 스님들과 내왕이 잦았음도 알았을 것이다. 대흥사로 옮긴 초의는 바로 다산초당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고, 이는 초의가 경화사족들과의 교유를 넓힐 인연으로 작용하게 된다.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만났던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만났고, 이들을 통해 경향의 권세가와 선비를 만났다. 1830년 완호의 탑명塔銘을 받기 위해 상경한 초의는 1831년 홍현주의 별장[別墅]인 청량산방에서 열린 시회詩會에 참석해 자신의 문재文才를 드러낸다. 이로 인해 ‘초의’라는 이름이 경향京鄕에 거명擧名되기 시작했다. 초의는 1837년 홍현주의 부탁으로 「동다송」을 저술하여 조선 차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렸는데, 초의를 전다박사煎茶博士로 칭송했던 경화京華 사족士族들이 초의의 식견을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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