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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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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09:33  /   조회6,99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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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 신심      

 

자기 개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의 개발이라는 큰 과제를 두고서, 우리는 어떠한 결심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해야만 자기 능력을 완전히 개발하여 불보살이 되고 조사가 되고 그리고 선지식이 되어 미래 겁이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려야만[爲法忘軀](주1)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몸까지도 잊어야만 비로소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보기로 부처님을 들 수 있습니다. 대도를 위해서 왕자를 버리고 천추만세에 일체 중생을 위해서 얼마나 큰 공을 이루었습니까? 근대에 와서는 오직 진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 법을 위해서 몸을 버린 사람으로 청나라 태종 순치 황제(1638-1661)(주2)를 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성철스님. 해인사 백련암. 

 

만주족이 만주에서 일어나 십팔 년 동안을 싸워 중국을 통일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세력 판도는 남․북만주, 내․외몽골, 서장, 안남에 이르러서 중국 역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 순치 황제가 대청제국 창업주의 영광을 차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본디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부귀영화란 일시적인 것이며, 또 대청제국의 황제 노릇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며 아이들의 장난일 뿐이라고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굳은 각오로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모습을 감추고 금산사에 가서 나무꾼이 되어 머슴살이로 스님들 시봉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출가시를 썼습니다.

 

나는 본래 인도의 수도승인데 我本西方一衲子    

무슨 인연으로 타락해 제왕이 되었는가! 緣何流落帝王家 (주3)

 

천자 되는 것을 타락 중에서도 가장 큰 타락이라고 보니 이것이야말로 참되게 수도하는 근본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동네 이장만 되어도 만금 천자라도 된 것같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따른다면 부처님의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잊고 무상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이 대도를 위하는 큰 결심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사꾼이나 날품팔이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일반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어느 회사의 직원이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답하곤 하는데, 이런 장사꾼 같은 심리 가지고는 절대로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혹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 채 넘겨짚거나 너무 무시한다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보고 뼈가 부러지도록 절하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믿는 데는 만승 천자도, 곤룡포도 내버리는 그런 큰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2. 큰 의심

 

불교의 근본은 자기 개발에 있습니다. 초월적인 신은 부정합니다. 부처도 믿지 말고 조사도 믿지 말며, 석가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다는 말은 불교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고 절대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자기 개발을 완전히 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있으니 그 문자만 많이 독송하면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얻을 수 있는가? 아닙니다.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점점 어두워진다[廣學多知 神識轉暗].”(주4)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도의 길은 날로 덜어 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 간다[爲道日損 學爲日益].”(주5)고 했습니다.

 

참으로 깨치는 길은 한 생각 덜어서 자꾸자꾸 덜어 나아가야 하고 학문을 하려면 자꾸자꾸 배워 나아가야 됩니다. 도道와 학學은 정반대의 처지에 서 있습니다. 듣고 보고 하는 것은 무심삼매를 성취하는 데에서는 설비상雪砒霜과 같은 극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근본 목표인 대도大道를 성취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이론과 문자는 장애물이 되지 이로움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지식과 언설을 다 버리고 오직 마음을 한곳에 모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으로써 성불하였지 이론과 문자를 배워서 성불하였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면 중도中道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 선정禪定을 닦아서, 곧 참선을 해서 무심삼매를 성취해야 됩니다. 무심삼매를 거쳐 진여삼매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물며 망상이 죽 끓듯 하는 데에서 어떻게 진여삼매를 성취하여 중도를 증득한 부처님의 경계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교敎라는 팔만대장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방문입니다. 약 처방이란 말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그대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밥 이야기를 천 날이고 만 날이고 해봐야 배부르지 않듯이, 약 처방 만을 천 날 만 날 외어 봐야 병은 낫지 않습니다. 약을 직접 먹는 것이 실천하는 것이므로 선정을 닦는 좌선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가르친 것이 이 좌선입니다. 지금도 저렇게 좌선하시며 앉아 있지 않습니까.

 

1) 아난존자

 

 옛날 스님 네는 어떻게 공부해서 어떻게 무심삼매를 성취하여 도道를 이루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그 제자들이 부처님이 법문하신 것을 모아 놓은 것이 경(經)입니다. 그 무렵에는 녹음기도 없고 속기速記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부처님을 삼십여 년 동안 모시고 다니며 시봉했던 아난존자는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총명함은 고금을 막론하고 견줄 데가 없으니 한번 들으면 영원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을 결집結集하는데, 대중 모두가 아난이 주동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윗사람인 상수 제자上首弟子인 가섭 존자가 소집 단계에 가서 그에 반대하였습니다. 

 

“아난은 부처님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 진리는 깨치지 못했으므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가섭 존자는 아난 존자가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지만, 다시 말하여 팔만대장경이 모두 자기 뱃속에 있지만 아직 자기 마음을 깨치지 못한 봉사이므로 이 결집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니 아주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난 존자가 애걸복걸하며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그를 의지해서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이제 가섭 사형이 나를 쫓아내면 누구를 의지해서 공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섭 존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불법을 깨친 사자獅子만 사는 사자굴인데 깨치지 못한 여우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울며 쫓겨난 아난존자는 비야리 성城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니 국왕이며 대신 등을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큰스님 오셨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법문을 청하므로, 아난 존자는 가섭 존자에게서 쫓겨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난 체하며 법문을 했습니다. 이때 그 부근에 발기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아난이 그곳에 온 뒤로 많은 신도들이 모여 법석을 떠니 시끄러워 도저히 공부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기 비구가 게송을 하나 지었습니다.

 

좌선하고 방일하지 말아라, 坐禪莫放逸

아무리 지껄인들 무슨 소용 있는가. 多說何所利 (주6) 

 

입 다물고 참선하라는 말입니다. 아난 존자가 그 게송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이제 참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참회하고는 다른 곳으로 가서 불철주야로 앉아서 정진했습니다. 졸릴 듯하면 일어나 다니고 다리가 아프면 앉았다 하면서 자꾸 선정을 익혔습니다.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여러 날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찌나 고달픈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잠깐 누워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침木枕을 베려고 턱 드러눕다가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무심삼매를 성취한 것입니다. 목침을 집어던지고 밤새도록 걸어서 가섭존자에게 갔습니다. 가섭존자가 몇 가지 시험을 해보니 확철히 깨친 것이 확실하므로 결집하는 사자굴에 참가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경에 보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난의 말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은 아난 존자이지만, 근본 법은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전했고 가섭은 다시 아난에게 전했습니다. 곧 부처님은 시조始祖이시고, 초조初祖는 가섭존자, 이조二祖는 아난존자입니다. 아난 존자 밑으로 상나화수 존자로 이어지고……, 이렇게 해서 정법正法은 이십팔 대代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옴으로써 동토東土에 전해졌습니다. 이 선종이 중국에 소개되어 육조 스님 뒤로는 천하를 풍미해서 모든 불교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육조 스님은 오조 홍인弘忍 대사 밑의 제일 큰 제자로서 일자무식이었습니다. 당시 홍인 스님의 제자로 신수神秀라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에서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대지식가가 있었지만 이 신수 스님은 도를 바로 깨치지 못했으므로, 법은 일자무식인 육조 스님에게 가고 말았습니다.

 

2) 덕산 스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 보면 임제종을 창설한 임제 스님과 운문종․법안종의 종조宗祖되는 덕산德山 스님, 이 두 분 스님을 조사들 가운데 영웅이라고 하여 칭송하고 있습니다.

 

덕산 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 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스님의 속성이 주周씨이므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그 무렵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點心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 하여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노파가 물었습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려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는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 구만요.”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먼.”

 

주금강은 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용담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용담 스님 방에서 공부한 뒤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방문을 나섰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용담 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 주는데 덕산 스님이 받으려고 하자마자 곧 용담 스님이 촛불을 확 불어 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덕산 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그러고는 용담 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 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 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말하였습니다.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과 같다. (주7)

 

모든 변론과 언설이 하도 뛰어나서 온 천하의 사람이 당할 수 없다고 해도, 깨달은 경지에서 볼 때는 큰 허공 가운데 있는 조그만 터럭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깨친 것은 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것으로, 이 대도라는 것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수단을 다하는 재주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큰 골짜기에 작은 물방울 하나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지식이 장한 줄 알았다가 바로 깨쳐 놓고 보니 자기야말로 진짜 마군이의 제자가 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덕산 스님은 이렇게 깨치고 나서, 사람을 가르치는 데 누구든 어른거리면 무조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부처님이 와도 때리고 조사가 와도 때리고 도둑이 와도 때리는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 주일마다 온 절 안을 뒤져서 무슨 책이든 눈에 띄기만 하면 모두 불에 넣어 버렸습니다. 이 덕산 스님의 몽둥이 밑에서 무수한 도인이 나왔습니다. 천하에 유명한 설봉 스님, 암두 스님이 나왔으며, 운문 스님의 운문종과 법안 스님의 법안종이 또한 이 몽둥이 밑에서 나왔습니다. 이렇듯 자기 개발이란 오직 마음을 닦아서 삼매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3) 임제 스님

 

중국에서 선종이 천하를 풍미할 때 선종은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 운문종, 그리고 법안종의 다섯 종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임제종이 가장 융성했습니다.

 

임제종의 종주는 황벽 스님의 제자인 임제 스님으로, 일찍이 교학을 많이 배운 스님입니다. 스님은 교敎만으로는 부족하고 꼭 선禪을 해서 깨달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유명한 황벽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황벽 스님은 특별한 가르침을 배운 적도 없이, 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지生而之知로, 당시의 천자인 선종宣宗을(주8) 두드려 팬 일이 있는 걸출한 선승이었습니다. 이 스님 밑에서 한 3년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에 황벽 스님 회상에는 수자로 목주 스님이 있었는데 임제 스님을 격려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삼 년입니다.”

“그러면 황벽 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 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하였는가?”

그 말을 듣고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묻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벽 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 대나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임제 스님이 몽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 스님이 물었습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 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 스님이 다시 가서 여쭙자 황벽 스님은 또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 번 가서 여쭙고 세 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임제 스님이 돌아와서 목주 스님께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 스님께 가서 문답케 하셨으나 세 번 여쭈어서 세 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 스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떠나라.”

 

임제 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 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접提接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을 찾아뵈오니 대우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 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던가?”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 하고 여쭈었는데 세 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절老婆心切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 스님이 그 말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습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 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 보라, 빨리 말해 보라!”

임제 스님은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았습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이 멱살 잡은 손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을 하직하고 황벽 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 스님은 임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젓번에 일러주신 대로 대우 스님께 갔다 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 스님이 그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 스님이 말씀했습니다.

 

“뭣이라고! 이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때려 주리라.”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습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 스님의 뺨을 후려치니 황벽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미친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시자야, 이 미친놈을 끌어내라.”(주9)

 

그 뒤 임제 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누구든지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레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임제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제 스님이 소리 지르는 것[喝], 덕산 스님과 황벽 스님이 사람 때리는 것[棒], 이 이치를 바로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전에는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워도 소용없습니다. 지식으로는 박사의 박사를 더한다 해도 소용없으니, 오로지 불법은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절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다 개발하면 영원토록 대 자유, 대자재한 절대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 반드시 무심삼매를 성취해야 되고, 이 무심삼매를 성취하려면 오직 마음을 닦아야지 지식과 언설로써는 절대로 안 됩니다.

 

3. 세 가지 장애

 

 그러면 생사해탈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화두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깨치면 그만이지만, 그 공부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만 피하면 공부를 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돈이 눈에 보이면 공부는 그만입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종단이 수난을 겪는 것도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전부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승려가 타락하고 돈 때문에 출가자가 썩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돈을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砒霜보다 겁을 내야 합니다. 참으로 돈에 끄달리지 않고 돈을 멀리하고 초탈한 그런 사람이면 실제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만 보면 모두 거꾸러지고, 돈만 보면 모두 미쳐버립니다. 옛말도 있습니다. ‘황금흑리심黃金黑吏心’(주10), 곧 누런 황금이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내가 보기에는 ‘황금살승심黃金殺僧心’, 곧 돈이 수도자의 마음을 다 죽인다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이 돈에 대해 철저하게 끄달리지 않는다면 공부할 분分이 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돈에 안 끄달릴 사람이 별로 없지요? 어린애들도 돈만 주면 좋아합니다. 내가 꼬마 친구들을 좋아하는데, 노래 불러라 해서 노래를 안 부르다가 돈 주면 그만 노래합니다. 어떤 아이는 아무리 노래를 부르라고 해도 안 부릅니다. “오천 원 줄게” 해도 안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만 원짜리 한 장을 썩 내주었더니 좋아서 받더니 그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어미, 아비보다 돈이 최고구먼!”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도를 성취하려면 돈하고는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나도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한번 내게 물어보십시오.

“스님은 돈 얼마나 모아 놓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여자입니다. 남자에 대해서는 여자이고, 여자에 대해서는 남자입니다. 여자는 사실 그렇게 중시할 재료는 못 됩니다. 재료가 못 된다 말입니다. 옛날 어디에서인가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천 명을 모아 큰 절구통에 넣어서 쿵쿵 찧었습니다. 그리고서 남자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남자가 눈이 하나 멀었더라고 합니다.

 

어쨌든 도를 성취하려면 여자를 가깝게 하지 말라고 말해 왔습니다. 언젠가 누가 무슨 이야기 끝에,

“스님, 우리 비구니를 칭찬 좀 해주십시오.”

하던데,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다 칭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 같은 장애물이 두 가지만 되어도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본능이야, 본능! 배고픈데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

본능이라도 다릅니다. 밥 안 먹고는 살지 못하지만 여자는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여자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항상 여자를 경계하라고 하시는고?”

원수가 져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여자를 멀리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명예입니다.

명예, 이름 병!

이것은 단수가 높은 것입니다. 돈도 필요 없다, 여자도 내 앞에서 어른거리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하지만, 그 사람의 내부 심리를 현미경이나 엑스레이 기계로 들여다보면,

“내가 이토록 참으로 장한 사람이다, 큰스님이다, 도인이다.”

하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또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 가운데서도 재물 병, 곧 돈병과 여자 병 이 두 가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름 병이라는 것입니다.

 

계행이 청정하여 돈도 필요 없다, 여자도 감히 어른거리지 못한다고 하면 천하제일의 큰스님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큰스님, 큰스님” 하면서 옆에 와서 자꾸 절을 하면 그만 정신이 없어집니다. 여자와 재물은 벗어나도 대접받는 것에서는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실제로 재물 병과 여자 병은 결심만 단단히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주위에서 남들이 욕이라도 하지만, 이름 병에 걸리면 남들이 더 칭찬해 주니, 그럴수록 이름 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책을 본다든지 하여 말주변이나 늘고 또 참선이라고 좀 해서 법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거기에 빠져 버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명예 병입니다. 이리하여 평생이 잘못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큰스님 소리 듣고 대접받는 데 정신없다가 마침내는 부처님이 성취하신 것과 같은 참다운 그런 대 자유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재물 병이나 여자 병보다도 명예 병이 더 무섭고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니 우리가 서로서로 반성하여 이 세 가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참으로 출격 대장부가 되어 크게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주)

 

주1) 법法을 위해 육신의 안위를 잊는다는 뜻. 한 구절의 게송을 듣기 위해 나찰에게 몸을 던진 설산 동자雪山童子의 이야기는 위법망구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아가 “피부를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갈아 붓으로 삼고, 피를 뽑아 먹물로 삼아 경전을 베껴 쓰기를 수미산만큼 하더라도 법을 소중히 여기므로 몸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剝皮為紙 折骨為筆 刺血為墨 書寫經典 積如須彌 為重法故 不惜身命).”는 『보현행원품』의 내용 역시 위법망구의 정신을 담고 있다.

 

주2) 순치제(順治帝, 1638-1661). 태종太宗의 9번째 아들로 청나라 제3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를 순치順治로 정하여 순치제로 불린다. 명나라의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을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다.

 

주3)  순치제의 「출가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叢林飯似山, 鉢盂到處任君餐. 黄金白玉非爲貴, 惟有袈裟披最難!

   朕爲大地山河主, 憂國憂民事轉煩,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閑.

   來時糊塗去時迷, 空在人間走一回. 未曾生我誰是我? 生我之時我是誰?

   長大成人方是我, 合眼朦朧又是誰? 不如不來亦不去, 也無歡喜也無悲. 

   悲歡離合多勞意, 何日清閑誰得知? 世間難比出家人, 無牽無挂得安閑.

   口中吃得清和味, 身上常穿百衲衣. 五湖四海爲上客, 逍遥佛殿任君嘻.

   莫道僧家容易做, 皆因屢世種菩提. 雖然不是眞羅漢, 也搭如來三頂衣.

   兔走鳥飛東復西, 爲人切莫用心機, 百年世事三更夢, 萬里江山一局棋!

   禹尊九洲湯伐夏, 秦吞六国漢登基, 古來多少英雄漢, 南北山頭卧土泥!

   黄袍换却紫袈裟, 只爲當初一念差. 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皇家!

   十八年來不自由, 南征北戰幾時休? 朕今撒手歸西去, 管你萬代與千秋.

 

주4) 『소실육문少室六門』(T48, 375b), “廣學多知無益 神識轉昏.” 다만 『소실육문』과 『달마혈맥론』 등에는 ‘暗’ 대신 ‘昏’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5)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第48章 「中說」,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주6) 『사분율四分律』(T22, 967a), “靜住空樹下 心思於涅槃 坐禪莫放逸 多說何所作.” 『사분율』 등에는 ‘多說何所利’ 대신 ‘多說何所作’으로 되어 있다.

 

주7) 『연등회요聯燈會要』(X79, p.172a), “窮諸玄辯, 若一毫置於太虗. 竭世樞機, 似一滴投於巨壑.”

 

주8) 선종(宣宗, 810-859). 당나라의 제16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하남河南 향엄사香嚴寺로 출가하여 양준琼俊이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하며 바보스럽게 살았다. 회창會昌 6년(846) 무종이 붕어하자 환관들은 조종하기 쉬울 거라는 판단으로 선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즉위하자 총명한 성품을 드러내고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쇠퇴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교를 신봉하던 무종이 내린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주9) 이상의 내용은『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X68, p.31c) 등 여러 전등사서에 등장하고 있다.

 

주10)  『추구抽句』에 수록된 한시의 한 구절로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飮酒人顔赤 食草馬口靑 白酒紅人面 黃金黑吏心.” 『추구』는 좋은 대구對句들을 발췌 수록한 작자 미상의 책으로 조선시대 때는 『천자문』,『사자소학』과 함께 초학初學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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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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