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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중생불성 -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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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0 년 9 월 [통권 제89호] / / 작성일20-09-21 13:51 / 조회8,252회 / 댓글0건첨부파일
본문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 인 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2-1】은 제2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2-1】 ①일체중생이 진여본성인 불성을 다 가지고 있어서, 불佛이나 법法이나 승僧이나 평등하여 추호도 증감차별이 없느니라. ①一切衆生이 悉有佛性하야 佛法僧에 無有差別이니라. (『大般涅槃經』 19, 『大正藏』 12, p.730a)
* 모든 중생이 ‘참다운 본성’인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부처님’, ‘그 가르침’, ‘그 대중’은 똑 같다. (불성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그런 일은 결코 없다.
【평석】 일체중생이 구유具有한 진여본성은 제불의 과덕果德을 원만구비圓滿具備하였으므로, 이를 불성佛性·법성法性 또는 불심佛心·불지佛智 등으로 부른다. 이 불성은 절대로 평등하여 무상극과無上極果를 성취하여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덕智德을 완구完具한 제불여래나 극악중죄인 5역逆 구제받지 못하는 다섯 가지 죄. 아버지를 살해함, 어머니를 살해함, 아라한(성인)을 살해함,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함, 대중의 화합을 깸.
10악惡 살생, 투도(偸盜, 도둑질), 사음(邪淫, 배우자 이외의 음행),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 욕), 기어(綺語, 아첨하는 말), 탐욕, 진에(瞋恚, 성내는 마음), 우치(愚痴, 삿된 견해)의 열 가지. 이것은 몸・입・마음으로 짓는 업을 10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10선(善).
내지 일천제一闡提의 중생까지도 원만구유圓滿具有하므로 여래와 중생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선근이 절멸絶滅한 일천제도 불성만 정견正見하면 전부 성불하나니,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며 모든 종교가 추수追隨할 수 없는 가장 탁출卓出한 특색이다.
*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참다운 본성에는 모든 부처님의 과보와 성품을 결함 없이 갖추고 있으므로, 이를 불성·법성 혹은 불심·불지 등으로 부른다. 이 불성은 절대적으로 평등하여 ‘위없는 최고의 과보’[無上極果]를 성취해 끝없는 지혜와 덕성을 완벽하게 갖춘 모든 부처님이나 다섯 가지 극악한 죄인 5악과 10악을 지은 중생이나 ‘착한 생각과 행동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는’ 일천제도 완전하게 다 갖고 있으므로 부처님과 중생은 이 점에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착한 행동을 하려는 생각조차 완전히 사라진[絶滅] 일천제도 불성만 제대로 체득하면 전부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며 다른 종교가 따라올 수 없는 가장 뛰어난 특색이다.
【강설】 “자성을 바로 보면 곧바로 성불한다.” 하였는데 자성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보기만하면 부처가 된다 하는가? 자성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여의 본성으로 불성, 법성, 법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중생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육도중생을 다 포함해 일컫는 말이다. 이 불성이란 것은 성불한 부처님이나 미혹한 중생이나 돈 많은 부자나 빈곤한 거지나 출가한 스님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속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성불한다고 늘어나고 미혹하다고 줄어드는 법도 없다. 극악한 중생과 원만한 부처가 그 불성에 있어선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선한 기미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극악한 단선근중생斷善根衆生도 깨치면 곧 부처이다. 무엇을 깨친다는 말인가? 본래 구비하고 있던 진여자성, 즉 불성을 깨치는 것이다. 요즘 하나님 믿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은 죄 많고 가련한 우리 중생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초월해 저 멀리 계시는 분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허나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바로 이 죄인이 전혀 부족함 없이 완전히 구비 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개개인 속에 다 하나님이 있어 하나님 아닌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다. 이는 다른 종교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불교의 우수성이다.
【2-2】 ①일체중생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불성을 구유具有하고 있건마는, 항상 한량이 없는 번뇌와 망상이 개복盖覆한 고로 능히 그 불성을 볼 수 없느니라. ①一切衆生이 悉有佛性이언마는 常爲無量煩惱所覆故로 不能得見이니라. (『大涅槃經』 8, 『大正藏』12, p.648b)
* 모든 중생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불성을 갖추고 있지만 항상 수많은 번뇌와 그릇된 생각이 가리고 덮고 있으므로 그 불성을 볼 수 없다.
【평석】 중생이 번뇌와 망상에 장폐障蔽되어 자기본유의 불성을 보지 못하나 불성은 항상 무한한 대광명을 발하여 시방법계를 비추고 있으니, 이는 태양이 중천에 높이 떠서 우주를 비추고 있지마는 흑운黑雲이 엄폐하면 중인衆人이 보지 못함과 같다.
* 중생이 번뇌와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 불성은 항상 무한한 큰 빛을 내어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는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서 우주를 비추고 있지마는 검은 구름이 덮어 가리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강설】 지고지순한 가치의 하나님과 불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면 혹자는 “그럼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번뇌와 망상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늘 빛나고 있는 태양을 볼 수 없고 밝은 거울에 먼지가 앉으면 거울의 밝은 빛이 드러나지 않듯, 번뇌와 망상에 가려 있으면 우리 안에 늘 자리하고 있는 부처님의 성품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지를 깨끗이 닦아낸 밝은 거울이건 때가 꼬질꼬질 낀 거울이건 그 바탕에 있어선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먼지가 앉았다고 구름이 끼었다고 거울의 성품과 태양의 빛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2-3】 ①사무애지四無碍智가 곧 불성이니 불성은 곧 여래니라. ①四無碍智가 卽是佛性이니 佛性者는 卽是如來니라. (『大涅槃經』 30, 『大正藏』12, p.803a)
* 진리(가르침)에 대해 막힘이 없는 법무애지法無礙智, 가르침이 의미하는 뜻에 대해 막힘이 없는 의무애지義無礙智, 모든 언어에 통달해 자유롭게 말하는 사무애지辭無礙智, 앞의 세 가지 지혜로 중생을 위해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는 낙설무애지樂說無礙智 등이 바로 ‘참다운 본성’[佛性]이니 참다운 본성이 곳 붓다이다.
【평석】 제불의 과지果智인 사무애지가 불성이니 불성이 즉 여래이다.
* 모든 부처님이 수행의 결과로 체득한 지혜인 사무애지가 불성이며, 불성이 바로 여래이다.
【2-4】 ①불성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는 제불의 경계니라. ①佛性者는 不可思議니 乃是諸佛境界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70c)
* 참다운 본성[佛性]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지이다.
【평석】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중묘衆妙를 구비한 불가사의한 이 불성은 무상정각을 성취한 제불여래의 심심현현深深玄玄한 경계이다. 이 불가사의한 신묘영성神妙靈性이 번뇌 망상에 엄폐되어 중생이 보지 못함은 실로 개탄할 일이다.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원타 스님
*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많은 여러 가지 미묘함을 갖추고 있는 이 불성은 생각으로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모든 붓다의 깊고 깊어 알 수 없는 경계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하고 신령스러운 본성’이 번뇌와 그릇된 생각에 덮여 중생이 보지 못함은 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강설】 먼지만 걷어내면 거울의 밝은 바탕이 드러나듯 번뇌 망상을 제거하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환히 드러나는데 그걸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자리에도 불성의 거울, 하나님의 거울을 가지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열심히 화두를 들어 확연히 깨치면 빛이 샐 틈조차 없어 보이던 그 두꺼운 번뇌 망상의 구름장도 단번에 확 걷힌다. 그러면 자성을 분명히 보아 한가로운 도인으로서 자유자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모두들 어렵다고 여기지만,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해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다.
【2-5】 ①십이인연을 요견了見한 자는 즉시 만법을 정견한 자요, 만법을 정견한 자는 즉시 불타를 철견徹見한 것이라, 불타라는 것은 즉시 불성이니 무슨 연고 인고 하면 일체제불이 이것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니라. ①見十二因緣者는 卽是見法이요 見法者는 卽是見佛이라 佛者는 卽是佛性이니 何以故오 一切諸佛이 以此爲性이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68c)
* 십이인연을 체득한 사람은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불성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평석】 견법見法이 즉 견불見佛이며 불은 즉 불성이니 법성과 불성은 동체이명同體異名이어서 이를 진여·여래장·법계·정변지正遍知·심지心地 등의 천명만호千名萬號로 부른다.
* 진리를 체득한 것이 바로 붓다를 친히 본 것이며, 붓다는 바로 불성이며 법성과 불성은 이름이 다를 뿐 같은 몸이다. 이를 참다운 본성[眞如], 붓다의 본성이 담긴 태[如來藏], 진리의 세계[法界], 모든 것을 아는 지혜[正遍知], 모든 것을 키우는 땅과 같은 근원적인 마음[心地]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千名萬號]으로 부른다.
【2-6】 ①불성은 제불의 극과極果인 십력十力 부처님께만 있는 마음의 열 가지 힘으로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사생지력死生智力・누진지력漏盡智力.
과 사무소외四無所畏 두려움 없이 설법할 수 있는 불보살의 네 가지 지혜의 힘.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와 대비大悲와 사념처四念處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함. 육신은 더러운 것임을 관하는 신념처身念處, 느낌은 괴로움임을 관하는 수념처受念處, 마음과 생각은 무상한 것임을 관하는 심념처心念處, 모든 존재엔 실체가 없음을 관하는 법념처法念處의 네 가지.
니라. ①佛性者는 十力 四無所畏 大悲 四念處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70a)
* 참다운 본성[佛性]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 체득한 최상의 과보인 열 가지 힘[十力], 두려움 없이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네 가지 지혜의 힘[四無所畏], 중생에 대한 크나큰 사랑[大悲], 네 가지 마음 집중[四念處]이다.
【2-7】 ①중도를 불성이라 부르나니 그러므로 불성은 상주항일常住恒一 하여 변동과 천역遷易이 없느니라. ①中道者名爲佛性이니 以是義故로 佛性은 常恒하야 無有變易이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67c)
* 중도를 불성이라 한다. 불성은 한결같아 변함이 없고, 이동하지도 바뀌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평석】 석존이 보리수하에서 무상정각을 성취한 후에 녹야원으로 5비구를 심방尋訪하여 개구제일성開口第一聲으로 “아我는 중도를 정등각 하였다.”고 선설宣說하였다. 이것이 석존의 대각大覺 내용을 개진開陳한 ‘중도 대선언’이어서, 중도는 불성이므로 중도를 정각하였다 함은 불성의 정견 즉 견성하였다 함이다.
*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뒤 녹야원에 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제일 먼저 “나는 중도를 올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큰 깨달음을 설명한 ‘중도 대선언’이며, 중도는 불성이므로 ‘중도를 올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 하신 것은 참다운 본성[佛性]을 바로 본 것으로, 이를 ‘참다운 본성을 체득했다’고 한다.
【강설】 견성하면 성불이라고 앞서 주장했는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말씀하신 대각선언大覺宣言을 살펴보면 중도를 깨달았다고 했지 불성을 깨달았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혹자는 ‘견성하면 성불한다는 주장은 부처님의 근본 말씀과 어긋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열반경』을 근거로 살펴보면 중도가 곧 불성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는 말씀은 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말씀과 한 치도 다를 것이 없다. 표현만 다를 뿐이다.
【2-8】 ①중도의 대법大法을 불성이라 호칭하나니 그러므로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라. ①中道之法을 名爲佛性이니 是故로 佛性은 常樂我淨이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68a)
* 중도의 큰 가르침을 불성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불성은 변함없음[常], 최상의 즐거움[樂], 참다운 본성 그 자체[我], 최상의 깨끗함[淨]이다.
【평석】 상·락·아·정은 대열반의 사덕四德이니 불성은 즉 여래의 대열반경계를 말함이다.
【2-9】 ①불성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이름하며 제일의공은 지혜라 이름 하느니라. ①佛性者는 名爲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智慧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67c)
* 불성은 최상最上의 공이며 최상의 공을 지혜라 부른다.
【평석】 불성은 제일의공, 즉 여래의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이다.
* 불성은 최상의 공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아는 지혜를 말한다.
【2-10】 ①12인연을 불성이라 부르나니 불성은 즉시 제일의공이요,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며 중도는 불타니 불타는 열반이라 하느니라. ①十二因緣은 名爲佛性이니 佛性者는 卽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中道며 中道者는 卽名爲佛이요 佛者는 名爲涅槃이니라. (『大涅槃經』 25, 『大正藏』12, p.768c)
*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부르며 불성이 바로 최상의 공이며, 최상의 공을 중도라 하며, 중도는 붓다이며 붓다는 열반이다.
【평석】 제일의공과 중도와 불타와 열반은 전부 불성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일체여래가 불성을 철견徹見하여 득도得道 성불한 것이다.
* 최상의 공과 중도와 붓다와 열반은 전부 참다운 본성[佛性]을 말함이니,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十方三世] 속의 부처님은 참다운 본성을 체득해 붓다가 되었다.
【강설】 불성을 바로 보면 곧 성불임을 『열반경』에 근거해 설명하였다. 다음은 『기신론』과 『육조단경』에 근거해 살펴보자.
【2-11】 ①자성이 무량무변한 일체의 공덕을 원만구비 하였느니라. ②자성이 법法·보報·화化의 삼신三身을 구비하였기에 발명發明하여 사지四智가 되나니, 견문의 반연攀緣을 이거離去하지 않고 초연히 불지佛地에 등입登入하느니라. ①自性이 滿足一切功德하느니라. ②自性이 具三身하므로 發明成四智하나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니라. (『起信論』, 『大正藏』 32, p.579a. 『壇經』, 『大正藏』 48, p.356b)
* ①참다운 본성[自性]은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많은 모든 공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②참다운 본성이 법신·화신·보신을 갖추고 있으므로 깨쳐[發明] 성소작지·묘관찰지·평등성지·대원경지가 되며, 보고 듣는 데서 생기는 여러 얽힘[攀緣]을 벗어나지 않고 초연히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선다.
【평석】 자성 즉 불성이 불교의 극과極果인 삼신사지三身四智를 구비하여, 일체의 공행功行과 덕용德用을 원만 구유하여 일호一毫의 부족도 없으니 참으로 부사의不思議 중 부사의不思議이다. 그러니 이 자성을 철견徹見 하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함은 당연 이상의 당연이다. 석존이 중생에게 기여한 최대공헌은 불성의 발견이다. 만약에 불성의 존재와 그 개발開發의 방법을 선시宣示하지 아니하였으면, 중생은 영작중생永作衆生으로 고해苦海를 도탈度脫하는 해탈의 길은 영원히 폐색閉塞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의 대원리에 의하여 노력 수행하여 법해法海에 자재 무애하는 대해탈도를 성취하여야 할 것이다.
* 참다운 본성[自性]은 불교의 최상의 과보인 법신·보신·화신과 성소작지·묘관찰지·평등성지·대원경지를 갖추고 있고, 모든 ‘공덕을 짓는 행동’[功行]과 ‘덕스러운 활용’[德用]을 빠짐없이 갖고 있어 터럭 하나[一毫] 만큼의 부족도 없으니 생각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즉시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에게 기여한 최대 공헌은 참다운 본성[佛性]을 발견하신 것이다. 만약 불성의 존재와 이것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열어 보이지 아니했으면 ‘중생은 영원히 중생으로 남아’[永作衆生] 고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탈의 길을 영원히 닫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중생이 참다운 본성을 갖추고 있다는 크나큰 원칙을 잊어버리지 말고 노력 수행하여 진리의 바다[法海]에서 자유롭게 거닐고 유희할 수 있는 참 자유를 성취해야 할 것이다.
【강설】 자성 속에는 불교에서 목표로 삼고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인 3신身과 4지智가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자성만 확실히 보면 곧 구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성은 어디에 있을까? 흔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등의 일상적인 작용을 떠나 자성이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이 불성이다. 이것이 자성이고 3신과 4지를 원만히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육조스님의 논지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일상사에 3신과 4지의 모든 공덕이 다 구비되어 있으니 이런 작용의 근본을 바로 알면 누구든지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중생이 곧 부처임을 처음 밝힌 분이 누구인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한데 성불해서 살펴보니 당신과 전혀 차별이 없는 불성을 일체중생이 빠짐없이 갖추고 있더라는 것이다. 굳이 차이를 논하자면 중생은 다만 번뇌 망상에 가려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었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신기하고도 신기하구나.”라고 부처님께서 탄복하신 구절이 나온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바로 보고 철저하게 깨달으면 그가 곧 부처님이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다. 바로 믿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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