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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무라카미 센쇼의 생애와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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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7 월 [통권 제87호]  /     /  작성일20-07-20 15:22  /   조회8,4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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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 일본 7

 

이태승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일본 근대불교학의 전개는 실질적으로는 인도철학印度哲學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인도철학이라는 말에는 불교가 인도의 철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당시 도쿄 대학 분위기에서는 철학이라는 말이 실질적으로 중시되어 사용되었다. 도쿄 대학은 개교 당시부터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해 학문의 영역을 지칭하였고, 이것이 철학과哲學科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학과 명칭이 되었다. 철학과 안에서 서양철학, 동양철학, 인도철학, 중국철학 등의 분야가 나누어지고, 인도철학은 불교연구가 주류가 되는 새로운 학문으로 간주된 것이다. 인도철학은 전통적인 한문불교의 연구가 기본이 되는 속에 난조 분유南條文雄에 의한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이 이식되자 사상철학의 영역을 넘어 언어학, 문헌학 등 새로운 분야에도 눈을 뜨게 된다.

 

  산스크리트 문헌의 해독에 근거한 학문적 방법론은 전통적인 한문불교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울러 근대불교학을 국제화하는 전기를 만들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일본의 불교연구가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시카고종교회의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일본의 불교 상황 내지 동양의 불교 전통을 서양에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근대기 다양하게 전개되는 불교학의 상황을 도쿄 대학의 인도철학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877년 설립된 도쿄 대학에서 최초의 불교학 강좌로서 ‘불서 강의’가 생겨난 것은 1879년으로, 이 때 강의를 담당한 사람이 조동종의 승려 하라 탄잔原坦山이며 그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강의 자료로 사용하였다. 철학과 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인 1881년에 ‘인도 및 지나철학’이라는 교과목이 생겨났고, 1882년에는 ‘인도철학’, ‘지나철학’이라는 교과목으로 독립되었다. 1882년부터 인도철학 강사로 새로 부임한 사람이 진종대곡파 승려인 요시타니 카쿠주(吉谷覺壽, 1843-1914)다. 요시타니와 하라 탄잔이 격년으로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불교학이 인도철학의 이름으로 철학의 한 분야로 정착하는 시점에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가 철학과에 입학해 수학하며(1881-1885), 난조 분유가 범어학梵語學을 담당하는 1885년에 졸업한다. 난조 분유가 담당한 범어학은 인도철학의 분야와는 달리 취급되었고, 범어학은 난조 이후 외국인 교수가 담당하고 1897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담당하게 된다. 인도철학은 하라가 1888년, 요시타니가 1889년 퇴직하고, 이들을 이어받아 1890년 새롭게 인도철학의 강사로 위촉된 사람이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9, 무라카미로 약칭, 사진 1)이다. 무라카미 이후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이 1899년 강사로 위촉된다. 

 

  1917년 인도철학은 철학과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학과체제의 운영이 이루어지고 이 때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무라카미로, 그는 인도철학과 초대 교수로 취임한다. 이렇게 인도철학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무라카미는 1890년 강사에 부임하면서부터 사상철학의 외연을 넓히는 새로운 학문적 영역을 개척한다. 그것은 ‘역사로서의 불교’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도쿄 대학의 인도철학과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불교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무라카미의 생애를 다음에서 살펴보자.

 


무라카미 센쇼

 

  무라카미 센쇼는 1851년 오늘날 효고현兵庫縣에 해당하는 단바丹波의 진종대곡파의 사찰 교각사敎覺寺에서 태어났고 본래 성은 히로사키廣崎였다. 일찍 부친으로부터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등을 배우고 독송하며 공부에 크게 눈을 떠, 실제 사찰 일보다는 공부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여러 절을 다니며 공부할 기회를 얻고, 18세에는 학문에 뜻을 둬 이웃지역 히메지姬路에 한학숙漢學塾을 열고 있던 정토진종 본원사파 선교사善敎寺의 유키 기도우結城義導를 스승으로 공부를 하였다. 이를 기회로 불교학의 연구에 뜻을 세워, 당시 불교학이 성행하던 니가타현新潟縣으로 가 향량원香凉院 행충行忠을 스승으로 유식학 등을 배웠다. 

 

  니카타현에서 3년 정도 머물며 공부한 뒤에 당시 동본원사의 유일한 전문학교이었던 교토의 고창학료高倉學寮에 들어가지만, 사정상 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미카와三河의 입각사入覺寺로 돌아오고, 이 입각사의 양자養子가 되어 무라카미의 성을 갖게 되었다. 이때가 25세였다. 입각사에서는 인명因明 등을 배웠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과 실제 해야 할 사찰 일에 대한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 절에 소속된 단가檀家들과 협의해 불교학을 계속할 뜻을 관철시켜 교토의 교사교교敎師敎校에 입학하고 여기서 공부한 뒤 한 중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조동종의 한 절에서 유식학 강의를 부탁받은 것을 계기로 교장직을 사임한다. 조동종의 절에서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쿄의 조동종대학曹洞宗大學에서도 유식학 담당의 강사로 위촉되어 도쿄로 가게 되고, 도쿄의 이노우에 엔료의 집을 방문하고, 엔료가 세운 철학관에서도 강의를 담당한다.

 

  지금의 고마자와 대학駒澤大學의 전신前身인 조동종 대학에서 2년간 강의한 뒤 사임하고, 무라카미는 1889년 3월 도쿄의 간다神田에 불교강화소佛敎講話所를 설치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불교강연을 하였다. 불교강화소 설립은 아마도 기독교의 전도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실제 무라카미의 활동은 일본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강연을 정리한 『불교강화집佛敎講話集』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널리 읽혔다고 한다. 1890년에는 도쿄에 있는 대곡교교大谷敎校의 교장에 취임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교사교교 입학 당시 종단을 위한 서약서에 근거해 어쩔 수 없이 취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이 해 당시 제국 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된 도쿄 대학 인도철학 담당의 강사로 위촉을 받는다. 대곡교교 교장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불교강화소를 폐쇄하고, 『불교강화집』도 3년간 36호를 발행한 것으로 폐간된다. 대곡교교 교장을 1894년에 사임하고, 도쿄 대학 강사로 위촉된 이후 무라카미는 불교역사의 연구에 크게 매진한다. 

 


야스타 강당

 

  무라카미가 불교의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대학에서 듣게 된 일화에 연유하는 듯하다. 곧 무라카미는 대학에서 일본의 역사에서 불교의 자료를 제외하면 일본의 역사는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고 그간 많은 자료를 모았지만 누군가가 정리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지만, 이후 무라카미는 종단의 원조를 받아 1894년 불교사 연구를 주로 하는 월간지 『불교사림佛敎史林』을 발행하고 크게 평판을 얻었다. 이 잡지는 3년간 발행된 뒤 폐간 되었지만, 이 잡지의 내용이 후에 『일본불교사강日本佛敎史綱』 제2권으로 정리 출간되고(1898년간), 이 책으로 1899년 3월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무라카미는 이 책 출간이후 『진종전사眞宗全史』(1916년간), 『선종사강禪宗史綱』(1946년간) 등을 펴내고, 불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은 『불교통일론佛敎統一論』(전5편; 제1편-제3편 1901-1905출간, 제5편 1927년간, 제4편은 『진종전사』로 대체)을 출간한다. 학문적 업적을 내던 무라카미는 종단으로부터 승적僧籍이 박탈당하는 일을 겪지만 후에 다시 회복된다. 무라카미는 재벌가財閥家인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郞를 설득해 인도철학이 학과로 독립하는데 크게 역할을 하며, 1917년 독립한 인도철학과 최초의 교수로 취임하고, 아울러 대학의 대강당으로 야스다강당(安田講堂, 사진 2)이 설립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1925년 준공). 1905년에는 오늘날 동양여자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동양고등여학교東洋高等女學校를 창설하여 불교교육을 현실적으로 실천한다. 1918년 제국학사원 회원 선임, 1923년 명예교수, 1926년부터 1928년까지는 대곡대학 제4대학장을 역임하고 1929년 타계했다. 호는 부주不住.

 

  무라카미는 그의 생애에서 보듯 자신의 학문적인 열정을 연구를 통해 발표함은 물론 실제 사회에 회향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불교강화소를 개설해 불교의 내용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썼던 것은 당시 학자적인 모습에서는 상당히 귀감이 된다. 이런 대중을 위한 포교의 모습은 무라카미가 도쿄에 입성 당시 철학관을 설립해 불교를 널리 알리고 있던 이노우에 엔료의 집을 우선적으로 방문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늘 공부하는 학자로서 연구에 몰두하지만 불교의 대중적인 포교도 잊지 않은 모습으로, 이런 노력의 결실이 동양고등여학교의 창립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무라카미는 한 때 진종대곡파 승적을 박탈당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종단의 개혁에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참여하였고, 그것에 대한 징벌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저술한 책인 『불교통일론』의 내용이 정토진종의 교리를 우선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보편적 진리를 우선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보면 조금은 기이하지만, 당시로서는 종단의 교학을 우선적으로 선양해야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세 번째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대승불교가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붓다의 직설直說이 아닌 것을 논증한 것에 대하여 문제 삼은 것이다. 이상의 것들로 인해 무라카미는 종단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하지만, 이에 대해 당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글을 써 대외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알렸다고 한다. 

 

  역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무라카미의 태도는 당시 사상 등에 중심을 둔 불교학으로의 인도철학을,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면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불교 역사를 보다 깊이 있고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으로, 일본불교의 역사는 물론 인도로부터 전개되는 불교 역사의 전반에 대해서도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현실적 여건 등을 살필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무라카미의 역사적인 방법론의 입장과 교학적인 관점이 절충된 방대한 불교이해는 그의 『불교통일론』 속에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불교학을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더욱 깊게 연구하는 전기를 만든 무라카미는 인도철학을 내실화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불교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인도철학의 영역을 깊고 넓게 만들었고, 인도철학을 독립된 학과로 성장시켜 불교에 대한 일본사회의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철학의 불교와 역사적인 불교의 입장을 조화시키며 인도철학을 장려하고 발전시킨 무라카미의 역할은 지금 돌아보아도 의미가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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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전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실담자기초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글익는들, 2004)), <을유불교산책>(정우서적, 2006), <산타라크쉬타의 중관사앙>(불교시대사, 201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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