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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산책]
“본래불의 장엄한 세계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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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20 년 8 월 [통권 제88호]  /     /  작성일20-08-28 11:54  /   조회8,35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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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한글법어

 

 

  퇴옹당 성철스님(1912-1993)이 강조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의 핵심은 ‘마음을 본래 모습대로 닦으면 그것이 곧 부처’라는 것이었고, 이를 닦는 방법이 바로 참선이었다. 그리고 그 실천적 가르침은 모든 분별과 대립의 경계선을 지우는 것이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적 관계에 있다. 이러한 법계연기에서 하나의 사물은 고립된 부분이 아니라 전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그 우주 전체를 반영한다. 성철 스님이 몽환夢幻 속에 피는 공화空華를 혼자서 잡으려 애쓰는 것을 버리고 더불어 재미있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법설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그것은 곧 융화融化의 중도中道를 바로보고 시비선악의 분별심이 없어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바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원래가 하나요,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비선악의 분별심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나로 보고 내가 이웃이 되고 열이 하나가 되고 백도 하나가되는 융화(融化)의 중도(中道)를 바로보고 분별의 고집을 버립시다. 모두가 분별심을 버리고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삼대(麻)처럼 많이 누워있는 병든 사람을 일으키고 본래 청정한 사바세계를 이룹시다.” (1993년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

 

 사바세계의 참모습은 수억 만 년 우주를 비추는 태양이나 티 없이 맑은 창공과 같이 청정하다. 하지만 분별심으로 인하여 욕심과 고통이 생겨나며, 시비선악도 본래 하나인데 이를 분별하는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해 바닷물을 다 마시려는 것과 같다. 하여 성철 스님은 나와 이웃이 하나 되고 더불어 잘 사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버리고 융화의 중도를 직시해야 하며, 그럴 때 삼대[麻]처럼 누워있는 수많은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본래 청정한 사바세계를 보듬을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성을 지니며, 한 몸임을 인식하는 성철 스님의 일체 생명에 대한 ‘모심’의 가르침은 법어 ‘참다운 불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내 집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佛供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1983년 5월, 어버이날 기념 종정 법어에서)

 

  일체 중생을 부처님으로 보고 모실 것을 설하고 있다. 즉, 생명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일체가 부처님 아님이 없기에 일체를 부처님으로 받들어 모시는데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모님, 가난하고 약한 사람, 기는 벌레, 머리 위를 나는 새 등 넓고 넓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하여 스님은 수 없이 많은 모든 생명 존재의 부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불공’임을 강조하고 있다.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處處佛]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불공이고 복덕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곧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백련암. 2월1일 촬영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배 비유 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불보살佛菩薩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듯 거룩한 법을 가르쳐 주신 석가세존께 깊이 감사하며 항상 불공으로 생활합시다.”(1983년 5월, 어버이날 기념 종정 법어에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으로서 생명을 있게 하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를 가나 만나는 수많은 불공대상[부처님]을 모시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올리는 자비실천이다. 이처럼 성철스님의 진정한 불공의 생활화의 강조는 모든 생명은 상의상자相依相資의 연기성緣起性 속에 있음의 인식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아상으로 독선과 이기를 주장하고, 다른 이를 미워하고, 해치고자 하는 무서운 몰이해의 장벽을 쌓아가고 있다. 작금의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연민과 조화 위에 서로를 아끼는 공존의 지혜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생명의 당위當爲임을 스님은 설파하고 있다. 

 

“인연이라는 매듭에 얽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상의상자相依相資의 연기성緣起性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와 독선이 뿜어대는 공해가 지금의 우리 시대를 어둡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이윤을 탐하고 '나'만의 안일을 추구해 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기라는 사상성의 토대 위에 선다고 하면 결코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서로를 학대할 권리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연민과 조화 위에 서로를 아끼는 공존의 지혜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생명의 당위일 것입니다.” (1984년 부처님오신날 종정법어에서)

 

  생명은 어떠한 힘으로도 위협을 받거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 다른 존재들과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 놓여 있는 모든 생명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연민과 조화 위에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는 ‘공존의 지혜’를 밝히는 일은 만물을 상호연기적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고, 반생명적 근대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응이며 어울림과 화해의 정신을 지향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이며 상호 스며드는 세계에 바탕을 둔 생명존중의 사유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구원을 지향한다할 때, 성철 스님의 법어는 다분히 ‘생명의 거미줄web of life’이라는 생태계의 원리를 수용한 화엄의 원융세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 시대의 지배적 경향으로 전개되어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불자 된 이의 책무이며 긍지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점을 가르치고자 오셨으며, 영원의 미래에서도 그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평화와 자유는 결코 반목과 질시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대립은 투쟁을 낳고 투쟁은 멸망을 낳습니다.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지워질 수 없습니다. 지극한 자비의 도리가 실현되어야 할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의 물결이 그윽한 마음의 원천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동질성 위에 모든 생명이 하나일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를 희망에 용솟음치게 합니다.” (1984년 부처님오신 날, 종정법어에서)

 

  상호 이해의 노력은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고,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영원한 가르침이다. 평화와 자유는 결코 반목과 질시로 얻어질 수 없고 오로지 상호 이해에서 얻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립은 투쟁을 낳고 투쟁은 멸망을 낳으며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지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성철 스님은 상호이해 기반의 동체대비의 자비실천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생명이 하나일 수 있다는 사유, 즉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모든 생명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는, 생명이 경시되는 오늘날 생명의 ‘살림’의 가치로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성철 스님은 풍요로운 물질과 편리한 이기로 지구를 주름잡고 화려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와 불안의 늪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은 바로 무명의 그림자가 가려서 진정한 눈을 뜨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설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혀 본래불을 볼 것을 설파한다.

 

   “넓은 가을 들판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은 부처님들의 공양구供養具요, 깊은 골짜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일체를 해갈解渴시키는 무상無上의 감로수입니다. 이 감로수를 백옥 잔에 가득 부어 부모조상 형제자매 서로 권할 적에 붉은 머리 흰 학들은 앞뜰에서 춤을 추고 아롱진 꽃사슴은 흥을 못 이겨 녹음방초綠陰芳草 뒷동산에 뛰어노니, 극락이 어디인고, 천당이 부끄럽다! 성현달사聖賢達士 악마요부惡魔妖婦가 본래불의 마음으로 무생곡無生曲을 합주합니다. … … 부귀허영富貴虛榮의 꿈을 안고 이리저리 날뛰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여! 눈을 들어 본래불의 장엄한 세계를 바라봅시다.” (1990년 부처님오신날 법어에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법을 매개로 한 연기적 관계로 파악한 스님은 가을 들판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이 부처님들의 공양구이고, 계곡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일체를 해갈시키는 무상無上의 감로수로 본다. 이 감로수를 백옥 잔에 가득 부어 부모조상 형제자매 서로 권할 때에 붉은 머리 흰 학들은 춤을 추고, 꽃사슴은 흥을 못 이겨 녹음방초綠陰芳草 뒷동산에 뛰어노는 것으로 노래한다. 이곳이 성현달사 악마요부가 본래불의 마음으로 무생곡無生曲을 합주하며, 서로가 부모형제 되어 일체가 융화하여 시비장단이 없고 싸움이 없는 극락정토이다. 현상계의 상대적인 세계 즉, 유무・색공・선악・미오・시비 등 분별의 세계를 초월한 하나의 세계를 의미하는 일색변一色邊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우주적 화음은 갈등과 대립에 익숙한 인간을 천지화육天地化育에 동참하게 만들며 상호 유기적이며 통합적인 삶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스님은 부귀영화를 꿈꾸며 사방으로 날뛰는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에게 본래불의 장엄한 세계를 바로 볼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철 스님이 태어났던 생가는 2001년 3월 겁외사劫外寺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고, 2014년 성철스님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보고 있는 겁외사는 ‘불생불멸'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시간 밖의 절'이란 뜻이다.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다. 스님의 담대한 출가 정신과 법향을 느낄 수 있는 겁외사는 곧 대립적인 시비분별이 끊어진 청정 일색변의 깨달음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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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전 국제포교사회 회장. 전 한국동서비교문학회 부회장, 저서로 <선시의이해와 마음치유>, <불교 설화와 마음치유>, ><숲 명상시의 이해와 마음치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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