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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기도]
그 말씀 오롯이 믿고 행하니 끝내 이루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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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순  /  1997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10,60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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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그 말씀 오롯이 믿고 행하니 끝내 이루어지더라

대구 백련암 포교당 정혜사 불자들

 

글 : 노희순 / 월간 봉은 편집장 

 

“대구가 캄캄한 밤중이더니 이제 환희 밝게 됐다. 두고 봐라. 대구 보살들 불 붙으면 못 말릴기라.”

벌써 육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대구 보살들은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대구에 큰스님 법을 잇는 도량을 꼭 세우겠다.”는 원을 세우고 찾아 뵌 자리였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한껏 겨워하시며 대구 보살들에게 격려 겸 한 말씀 내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열반하시기 직전, 대구에 도량이 세워지거든 쓰라시며 ‘정혜사(正慧寺)’란 이름을 손수 지어 원구 스님 편에 보내주셨다.

 

 

2층 법당에는 부처님이, 1층에는 일원상을 모셨다.

 

 

그 ‘못 말리는’ 대구 보살들은 마침내 지난 96년 10월, 자신들의 힘으로 대구시 대명9동에 참회 기도 도량 정혜사를 건립하고 봉불식 자리에서 마냥 울어 버렸다. 

 

보살들이 세운 절, 정혜사

 

“와 그리 눈물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데예. 서로 끌어안고 많이 울었지예.” 너무나 기쁜 나머지, 스스로들이 대견해서 흘린 눈물이었다. 그간의 고되고 고통스럽던 일들이 묵은 업장 녹듯 소리 없는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89년도부터 발원하여 부은 적금이 93년에 9천만원이 되었고, 재형저축 1천 8백만원 까지 합해 1억 8백만원 그 돈을 들고 90여 평의 땅을 산지 1년 만의 봉불식이었다. 건축비를 포함해서 시설비까지 총 6억 원의 불사금 때문에 공사 기간 8개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저승 문턱 드나들 듯 살아온 그들이기에 그 감격을 무엇에 비할 수 있었으랴.

 

모임의 회장 자비심과 총무 서래심 보살은 하루라도 얼굴을 못 보면 궁금해지는 ‘도반’들과 모이면 가끔 그때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70여 명의 회원들이 힘을 모으긴 했지만 책임을 맡은 임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해도 간 큰 일을 벌였던 것이다. 큰스님 생전에 함께 백련암 아비라기도에 동참하며 다진 도반들의 결집력이 아니면 어디 가능키나 했겠는가. 그런 그들이기에 기도 장소가 없이 십여 년간 이 절 저 절 떠돌면서도 흩어지지 않고 오늘까지 인연을 맺어왔고 마침내는 참회 수행 도량 정혜사를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혜사. 아침이면 일터로 향하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분주하고, 저녁이면 귀가하는 이들의 노곤한 일상이 있는 대구시 대명 9동 주택가 한복판. 큰 길에서 ‘백련암 대구 포교당’이란 안내판이 가리키는대로 널직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그곳에 정혜사가 서 있다. 마치 황량한 연못 속에 홀연히 핀 연꽃 같은 모습으로.

 

‘신심(信心)이 성지(聖地)’라시던 큰스님 말씀처럼 굳이 산중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 숙면일여(熟眠一如)는 몰라도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는 이룬 것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가정을 꾸리며 신행생활을 하는 보살들의 힘으로 고대광실(회원들 스스로가 정혜사를 고대광실보다 좋다고 했다) 큰 절 부럽지 않은 도량을 일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수행 의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83년도에 발족, 법복 불사 등 닥치는 대로 일해

  

정혜사는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이며, 수행의 주체이기를 원하는 이들이 모여 이루어낸 청정 대작 불사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대지 90평, 건평 180평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크지 않은 규모지만 48평의 3층 법당은 하루 24시간 기도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백련불교문화재단에 등록되어 있지만 모든 운영은 신도들이 직접 해나간다. 청소 당번 등도 돌아가며 하고, 전기 요금, 수도 요금 등 한 달에 2백만원 정도 들어가는 운영비를 마련키 위해 신도들은 기도시간 외에는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는다.

 

정혜사의 가장 큰 재원은 역시 법복을 만들어 파는 일이다. 한 번에 3천 마 정도를 떼어다가 물감을 들여 법복을 만들어서 판다. 정혜사 건립 불사 때도 이 법복 불사 덕을 톡톡히 봤다. 법복을 봉고 차에 싣고 법회가 있는 절 문 앞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안해 본 일이 없니예. 요즘은 고추도 산지에서 직접 사다가 빻아서 팔고, 참기름도 팝니다. 우리 도반들이지만 자랑할 만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싫은 내색 없이 서로 돕고 그랬으니 버텼지요.” 다른 도반들이 일을 다 해주고 본인은 이름만 걸어 놓으라 해서 회장 노릇을 하는 것뿐이라는 자비심 보살의 도반 자랑은 끝이 없다. 그 힘든 아비라 기도중에도 잠시 짬이 나면 판을 벌여 법복, 이불, 방석 등을 팔았다. 손가락 까딱할 기운조차 없고 다른 불자들의 눈총도 따가웠지만 누구도 거부하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큰스님께서 대구 불자들의 뜻을 알고 기꺼이 허락해 주신 것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정혜사 식구들은 스스로 절하고 스스로 참회한다.

 

 

대구에서 해인사 백련암까지 아비라 기도에 동참했던 불자들이 모임을 가진 건 지난 1983년이다. 당시 백련암까지 2시간 남짓, 일 년에 네 번 있는 아비라기도에 동참하느라 오고가며 정든 30여 명의 대구 불자들은 자체 도량을 갖고 있는 부산 신도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뜻이 모아진 이들끼리 ‘정진회(精進會)’를 만들어 현경 스님을 모시고 이 절 저 절 다니며 자체 법회도 보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눈칫밥 먹기가 일쑤였다. 서러움에 뼈저려 원력을 세웠다. “그래, 우리들만의 수행 도량을 세우자.”

 

그리고 89년에 전세로 ‘참회원’이란 작은 수행 공간을 만든 것이 오늘날 정혜사의 불씨가 되었다. 스님이 아니고 일개 불자들이 도량을 세우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회원들 스스로도 가능한 일인지 되짚어 보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좌절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갈등도 생겨 떠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피운 그 작은 불씨는 끝내 꺼지지 않고 들불처럼 타오른 것이다.

 

"남을 위해, 중생을 위해 기도하라."

 

현재 정혜사 신도는 약 80여 명, 많은 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느 불자들과 확연히 다르다. 항상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고, 하루 삼천 배는 보통이다. 만 배를 거뜬히 하는 신도도 드물지 않은데, 그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남을 위해 하기를 권장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큰스님 말씀을 우리 신도라면 누구나 확실히 믿고 따르지예. 큰스님 생전에 직접 같이 기도해 본 신도들이라서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져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면 결국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원력을 무시하란 말은 아니라고 한다. 천지가 한 뿌리이니만큼 다른 이의 복덕은 곧 자기의 복덕이 된다는 이치다.

 

정혜사 신도들은 정기법회 외에는 자신들이 편리한 시간에 각자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 달에 한 번 스님의 법문을 듣는 외에는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하고 불공도 스스로 한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법당을 개방하는데, 어느새 알음알음으로 소문이 퍼져 집안에 위독한 환자가 있거나 우환이 있는 불자들이 새벽이고 밤늦은 시간이고 가리지 않고 급할 때 찾아오는 귀의처가 되었다. “큰스님께서 밥 숟가락 들 기운이라도 있으면 108배 하라고 항시 말씀하셨어요. 우리 정혜사 신도들은 수시로 절하고 기도합니다. 10년째 매일 3천 배를 하는 보살도 있어요. 집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생활의 지침이 되는 일과표

 

 

절에 나올 시간이 없으면 집에서라도 기도하고 절 한다는 정혜사 신도들. 그 지극한 모습에 가족들도 감동해서 자청해서 법회에 동참하기도 하고 절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수행과 기도의 공덕은 그리도 크고 깊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남들을 감복시키는 모양이다. 그러고도 시간이나 공간을 넘어서서 오래도록, 아주 멀리 향내를 발한다.

 

정혜사 3층 법당 불단의 오른쪽에 불자(拂子)를 든 큰스님 사진이 모셔져 있다. 정혜사 불자들의 오롯한 발원을 지켜보고 계신지도 모른다. 가시고 난 뒤에 더욱 커보이는 스님의 법력, 스님의 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히 살아나 세간 저 멀리까지 그렇게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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