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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가야산 사자후]
본지풍광 평석① - 부처님 처음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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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1996 년 3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9,410회  /   댓글0건

본문

<편집자 주>

큰스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상당법어집인 <본지풍광>을 만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초판이 출판된 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여러 불자와 신자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하시고는 “이 상당법어가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 자성의 본지풍광을 밝힌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 눈 밝은 사람이 나온다면 다행이다”라고 하셨는데, 한 줄기 밝은 빛을 만나 조계의 큰 강을 훌쩍 뛰어넘은 사람이 몇이나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책을 펴보기도 전에 너무 어렵지 않느냐며 오히려 돌아가는 눈먼 중생들을 보시고 큰스님께서 생전에 간단한 해설을 붙여두셨던 것을 다시 정리하여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간절하고도 간절하신 큰스님의 말씀이 각자의 본래면목을 비춰 보이는 밝은 거울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시

창해의 구슬과 형산의 옥은 

천지를 비추고 일월을 빛나게 하니
높은 관 쓴 선비는 홀을 들고 춤추고
머리 깍은 스님은 물러나 달아난다.
복희 성인이 팔괘를 그림이여, 만세의 표준이요
서백 문왕이 육효를 나눔이여, 천고의 귀감이로다.
삼현과 삼요는 꿀 속의 짐독이요,
사할과 사빈은 눈 속의 가시로다.
부처님의 바다 같은 법문과 누른 책 붉은 두루마리 경전은
이 무슨 뜨거운 주발에서 물 끓는 소리인가?
여기에 이르러 한마디 할 수 있겠느냐?

(주장자 한 번 내려치고 말하였다.)
 
푸른 용은 대천세계 밖으로 힘차게 날고
흰 범은 만길의 봉우리 위에서 소리친다

 

해설
창해(滄海)란 글자 그대로 푸른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해바다 저 깊은 곳을 말하며, 형산(荊山)은 중국에서 제일 좋은 보배가 나는 땅의 이름을 말한다. 그러니 동해바다 저 깊은 곳에서 나는 아주 좋은 보배구슬과 형산에서 나는 아주 좋은 옥이 함께 천지를 비추고 해와 달을 두루 비춰서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아관(峨冠)이란 큰 갓 쓴 사람을 말하니, 큰 갓을 쓴 사람이란 선비를 일컫는 것으로 바로 속인(俗人) 즉 세속 사람을 말한다. 홀(笏)이란 불가에서의 주장자와 같은 것으로 벼슬 있는 선비들은 늘 홀을 손에 쥐고 있는데 지금은 속인이 홀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정(圓頂)이란 머리를 빡빡 깎아서 이마가 둥근 사람은 말하니 바로 출가인(出家人) 곧 스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은 그 스님이 물러나서 달아나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해의 구슬과 형산의 옥이 천지를 비춰서 해와 달을 빛나게 하는데 어째서 큰 갓 쓴 벼슬하는 속인은 홀을 흔들며 춤을 추고 머리 깍은 스님은 물러나 달아나버리려 하느냐.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으니, 대중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복희씨는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큰 성인으로 추앙받는 분인데, 그 분이 팔괘(八卦)를 처음 그렸다고 한다. 복희씨 같은 대성인이 팔괘를 그렸으니 천추만세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백(西伯)은 주 문왕을 말하는 것이니, 주나라 시조되는 문왕이 복희씨의 팔괘를 보고 육효(六爻)를 베풀어 주역 64괘를 제정하여 주역이 완성되었으니 천추만고에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선종 5가 가운데서도 가장 정맥을 잇는 임제종의 개창자인 임제스님의 가장 골수되는 법문이 삼현삼요*이다. 그리고 짐독이란 짐새의 독을 말하는데, 그 독이 어찌나 독한지 날개가 한 번만이라도 술잔 위를 스쳐 지나가면 그 술을 먹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짐독은 독 중에서도 가장 독한 독을 말하는 것이다. 사할사빈*도 임제스님의 법문으로서 종문의 규거가 되는 말씀이다.

 

꿀을 먹으면 달고 좋은데, 여기서는 삼현삼요는 꿀 속에 짐독이 들어 있는 것과 같고 사할사빈은 눈 속의 가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앞의 주역을 말할 때는 이것이 천추만고의 표준이 되고 귀감이 된다고 해 놓고 우리 선종에서 가장 생명되는 골수법문인 삼현삼요와 사할사빈은 꿀 속의 짐독이요 눈 가운데 가시라고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연히 미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깊은 뜻이 있으니, 그 깊은 뜻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금구(金口)란 부처님 입을 가리키는 말이고, 황권(黃卷)은 누런 책, 적축(赤軸)은 책을 맬 때 붉은 실 또는 붉은 껍질로 싸기도 하므로 모두 다 부처님 경전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입에서 바닷물같이 무량무변(無量無邊)으로 쏟아지는 법문과 경전들이 이 무슨 물 주전자에서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냐는 것이다. 부처님이 48년간을 횡설수설하신 것을 수집해 놓은 저 무량무변의 바닷물같이 많은 법문도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와 같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도리어 한마디 법문으로써 그 뜻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내려치고 말하였다.)

 

푸른 용은 저 높이 삼천대천세계 밖으로 날고
흰 범은 천길만길 깎아지른 봉우리 위에서 소리친다.

이 뜻을 알면 오늘 법문은 다 끝났다. 그런데 참고로 몇 마디 더 하겠으니 대중은 잘 들으시오.

 

본칙
세존께서 태어나실 때에 일곱 걸음을 두루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내가 홀로 높으니라.”

 

착어
“칼산에 몸을 가로 눕히고 칼 수풀에 송장이 엎어졌네.”

 

해설
부처님이 탄생하실 때에 일곱 걸음을 빙 둘러 걸으면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고 한 손가락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가락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하늘 위나 하늘 밑이나 오직 내가 가장 높다고 말했다.
어떻게 갓난아기가 일곱 걸음이나 걸을 수 있으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의 신비라는 것을 절대로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의 능력에는 이러한 것이 전체로 다 구비되어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왜, 어째서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면서 내가 가장 높다고 말했느냐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이 법문의 뜻을 확실히 알 것 같으면 일체 법문을 근본적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내가 한마디 하겠는데 “칼산에 몸을 가로 눕히고 칼 수풀에 송장이 엎어졌다”고 평하니, 이 소식을 알 것 같으면 실제로 부처님의 근본면목을 알 수 있다.

 


그 뒤 운문 언스님*이 부처님의 그 말씀에 대해서 평하였다.
“내가 만약 그때에 보았던들 한 몽둥이로 때려죽여 개나 뜯어먹게 주었으리라.”
  
착어
“웅장하고 높고 높은 보화의 좌대로다.”

 

해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사방 일곱 걸음을 걸으시며 그런 좋은 법문을 하였는데, 운문스님은 무슨 안목을 가지고 있길래 당장에 죽여 가지고 개나 뜯어먹게 하겠다고 하는 이런 당치 않는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의 뜻이 겉으로 표시되는 뜻만 가지고는 부처님의 뜻도 모르고 운문스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니, 여기에 참으로 깊은 뜻이 있다.

 

그러면 운문스님은 개나 뜯어먹게 주겠다고 한 말에 대해서 나는 왜 웅장하고 높고 높은 보배 꽃으로 만들어 놓은 부처님의 좌대라고 좋게 평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얼른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절대로 모순되는 말이 아니니, 그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낭야 각*스님이 평하였다.
“운문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많은 나라의 부처님을 받드니 이는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음이다.”

 

착어
“슬피 우는 가운데 원한의 고통을 더한다.”

 

해설
보통으로 보면 운문스님은 부처님을 욕하고 매도한 것 같은데, 낭야스님이 왜 운문스님의 법문에 대해서 참으로 부처님을 잘 받들고 부처님의 은혜를 진실로 갚은 사람이라고 하였는지 참으로 깊고 깊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낭야스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법문이 하도 슬퍼서 다리를 뻗고 가슴을 두드리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면서 팔만고처(八萬苦處)에 원수가 맺히고 맺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허당 우*스님이 또한 운문의 평을 평하였다.
“부처님께 공물을 올림에 많은 향이 필요없느니라."

 

착어

"몽둥이질 일흔 두 번은 또한 가벼운 용서이나 백오십 번을 몽둥이로 때려도 그대를 놓아주기 어렵도다."

 

해설

운문스님은 부처님에게 실제로 그렇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는데, 어째서 허당스님은 부처님에게 정성을 드릴 때에는 꼭 많은 향이 필요가 없으며 한 조각도 좋고 반쪽도 좋고 두 개도 좋고 세 개도 좋다고 했느냐 말이다. 여기에도 참으로 깊은 뜻이 있다.

 

나는 허당스님의 평을 평하기를, 일흔두 번 때리나 백오십 번을 때리나 다 가벼운 것이니 뼈가 가루가 되어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도록 천 만방이 만 방망이로 두드려 패야지 조금 때려서는 안 된다고 하겠다.

 


대혜 고*스님이 송하였다.
“늙은이가 나자마자 허둥대니
일곱 걸음 두루 걸음은 미친 사람 같네.
저 한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속여서
멀쩡하게 눈을 뜨고 확탕지옥에 들어간다.”

 

착어
“비단 위에 꽃을 놓으니 한결 더 곱구나.”

 


정엄 수*스님이 송하였다.
“봄을 따라 크고 작은 꽃이 두루 아름다우니
비 내린 교목 숲에서 두견새 우는구나.
사람 고요한 단청 누각 달 밝은 밤에
떨어진 꽃잎 앞에서 기쁜 술에 취한 노래 부른다.”

 

착어
“눈 위에 서리 내리니 근심을 더한다.”

 

해설
지금까지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여러 스님들의 평과 송을 인용했는데, 말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모순 같고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그 모순 속에 깊은 뜻이 있다. 그 깊은 뜻을 화두정진을 부지런히 해서 바로 알아야 본분 수행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고칙*
조주스님*이 한 암주를 찾아가서 “있느냐, 있느냐?” 하니 암주가 주먹을 불쑥 쳐들었다. “물이 얕아서 배 댈 곳이 못되는구나” 하고 가버렸다.

 

착어
“붉은 하늘에 고운 빛 봉새가 운다.

 

고칙
조주스님이 또 한 암주를 찾아가서 “있느냐, 있느냐?” 하니 그 암주도 또한 주먹을 불쑥 쳐들었다. 조주스님이 “능히 놓아줄 줄 알고 뺏을 줄 알며, 능히 죽일 줄 알고 살릴 줄 안다” 하고는 절하고 가버렸다. 

 

착어
“구천에서 외로운 혼이 우노라.”

 

해설
옛날 조주라는 큰스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암자를 찾아가서 “있느냐, 있느냐?” 하고 물으니 불쑥 주먹을 드니 조주스님은 “물이 얕아서 배를 대지 못하겠다” 하고 가버렸다. 다른 암자를 찾아가 똑같이 물었더니 똑같이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스님은 그 암주에게 “놓아줄 줄 알고 뺏을 줄 알며, 죽일 줄 알고 살릴 줄 안다” 하며 제일 크고 제일 높은 법문을 한다고 칭찬을 하였다. 주먹 드는 것은 꼭 같은데 왜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고 한 사람은 아주 높고 깊은 법문을 한다고 칭찬을 하였느냐 말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조주스님 같은 이는 타심통을 한 분이기 때문에 먼저의 암주는 주먹을 들어도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 말했고, 뒤의 암주는 주먹을 들어도 깨친 사람이기 때문에 조주스님이 그 내용을 알고 칭찬한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흔히들 이렇게 해석을 많이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석을 하면 이것은 암주가 주먹 든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조주스님이 말씀한 그 근본 뜻도 참으로 모르고 천리만리 동떨어진 사람이 되고 만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한 암주에게는 “붉은 빛 하늘에 고운 봉새가 운다” 하고, 한 암주에게는 “구천에서 외로운 혼이 통곡한다”고 했으니, 이것 또한 정반대되는 말이다. 이 뜻을 열심히 공부해서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원오 근*스님이 평하였다.
“부처와 조사의 명맥이요 모든 성인의 근본수단이니
북두를 바꾸고 별을 옮기며 하늘을 지배하고 땅을 다스린다.
어떤 사람이 깊은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혓바닥이 조주의 입 속에 있다’고 말하니
자기의 성명(性命)이 이미 남에게 있음을 알지 못한다.
만약 향상의 근본법을 알고서 두 암주와 마주 대하면
용과 뱀을 가려내고 검고 흰 것을 분별하리니
이때야말로 힘을 붙일〔着力〕 때이다.
조주의 귀결처〔落處〕를 아는가?
절대로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착어

"구름은 재 위에서 한가로이 떠돌고

물은 산골 아래로 빨리도 흐르는구나."
  
해설
조주스님의 법문은 참으로 부처님과 조사의 명맥인 동시에 천상천하의 모든 도리를 둘러싸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법문이 넓고 깊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혓바닥이 조주스님의 입 안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도 지껄이고 저렇게도 지껄여 놓은 것인데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조주의 법문에 무슨 깊은 뜻이 있겠느냐 하면서 오해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도리어 자기의 생명이 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자기의 생명이 남의 손에 있을 것 같으면 자기는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향상법(向上法)을 바로 안 사람 곧 구경법(究竟法)을 바로 깨친 어떤 사람이 있어서 두 암주를 다 만날 것 같으면 바로 우열을 간파해 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확철대오해서 눈을 바로 뜬 사람만이 두 암주가 주먹 든 뜻도 아는 것이고, 조주스님이 두 암주를 욕하고 칭찬한 뜻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사량복탁의 피상적인 관찰로써는 그 뜻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오직 자성(自性)을 깨쳐서 일체 공안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자재무애의 확철대오한 사람이 아니면 이 법문은 절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오스님은 앞에서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근본 생명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주스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뜻을 알려면 절대로 글로써가 아닌 마음으로 깨쳐야 하는 것이다.

 

이 원오스님의 평에 대해서 나는 “구름은 재 위에서 한가로이 떠돌고, 물은 산골 아래로 빨리도 흐르는구나”라고 평하였다. 무슨 풍월을 읊은 것 같지만 이 소식을 바로 알면 원오스님이 말씀한 뜻도 알 수 있는 것이고, 두 암주의 뜻도 알고 조주스님의 뜻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세존이 천상천하에 나 홀로 높다고 하신 말씀이나, 거기에 대해서 운문스님이 평한 말씀이나, 낭야스님의 평이나, 허당스님의 평이나, 대혜스님과 정엄스님의 게송의 뜻도 전체적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평한 뜻을 모르면 다른 것도 다 모르는 것이다. 이것도 깨쳐야만 아는 것이니 사량분별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90일 동안 결재를 했으니 어찌되었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도리를 확철히 깨친 사람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대중들이여!
석가노인은 32상 80종호요
운문대사는 귀신의 머리와 신령의 얼굴에 칠수팔각이요
조주 고불은 물고기 뺨과 새 주둥이에 눈 멀고 귀먹었다.
말해 보라, 뜻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한참 묵묵한 후에 말하였다.)

머리를 돌려 남쪽을 향해 북두를 보니
무쇠소가 돌 기린을 낳았구나.

 

해설
부처님은 32상과 80가지의 좋은 모양의 몸을 가진 거룩한 어른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일인데, 어째서 운문스님은 귀신의 머리와 귀신의 얼굴을 하고 손은 일곱 개이고 다리는 여덟 개나 되는 그런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느냐.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조주스님도 참으로 옛 부처라 일컬어지는 분인데 어째서 뺨이 고기의 뺨과 같고 입이 뾰족한 새의 부리와 같다고 내가 말했느냐. 여기에도 깊은 뜻이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의 근본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머리를 획 돌려 남쪽으로 향해서 북두칠성을 보니 쇠로 만든 소가 돌 기린을 낳는다는 뜻을 분명히 아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남쪽을 향해서 어째서 북두를 보며, 쇠로 만든 소가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새끼를 낳는다 해도 소 새끼를 낳아야지 어째서 돌로 만든 기린을 낳는다고 했느냐 말이다.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다. 

대중들은 이 깊은 뜻을 바로 아십시오.

 

<사자후 원문>

수시 滄海珠와 荊山玉이 照乾坤하고 光日月하니 峨冠은 舞笏하고 圓頂은 退走로다 犧聖이 劃卦兮여 萬世標準이요 西伯이 分爻兮여 千古龜鑑이로다 三玄三要는 蜜裏鴆毒이요 四喝四賓은 眼中荊棘이라 金口海宣과 黃卷赤軸이 是什麽熱椀鳴聲고 到這裏하야 還道得一句子麽아 卓柱杖 一下云 蒼龍은 雄飛大千外하고 白虎는 哮吼萬丈峰이로다

본칙 世尊이 初生下時에 周行七步하고 目顧四方하고 一手指天一手指地하고 云하되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하니 

착어 師云 刀山에 橫身하고 劒林에 伏屍로다.

송 雲門偃이 拈云하되 我當時에 若見이런들 一棒으로 打殺하여 與狗子喫이라하니
착어 師云 嵬嵬落落寶華座로다

송 瑯椰覺이 拈호대 雲門은 可謂將此深心奉塵刹하니 是卽名爲報佛恩이라하니
착어 師云 蒼天中에 更添怨苦로다

송   虛堂 愚 又拈 雲門拈云호대 獻佛에 不假香多라하니
착어 師云 七十二棒且輕恕라 一百五十難放君이로다

송 大慧杲 頌호대 老漢이 纔生便著忙하니 周行七步似顚狂이로다. 賺他無限痴男女하야 開眼當當 入鑊湯이라하니
착어 師云 錦上舖花又一重이로다

송 淨嚴遂 頌호대 承春高下盡鮮姸하니 雨過喬林叫杜鵑이로다 人靜畵樓月明夜에 醉歌歡酒落花前이라하니
착어 師云 雪上加霜亦愁哉로다

고칙 趙州訪一庵主하고 便云 有麽有麽아 庵主竪起拳頭한대 州云 水淺不迫船處라하고 便去하니
착어 師云 丹霄에 彩鳳鳴이로다
고칙 又訪一庵主하고 亦云 有麽有麽아 庵主亦竪起拳頭한대 州云 能縱能奪하며 能殺能活이라하고 便禮拜而去하니
착어 師云 九泉에 孤魂哭이로다

송 圓悟勤이 拈호대 佛祖命脈이요 列聖鉗鎚니 換斗移星하고 經天緯地로다 有般漢이 未出窠窟하       고 只管道호대 舌頭在趙州口裏라하나니 殊不知自己性命이 已屬他人이로다 若能握向上綱宗하       야 與二庵主相見하면 便可以定蛇龍別緇素하야 正好著力이니 還知趙州落處麽아 切忌顢悍이라 하니
착어 師云 雲在嶺頭閑不徹이요 水流澗下太忙生이로다

  大衆아 釋迦老人은 三十二相八十種好요 雲門大師는 鬼頭神面七手八脚이요 趙州古佛은 魚腮       鳥啄眼盲耳聾하니 且道하라 一著이 落在甚麽處오 良久云 回首面南看北斗하니 鐵牛生得石麒       麟이로다 喝一喝하고 下座하시다

 

주)
* 착어에 특별히 표시를 한 것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큰스님의 말씀을 보다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일인칭, 구어체의 문장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본문 중간에 ‘고칙’이라고 붙인 곳은, 큰스님께서 본칙의 내용을 보다 분명히 깨우쳐 주기 위해 인용하신 부분으로 ‘송’하고는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입니다. 원문이 필요한 독자를 위해 본문 뒤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 삼현삼요 : 임제스님이 수행자를 지도하실 때 쓰신 방법. 일구(一句) 중에 삼현문(三玄門)을 갖추어야 하고, 일현(一玄) 중에 마땅히 삼요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 사할사빈 : 사할은 임제스님이 수행자를 가르치기 위해 할(喝)을 사용할 때도 때와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이 있음을 네 가지 할로 제시해 설명한 것이다. 사빈은 사빈주(四賓主)를 말하며, 선사와 학인이 만날 때의 모습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 운문 언(865-949) : 운문종의 종조인 운문 문언스님을 말한다. 설봉 의존의 법을 잇고, 운문 3구․운문호떡․일자관 등 독특한 방법으로 수행자를 일깨웠다.
 

* 낭야 각(미상) : 낭야 혜각스님으로, 분양 선소의 법을 잇고 낭야산에서 학인을 지도하였다.
 

* 허당 우(1185-1269) : 임제종 양기파로 경산 지우(徑山 智愚)스님이라고도 한다.
 

* 대혜 고(1089-1163) : 대혜 종고스님으로 원오스님의 회하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고 법을 이었다. 경산의 능인선원에 머물며 종풍을 크게 진작시켜 임제스님이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 정엄 수(1072-1147) : 정엄 수수스님으로, 조동종이며 대홍 보은의 법을 이었다.
 

* 원오 근(1063-1125) : 원오 극근스님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여러 곳의 고승에게 참학한 뒤 오조 법연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선어록의 백미라 칭송받는《벽암록》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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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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