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붓다가 된 때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지혜와 빛의 말씀]
내가 붓다가 된 때


페이지 정보

성철스님  /  2020 년 3 월 [통권 제8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933회  /   댓글0건

본문

“내가 붓다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 億載阿僧祗.”(주1)

 

이 구절은 『법화경法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지금부터 2천5백여 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5백 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지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통 ‘성불’ 즉 ‘부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레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부처〔본래시불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뿐입니다.

 


196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북한산 비봉에 오른 세 스님. 왼쪽부터 성철 스님, 청담 스님, 향곡 스님. 오른 쪽 뒤로 진흥왕 순수비가 보인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有情, 무정無情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 정토淨土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이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곧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주2)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 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 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레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 설법을 한다고 해도,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 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는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깨끗한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원택스님(오른쪽)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눈뜰 필요 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 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천5백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 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낀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뜨려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지위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지려야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 말든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돕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진·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 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 보일 리 있습니까? 탐·진·치 삼독이 다 녹아 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스님부터 한번 굶어 보시지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년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큰 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 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 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척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 원이 넘는 ‘참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이니 살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 봐야 별것 아닙니다. 서 푼 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순치황제順治皇帝는 만주에서 나와 수년 동안 전쟁을 해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하였습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골, 티베트,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순치황제는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습니다.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王家〕”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그 보위寶位를 헌신짝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 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문모某 박사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와 하는 말입니다.

“스님들은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들이 개인주의가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은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남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이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입니다.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고.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니오?”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씌어 있어요.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고. 보살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예요.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 비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여러 억천만 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영원한 큰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에 ‘나카야마 미키’(주3)라는 여자 분이 있습니다. 굉장한 부자로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사람이 공부를 해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큰살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오. 내가 깨쳤어. 내가 하나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사람이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돕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 결국 돈벌이는 크게 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 한번 해봐야 겠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설사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못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 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리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 가지라도 남을 돕는 생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서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두 생활 방향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똑딱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 역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전혀 상관없이 살다가 내 자식은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쌀 한두 되 짊어지고 절에 가서는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 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참된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 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또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 하는 것이 내 근본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 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 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무엇인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행동은 남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1981년 음 6월30일, 방장 대중법어│

 

주)

주1) 『묘법연화경』 권제5 「여래수량품」 제16에 나오는 말씀이다.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이하 동일.  

주2) 『묘법연화경』 권제5 「여래수량품」 제16에 나오는 말씀이다.

주3) 1798-1887. 일본 근대 신흥종교인 덴리교天理敎의 교주. 나카야마 미키에 대해서는 가노 마사오鹿野政直 지음·이애숙 등 옮김, 『근대 일본의 사상가들』, 서울:삼천리, 2009, pp.42-47; 가노 마사오 지음·김석근 옮김,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 서울:소화小花, 2010, pp.97-114 등을 참조하라.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성철스님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