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교류의 매개체 불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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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0 년 3 월 [통권 제8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23회 / 댓글0건본문
김재란 : 철학박사·고려대 강의교수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던 시기에 중국의 사상적 토대는 주로 유학과 도가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춘추전국 시대라는 백가쟁명 시기를 거쳐 한(漢) 대에 들어와 동중서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전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확정하였고, 이후 도가 사상 역시 곽상 등의 사상적 발전을 거쳐 위진 남북조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보리수
인仁과 자연무위自然無爲
유학 사상의 핵심은 ‘인(仁)’ 사상이다.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논어>)는 공자의 원시 유학 사상은 또한 “자기 자신의 욕망, 이기심을 극복하고(克己) 주 나라 초기의 봉건제도를 회복하는 것(復禮)”이라는 윤리적이자 사회적 함의를 가진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고(성선설- 맹자),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교육, 제도, 경제적 평등 등 사회적 환경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성악설- 순자)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유학 사상은 가치적인 측면에서 모든 인간의 본래적 평등성 및 본연적 도덕성을 확신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순 임금의 옷을 입고 순 임금의 말을 하고 순 임금과 같이 행동하면, 나는 순 임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도가 사상의 핵심은 ‘자연무위(自然無爲)’ 사상이다. 인간은 만물, 즉 자연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가치적인 측면에서 다르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며, 그저 각자 자기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自然)’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본다. 만물의 다양한 모습과 품성들은 도(道)를 모태로 하여 저절로 생겨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 뿐(‘道法自然’), 그를 근거로 하여 만물을 차별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인식은 근원적인 평등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학의 인(仁)과 도가의 자연무위(自然無爲) 사상이 불교가 도입될 당시의 중국의 사상적 토대였다. 여기에 충격적으로 이질적인 불교의 공(空) 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공(空)은 도가의 무(無)와 혼동되어 격의불교가 등장하고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허무주의(니힐리즘)로 오해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학에서는 불교가 부자 관계, 군신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無父無君)고 비판하였다. 인과 자연무위만을 알고 있던 중국인들이 공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공 사상은 어떤 의미인가?
공(空) 사상
불교는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깨달음과 그가 얻어낸 해탈의 방법론에 근거한다. 불교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는 붓다가 얻고 다섯 명의 제자에게 최초로 설법하였다는 깨달음의 내용을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성제(四聖諦)’라고 하고, 구체적인 수행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한다. 삼법인이란 불교의 ‘세 가지 진리’라는 뜻이고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인데, 인생이 괴로운 원인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로 설명한 가르침이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의, 올바른 선정을 말하는데, 이 여덟 가지는 도덕성(戒, 계율), 정신 집중(定, 삼매), 지혜(慧, 반야)라는 세 단계 수행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사상은 한 마디로 공(空) 사상으로 요약되며,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오랜 역사적 발전과 넓은 지역적 다양성 때문에 상당히 다양하고 상이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공 사상만 인정한다면 모두 불교에 속한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제행무상
삼법인 중 첫 번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변화해가는 모든 현상들은 변화하지 않는 항상됨이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에 관련 없이 모두 생멸 변화하므로 항상되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것들이 항상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붓다가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하여 모든 현상은 항상되지 않다, 무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우친 첫 번째 진리이다. 너무 쉽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존적 상황을 문자나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로, 체험적으로 인식하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시간적 변화를 겪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있을까? 지금 나는 이 의자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내 전 체중을 맡기고 편안히 앉아 있지만, 백 년, 천 년의 시간차를 두고 생각해보면 이 의자는 천 년 후에는 흔적조차 없이 먼지로 변해있을 것이다. 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나 역시 백 년 전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듯이, 앞으로 백 년 뒤에는 역시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지금 학생들은 이십 년 전에는 아기였고, 앞으로 십 년이 흐르면 아기를 가진 엄마 아빠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오십 년 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고, 백 년 뒤에는 사라져서 흙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연인 사이의 뜨거운 사랑도 달이 기울어지듯 시간이 가면 달라지며,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는 표현은 모든 연인들의 심리적 진실이다. 우주 만물은 모두 한 순간마다 생멸 변화하는 무상의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붓다가 갈파한 인생의 첫 번째 진리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러니 이 변화무쌍하고 무상한 세계에서 사는 우리는 얼마나 허전하고 불안할까? 이 말은 이 세상에 믿고 의지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변화하지 않을 대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내 존재를 기대어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이든, 연인이든, 돈이든, 종교든 불안한 내 인생을 의지하여 안식처를 얻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대상에 죽도록 매달리고 집착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매달리고 집착하는 상태를 '오염된, 더러운 집착'이라는 의미에서 ‘염착(染着)’이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패배가 확정된 내기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불변하는 항상된 존재가 없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미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비극이 사실은 이러한 집착에서 시작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을 사람들은 동경하지만,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고 결혼하여 사랑을 이루었다면 그들 역시 평범한 부부들처럼 서로간의 사랑이 변하여 미워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헤어지거나 이혼했을 수도 있다. 아름다워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인생이고 인생의 진리인 걸 어떻게 할까? 그런데 내 사랑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그의 마음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마음이 달라졌는데도 상황이 변한 걸 인정하지 않고 매달리며 집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인생이 엄청 괴로워질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불교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一切皆苦)”라고 말하고, 바로 삼법인의 두 번째 항목이 된다.
일체개고
불교는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표현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괴로움으로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 것, 미워하는 대상을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감각적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왜 괴로움인가? 그것은 지금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새 생명에게 앞으로 그 생명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무수히 많은 괴로움들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기는 앞으로 무수히 많은 괴로움들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걸 예감하기 때문일까? 아기는 웃으면서가 아니라 울면서 태어난다. 아기는 엄마의 좁은 산도를 통해서 나오느라 힘들어 머리가 찌그러지고 괴로워 운다. 어여쁜 소년 소녀가 세월이 가면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하고 기운도 떨어지고 용기도 없어지며 얼굴도 미워지고 성도 잘 내게 된다. 이 세상에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옛 시에 “백발이 올세라 가시 들고 막아도, 결국 백발은 절로 오더라”는 것이 있다. 저 등 굽고 머리 흰 할머니도 예쁜 소녀 시절이 있었고, 저 고집 세고 보기싫은 할아버지도 씩씩한 청년 시절이 있었다. 늙는 것은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 죽는 것 역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우리는 잘 안다. 친한 친구가 이사가서 헤어져 자주 만나지 못하니 괴롭고, 예쁜 우리집 강아지도 언젠가는 죽어서 헤어지게 되어 괴롭다. 또 언제나 잔소리를 하고 피곤하게 했던 부모님은 언젠가는 곁을 떠나게 되고, 나이든 우리는 단 한 시간이라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나를 야단치는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살면서 미운 사람이 안 생길 수는 없다. 그래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안다. 학생들은 시험 볼 때마다 좋은 점수를 얻고 싶어 하지만 구한다고 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험 성적이 안 좋으면 괴로워하게 된다. 또한 인간이 감각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며 살 수 없고, 욕망의 속성상 충족되면 될수록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 여덟 가지 괴로움 외에도 일생 사는 동안 사람은 무수히 많은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해진다.
제법무아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는 인생을 ‘불난 집’에 비유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날 해탈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불교는 그 길을 이 세계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영원불변하는 자아(自我)가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이것이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깨달음이다. 제법무아는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이 없다’라는 의미인데, 아트만이란 앞에서 말한 브라만교에서 영원불변하는 우주의 실체로 상정한 우주적 자아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이 세계에는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불변하는 우주의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아트만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당시의 브라만교의 자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견해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난 까닭에 저것이 일어난다.”(<잡아함경>)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고정 불변하고 영원하며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우주의 대자아와 합일하는 자아는 실제로는 나의 착각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원인- 결과의 무수한 고리를 거쳐 만들어낸 지금 여기에서의 현상적인 존재일 뿐(=因緣의 존재), 결코 항상되고 불변한 단단한 개체인 자아가 아니라는 것(=無我)이다. 무수한 원인과 결과들, 즉 인연이 모여서 지금 여기의 내가 되었을 뿐, 그 인연이 흩어지면 바로 몇 가지의 물질적 원자들로 분리되어 소멸되어버릴 존재가 바로 지금 여기의 나이다. 이 세계의 다른 모든 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의 자아 인식이 이렇게 실제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착각이나 잘못된 견해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자아와 다른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와져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불교의 해결 방안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부른다. 이 깨달음의 세계는 생사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적막하고 고요하며(寂靜),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탈의 모습이 된다. 내가 집착하는 이 나라는 자아가 없는데, 이 세상에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또 부자유스러울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깨달은 사람, 즉 붓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옛 불교 사상가들은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천제성불론’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예비 부처님인 것이다.
이러한 공(空)이라는 불교의 혁명적인 사고 방식이,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던가(仁) 가지고 태어난 본성을 그대로 발현하며 살아야 한다(自然無爲)는 소박한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쉽게 이해될 수 있었겠는가? 앞으로 우리는 그러한 오해와 이해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고, 특히 근대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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