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층층 바위에 내 거처를 정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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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1998 년 3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7-14 15:49 / 조회15,069회 / 댓글0건본문
박상준(동국대 역경원 역겨위원)
한산자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은자가 나무나 바위 위에 써 놓았다고 전해지는 『한산시』는 천태산 국청사의 어떤 스님이 편집했다고 하는데, 한산자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들은 한산(寒山)습득(拾得)을 문수보현의 화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습득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한산시에서 빠져있던 것을 나중에 얻어서 함께 편집한 것이라고도 한다. 한산이 누구인지 습득이 누구인지 실제했던 인물인지 아닌지 말이 구구하지만, 어쨌든 이 시는 여러 구도자들에게 애송되어 왔고 지금도 애송되고 있는 시이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수행 정진하는 여가에 간간이 한산시를 읊조리곤 하셨다고 한다. 노스님께서는 한산시 원문에 현토(懸吐)를 하기도 하셨는데, 그 책은 도선사에 계시는 도우(道雨)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수백편에 달하는 한산시를 모두 소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가운데서 몇 편을 골라 함께 읽는 것만 해도 작지 않은 인연이라는 생각이든다. 처절한 수행정진의 틈바구니에 한산시를 감상하는 여유를 가졌던 구도자의 정신세계를 함께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넉넉한 일인가. 한산이 진공(眞空)의 세계라면 습득은 묘유(妙有)로 살아 솟구치는 세계이다. 한산시를 감상하는 이 유(有)의 시공(時空)에서 한산시가 쓰여지기 이전, 시공이 끊어진 공(空)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앞으로 한산시를 함께 읽는 우리가 풀어야 할 화두이다. 우선 한 수를 골라서 큰스님의 현토에 따라서 읽고 풀이해 보자.<역자의 말>
重巖에 我卜居하니
鳥道絶人跡이라
庭際何所有요
白雲이 抱幽石이라
住玆凡幾年고
屢見春冬易이라
寄語鐘鼎家하노니
處名定無益이로다
층층 바위 위에 내 거처를 정하니
조도(鳥道)에 인적이 끊어졌네
마당가에 무엇이 있겠는가
흰 구름이 유석(幽石)을 덮을 뿐
여기에 머문 지 모두 몇 년이런고
봄, 겨울 바뀜을 수없이 보아 왔네
종정가(鐘鼎家)에게 한마디 들려 주노니
처명(處名)은 결코 이익이 없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때로는 한없이 넓게도 느껴지고 한없이 좁게도 느껴지지만, 결국 시공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우주라는 말도 시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일뿐이다. (四方四維謂之宇 往古來今謂之宙)
이시는 시공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네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흰 구름이 유석을 감싸고 덮어주는 곳은 공간이고, 봄·겨울이 수없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적인 추이이다. 바로 이러한 시, 공간을 배경으로 앞 구절에서는 출세간 세계가 펼쳐지고, 뒷 구절에서는 세속의 헛된 명예를 추구하는 세계에 대해 한마디를 던지고 있다. 세간과 출세간은 서로가 아주 동떨어져서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공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범부와 성인이 함께 거처하고(凡聖同居) 용과 뱀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龍蛇混雜)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간과 출세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길은 인적이 끊어진 조도이다. 저 새가 다니는 길은 등산화 신고 터벅터벅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오를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있는 듯이 있지 않고 없는 듯이 없지 않으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非有非無 亦有亦無) 조도가 바로 상대적인 시비분별의 세계[世間]과 절대의 세계[出世間]을 이어주는 길이다.
밥솥을 즐비하게 걸어 놓고 식사시간이 되면 종을 쳐서 알리는 이 세속의 세계[鐘鼎家]에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왔나 싶더니 이제 신록의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다. 백련암 불면석에 흰 구름이 내려앉을 때 뒷짐을 진 채 포행하시는 노스님의 걸음걸음 발자국 소리를 우리는 듣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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