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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20 년 2 월 [통권 제8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50회 / 댓글0건본문
곰글 | 불교작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명언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묵직하게 들리지 않는다. 어려서 어느 티브이 드라마에서 한 제비족이 등장했는데, 후줄근한 조연이었다. 이제는 그 이름이 낯선 ‘캬바레’에서, 캬바레보다도 더 낯선 ‘지르박’ 춤으로 아낙들을 유혹하며 한몫을 잡는 자신의 일을, 그는 예술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제비족임에도 잘 생기지 않았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그 예술마저도 솜씨가 서툴렀다. 결국 그의 조악한 신세 때문에 예술이란 단어에 담긴 기의記意를 자연스럽게 낮춰본 모양이다. 꼭 그 드라마 때문만은 아닐 텐데 아무튼 그렇다. 꼭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나이 들어 불교계에서 일하게 되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의 종교적 버전을 접하게 됐다. ‘육신肉身은 유한하고 법신法身은 영원하다.’ 한국불교 제1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기틀을 만든 어떤 큰스님이 즐겨 쓰던 경구警句다. 이 말은 가볍지 않고 참 좋았다. 언젠가 병들어 소멸하고 말 육체는 허망하지만, 육체를 초월한 자성自性은 길이길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좀 더 폭넓게 해석하면 육체에 깃들었던 정신을 부지런히 굴려 일궈낸 정신적 자산은 육체가 사라져도 남으며, 심지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나의 글은 나의 법신이다.
아직 병들어 죽을 연령대는 아니지만 육신은 이르게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생리적인 몸이든 사회적인 몸이든, 아프고 겁나고 상처받고 밀려나는 일을 주로 당한다. 다만 늙고 위축된 몸이 무너지고 망가져갈수록, 날카롭고 딱딱한 활자에 내 몸을 빨리 옮겨 태우고 싶다는 욕망이 자주 든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글감이 잡히고, ‘이 따위로 죽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 키보드를 더 빨리 두드리게 된다. 나의 현실은 마치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이 아주 소소하다. 반면 그 모순과 반비례의 힘으로, 죽음이 오기 전에 반드시 완성해야 할 그 무엇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
“무엇이 저의 본분입니까?”
“죽은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그랬으면 발우를 씻어라.”
젊은이들이 더 나은 스펙을 추구하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더 나은 일자리를 거머쥐기 위함이다. 바꿔 말하면 그 번듯한 스펙이 막상 취업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껍데기이고 오히려 자존감을 갉아먹는 폐해가 되고 만다. 산다는 건 결국은 사는 것이어서, 죽기 전까지는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생계生計란 고래힘줄보다 더 질기고 더 기다랗고 더 피 냄새를 풍긴다. 생계에 연연하지 않고 생계를 떠받들지 않으면 삶을 존속하기란 불가능하다. 생계에 대한 공포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어쩌면 사는 게 겁이 나서, 여태껏 살 수 있었던 거다.
구원을 받는 성불을 하든, 일단 멀쩡하게 살아있어야만 뭐라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깨달음의 기본조건은 밥벌이다.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고 생계가 충족되고 참선을 할 힘도 생기며, 밥을 먹으려고 남의 밥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쨌든 밥을 먹어야 할 때 밥을 먹고, 만약 죽이라면 죽이라도 먹고, 밥그릇을 깨끗이 씻은 뒤 그 다음의 밥을 기대하거나 도모하는 것이 삶의 근본이다. 간혹 월급이 줄거나 끼니가 궁해지면 그게 전부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럴 때 쓰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가 어렵다.
“무엇이 학인學人의 본분입니까?”
“나무가 흔들리면 새들이 날아가고, 고기가 놀라면 물이 흐려진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만큼 올해는 더 초라해질 것이다. 자존감도 따라서 늙어간다. 현실에 승복하게 되고 주제파악도 하게 된다. 성공을 향한 야심보다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조바심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나도 인간이고 회한이라는 걸 아직도 털어내지 못해서,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글로 옮긴다. 이미 오갈 곳 없고 받아줄 곳 없이 누추한 마음이므로, 낙서 몇 줄 더 보탠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글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열심히 써야만 생계를 이을 수 있고 쓰라고 시키면 쓴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직이 원하는 글을 써야만 돈을 번다. 매일같이 쓰고 기계적으로 쓰는 와중에, 가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기도 한다. 그런 글들이 모이고 출판을 해주겠다는 귀인을 만나면 책이 된다. 이 행운만큼은 있어서 10권을 남겼다. 똥만 싸다 끝나는 인생은 아닌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든다. 여하간 글을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고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글을 쓰는 건 힘들면서도 행복한 일인데, 적어도 쓰는 동안은 딴생각에 아프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흐려지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사람은 살면서 왜 흔들리는가? 반드시 욕심 때문이다.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에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되고, 손해를 줄이려고 변명을 늘린다. 사람은 왜 또 놀라는가? 무조건 자기만은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무가 흔들리면 새들이 날아가듯이, 그 마음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주변사람들 다 떠나간다. 고기가 놀라면 물이 흐려지듯이, 생존하려는 자들의 세상에는 기댈 곳이 없고 있다 해도 도박판이다.
본디 중생들의 틈바구니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상이고, 이른바 정상적으로 살려면 가급적 탁해져야 한다. 그러나 흔들리는 마음은 끊임없이 머뭇거려서 끝내는 고여 썩는다. 놀란 마음은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 결국은 나조차 나를 멀리한다. 정신병은 내가 나임을, 나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살면 되는데, 자꾸 딴 데서 찾고 딴 놈을 좇다가, 진짜 내가 내리는 형벌이다.
공부하는 자들은 뚝심을 집으로 삼는다. 흔들리지 마라. 가지는 흔들려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아, 어떻게든 살게 되어있다. 놀라지 마라. 그래봐야 죽는다. 책에는 으레 이런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고통을 자청하는 일인 데다 거의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체력을 소진한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이지만, 누구의 방해와 처벌도 없이 자아를 온전히 밀고나가는 기쁨을 주는 것이 나의 비非직업적 글쓰기다. 적어도 삶의 의미를 찾는 동안에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 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 네 시간을 부리면서 산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는 것인가.”
삶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나도 시간을 따라서 흘러간다. 시간에겐 물기 하나 없는데도 강물처럼 느껴진다. 굳이 마음을 쓰거나 신경 써야 할 시간은 없다. 어차피 시간이 알아서 움직인다. 내가 굳이 손쓰지 않아도 시간이 대신 해결해주었다. 제아무리 사나운 고통이라도, 시간에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인생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 ‘누구나 죽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지만 결국엔 한정돼 있다. 그 와중에서 시간을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법신을 남기는 일이다. ‘자기가 좋아하면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고 어찌됐든 하는 것.’ 삶은 외로운 것이지만 혼자서만 걸을 수 있는 길이 기필코 하나는 존재한다. 밥 먹은 힘으로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한 힘으로 글을 쓴다. 이번 생은 이런 모습 정도로 마무리하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좋고 이 길이 답이 아니었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내가 걸었다.
늙어가는 자들은 인생이 부질없다고 투덜거린다.
자기가 실컷 살아놓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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