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메이지 유신과 폐불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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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승 / 2020 년 1 월 [통권 제8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898회 / 댓글0건본문
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도쿄대학. [사진=Gussisaurio, 위키피디아]
일본에서 근대불교학의 출발은 1877년 설립된 관립 도쿄대학東京大學에서 2년 뒤인 1879년 ‘불서강의’라는 이름으로 강좌가 개설된 것을 기점으로 잡는다. 곧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려는 메이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설립된 도쿄대학에서 불교에 대한 강의가 최초로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개설되어 진행된 불교에 대한 강의는 당시 일본 사회의 풍조 속에서는 특이하고 의아스런 느낌을 준 일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강의를 기점으로 일본의 불교학은 이전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학의 정립이 이루어지지만, 실제 근대의 출발로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불교강좌가 이루어지는 시점까지 불교계는 메이지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 속에 빈사瀕死의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의 빈사의 상태를 유지해온 불교계에 새로운 구원의 빛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교강좌 개설이 메이지 정부의 핵심 기관인 도쿄대학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면 왜 불교계는 근대의 출발과 함께 빈사의 경지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먼저 근대불교학의 성립배경으로서 메이지유신과 폐불훼석廢佛毁釋의 불교탄압을 살펴보기로 한다.
탄압과 환골탈태
1868년 근대의 출범으로서 닻을 올린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전사회적인 개혁을 도모한 혁명으로 출발하였다. 그렇지만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260여년에 걸친 권력의 체제를 전복시킨 메이지 유신은 정치의 중심에 천황天皇을 두고, 이 천황제를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천황중심의 정치체제에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의 종교정책을 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펼치고자 한 것이지만, 국가를 서양 제국과 같은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정책 실현이라는 입장에서는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곧 천황을 중심에 둔 신도국교화 정책으로 고대의 율령체제 속에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던 신기관神祇官 등을 부흥시켜 종교정책을 실시하지만, 실제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개조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는 변화된 시대의 조류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이 전개되는 속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불교계로서, 불교계의 입장에서 메이지유신은 가히 불교탄압의 폭풍우가 다가오는 형상에 놓였다고 말할 수 있다.
천황을 중심에 두는 신도국교화라는 새로운 종교적 질서 속에 불교는 가히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였다. 다시 말해 근대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국가의 비호 속에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계급 속에 몸담아왔던 불교가 근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에 반대적인 적폐세력으로 몰려 온갖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는 메이지유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인 메이지 초년 즉 1868년 3월에 발령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으로, 이로부터 전개된 폐불훼석, 즉 “부처를 폐하고 석가를 훼손하는 일”이 일본전역에서 자행된 것이다.
신불분리령이란 신사에 모신 신神과 사찰에 모신 불佛 즉 부처를 따로 떼어 놓는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신과 부처를 함께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부정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신과 부처는 동일한 공간에 함께 공존하였고, 같은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신불분리령의 공포로 인해 신과 부처는 별개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신도를 받드는 메이지 정부의 시책에 따라 부처나 부처를 받드는 불교계는 철저하게 정부의 정책에서 도외시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도외시 속에 불교계는 사찰 소유의 재산 수탈, 승려의 강제 환속, 종파나 사원의 강제 병합 등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은 일본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로, 근세기 국교의 지위에 있었던 불교의 상황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신불분리령에 의해 불교 배척의 직접적인 계기가 이루어지지만, 불교 탄압의 극단적인 풍조는 이전 에도江戶시대부터 형성된 불교에 대한 적대감이나 신도 계통 사람들의 원한, 근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국학자들에 의한 배불론 등의 영향 등이 서로 얽혀 근대초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 폐불훼석의 불교탄압은 메이지 원년 1868년부터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교부성이 설치되는 1872년까지 극단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두 개의 예를 들어보면, 메이지유신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츠마薩摩 지역에서는 당시 존재하였던 대소大小 사원 1,066개가 거의 폐사되고, 2,964인에 달하는 출가자들도 모두 환속 당했다고 한다. 또 도야먀번富山藩에서는 하나의 종파에 하나의 절만을 남겨두는 일종일사령一宗一寺令을 시행하여, 370여개의 절을 8개로 줄이는 극단적인 합사合寺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도야마번의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메이지 정부 차원에서 신불분리령이 불교를 탄압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포고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일본 전역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는 것이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현상으로, 불교계로서는 가히 빈사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계의 근저根底를 뒤흔든 이러한 폐불훼석의 조류는 메이지유신이라는 새로운 사회기조 속에 불교계를 환골탈태換骨奪胎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곧 불교계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은 불교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불교인을 확인하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근세 이래 국가의 지배계급으로서 위상을 가졌던 불교가 그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고 더 이상 불교계에 몸담는 것이 큰 이득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불교가를 확인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렇듯 근대초기에는 사찰이 국가의 행정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하던 근세기의 위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불교계를 담당하는 종교정책 부서 조차도 없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불교 무시의 정책과 풍조 속에 불교계는 자립적으로 여러 종단이 서로 결속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임을 확인하였고, 또한 각각의 종단 역시 새로운 사회적 흐름에 맞추어 종단의 제도나 의례 등을 개선하는 것이 절대 필요함을 직감하였다. 이렇게 개별 종단의 개혁이 요구되는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메이지 초기의 불교 억압을 회생의 길로 인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이다.
선각자들의 출현
시마지는 메이지유신의 또 다른 축인 죠수長州 지역의 정토진종 본원사파 소속의 스님으로 일찍이 종단 개혁에 몸담아 종문宗門을 일신시키고, 후일 불교계의 여러 종단이 합동으로 메이지정부의 종교정책에 대항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그는 종문의 개혁과 함께 종문의 동료들과 서양의 견문에도 일찍 눈을 돌려 불교가 국제화와 세계화에 눈을 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양의 시찰 중에 국가와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연구를 기울여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것은 후일 신도는 종교가 아니라는 신도비종교론으로 국가신도가 형성하는 원인遠因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시마지가 활약하던 당시 그가 주장한 정교분리론은 불교가 사회적 위상을 되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실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한 종교담당기관인 교부성敎部省이 설립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마지를 비롯한 열성적인 불교인들에 의해 불교도 차츰 회생의 기미를 보이게 되며, 이러한 회생이 새로운 부흥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도쿄대학의 불교강좌 개설이지만, 이 불교강좌 개설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메이지 초기의 신불분리령의 종교정책을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신도의 신관으로, 따라서 이것은 신도에 의한 불교 탄압의 형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도에 의한 불교탄압은 일본의 오래된 신불습합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구원舊怨의 감정 등이 근대초기에 이르러 발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도국교화 정책으로 메이지 초기 천황이 지배자로 등장하는 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서양의 과학문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그와 더불어 기독교의 전파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신도는 현실적인 종교시책의 대안이 되기는 어려웠다. 곧 일본 국내의 민족종교적인 틀을 가진 신도가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의 교리에 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세기 에도막부의 기독교 엄금의 정책 속에서는 불교가 그 교학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지만, 근대초기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서양의 기독교에 대한 교리적인 대항은 불교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보호가 사라지고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는 속에 불교인들은 단순히 불교의 우위를 주장할 수만은 없었다. 곧 서양의 문물로서 불교를 재해석하거나 기독교와 비교 분석하여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서양의 문물로서 불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사람이 최초로 세워진 관립 도쿄대학에서 불교강좌를 처음으로 담당하는 하라 탄잔原坦山이다.
일본 근대불교학의 시작으로서 ‘불서강의’가 1879년 이루어지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이 시기에 이르는 10여년의 세월은 불교계로서는 살얼음판을 걸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신도가 국교의 역할을 했다면 관립대학에서 신도학이 설립되었어도 무방했을 시기에 불교학의 강좌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근대초기 폐불훼석을 극복하고자 한 불교인들의 노력이 초석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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