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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백련암 좌선실을 해체복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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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0 년 1 월 [통권 제8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6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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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 스님  발행인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니 지난해 있었던 일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옵니다. 세월이 흐르며 해인사에도 흰개미 피해를 입는 사찰이 생겼지만 남의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큰스님을 위해 문턱이 없는 ‘실버룸’을 만들어 드린다고 남북으로 일곱 칸 한 줄이었던 백련암 좌선실에 동서로 일곱 칸을 덧대어 ㄱ자 집을 짓는데,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후 그 방을 빈 방으로 두고 큰스님을 모신양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런 세월에 산 밑에 있던 약수암 선방에 흰개미가 번식해 마침내 해체복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 실버룸을 빈 방으로 두었더니 여기저기 습기도 차고 곰팡이도 피었습니다. “전통 한식韓式 집은 사람이 살아야 집이 유지 된다.”는 산중 어른 스님들의 말씀에 따라 제가 그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는데, 하루는 기둥 속에서 어느 구멍으로 나오는지 모기보다 큰, 날개 달린 개미 같은 모양의 벌레가 몇 천 마리인지 모를 정도로 수없이 날아 나와 한 방을 가득 채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흰개미 피해라고 진단·확인됐습니다.

 

 밖으로 보면 멀쩡한데 속으로는 기둥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郡에 신고하고 기다리니 좌선실 전체가 흰개미 소굴이 되어가니 빨리 해체복원 하여야 한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결론은 났지만 문화재청의 흰개미 서식조사와 결과가 나오는데 2년여가 걸리고, 예산 신청을 했지만 순위에 밀렸습니다. 해인사 암자 보수는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에서 담당하는데 부서 예산이 넉넉지 못하다며 예산편성에 또 몇 년이 흘러갔습니다. “해인사 큰절에 팔만대장경판이 모셔져 있으니 거기까지 흰개미가 영향을 미치면 큰일입니다.”며 위협(?)을 주었지만 백련암 좌선실 해체복원의 건은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2018년 예산이 집행되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해체복원 하려고 대들보 밑의 공동을 열어보니 1941년 근하만룡槿河卍龍 스님의 상량문이 있고, 포산·도원·구산 스님 등의 발원문이 비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이 착공되어 그런지 이것저것 부딪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해인사 총무국장 소임을 보던 30년 전의 예산집행 방식이 아닌, 전연 달라진 시스템으로 예산 집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30년 전에는 당해 주지 스님들에게 ‘자본적 보조’라 하여 예산전액이 내려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행 설계도면에 의지해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당해 군청에서 해인사 주지 스님에게 자금이 전달되고, 해인사 주지 스님이 사업자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예산이 집행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공사가 이뤄지는 사찰이나 암자의 주지·책임자는 건축업자에게 “에헴”하는 기침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해인사 백련암

 

 

 제 불찰이었지만, ‘공사시행 설계도면 작성’도 치밀하게 주지가 관여하여야 했는데, 옛날처럼 주지의 관여가 자유롭게 허락되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재청이 허가한 설계도면에 따라 시공할 뿐”이라며 업자는 ‘주지의 요구사항’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썩은 기둥을 갈아 끼우는데 지붕 밑 도리, 창방 등의 나무는 건재하니 새 기둥은 윗부분 50cm를 자르고 튼튼한 옛 기둥 윗부분을 살려 시공하라’는 얼토당토 않는 방식으로 좌선실 해체복원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중이 사는 3칸 큰방을 5칸 큰방으로 늘리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2-3일 밖에 다녀오니 양끝 2칸만 문 양식이고 안쪽 3칸은 벽이 되도록 시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도 기가 차 “5칸마다 문을 만들어야지, 3칸을 벽으로 해놓으면 안에 20-30명 좌선하는 사람은 숨 막혀 죽겠네!”라고 목수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스님! 우리 잘못이 아니라 설계사무소에서 스님들 얘기 듣고 그렇게 설계했다고 합니다.”는 항의가 들어오니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설계를 변경해 문화재청에 올리면 우리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니 또 1-2개월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설계사무소에서 미리 “요즈음 문화재 공사는 설계도면을 제일 중요시 하니 설계도면을 면밀히 설펴주십시오.”라고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얘기 했으면 이렇게 일이 헝클어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 1년도 안 걸릴 일이 늘어져 2019년 하안거 결제철이 되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큰스님은 항상 “출가자가 검소하게 살아야지! 부처님 계시는 곳은 모르지만 출가자가 사는 곳은 단청하지 말고 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흰개미도 퇴치하여야겠고, 큰스님 떠나신지 20여 년이 지나니 집들이 우중충해 간결하게 단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인사 선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상좌와 조카들이 몇 명 찾아와 말을 전했습니다. 

 

 “스님! 선방 스님들의 부탁입니다. ‘옛날 백련암이 큰스님 말씀대로 단청도 하지 않고 자연히 퇴색된 집으로 있을 때는, 그래도 상좌 스님들이 큰스님 당부대로 검소하게 산다싶어 고마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백련암 올라가니 집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청을 입히고 있으니 수좌들 마음에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큰스님 상주하시던 좌선실도 해체보수 하고 있던데, 원택 스님에게 좌선실을 해체 보수해도 절대로 단청하지는 말아달라고 전해주면 좋겠다. 그래도 한 건물 정도에는 큰스님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선방 스님들이 말합니다.” 

 

큰절 수좌 스님들의 염려를 전해 듣고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큰절 수좌 스님들이 검소하게 살라고 하신 큰스님의 말씀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구나! 큰스님의 가르침을 더욱 받들며 조심스럽게 살아야겠다.”하는 생각에 좌선실은 단청하지 않고, 천연 나뭇결이 살아나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좌선실 불사를 무사히 마치고 큰스님 떠나신 후 25년 만에 백련암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청정한 마음으로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가 백련암에서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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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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