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사상]
붓다가 무아를 설한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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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3:31 / 조회1,430회 / 댓글0건본문
비교종교학자의 불교 이야기 5 |
부처님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사제 팔정도를 설하시고 나자 그중 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콘단냐는 깨달았도다. 콘단냐는 깨달았도다.” 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콘단냐는 이제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나머지 네 명을 깨우치기 위해 계속해서 무아無我(anātman)의 가르침을 설파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받들고 살아가는 ‘나’란 것은 사실상 없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 힌두교에서는 절대적인 실재 브라흐만[梵]과 영구 불멸의 아트만[我]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tat tvam asi)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이 아트만이 나의 ‘참 나’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이기적인 ‘지금의 나’라고 여겨, 이를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이런 ‘지금의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고 하는 무아를 가르친 것입니다.
왜 무아의 가르침인가?
부처님은 왜 무아를 가르쳤을까요? 대략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윤리적 요청’ 때문이고, 둘째는 ‘논리적 귀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요청이란 일상적인 ‘나’를 영구 불멸하는 ‘나’로 착각하는 것이 집착, 증오, 교만, 이기주의 등 모든 윤리적 문제의 근원이라 보고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개인적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불화나 심지어 전쟁까지도 이런 착각에서 오는 것이라 본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생각, ‘나’를 떠받들려고 애쓰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므로 이를 고치는 것이 윤리적 요청이었다는 것입니다. 『싸뮤다 니카야』라는 불경에 보면 부처님은 다섯 수도승들에게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누구나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을 가지고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그리하여 [지금의 나에 대해] 염증을 느껴야 거기서 물러설 수 있고, 물러서야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논리적 귀결로서의 무아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육체적 요소와 네 개의 심리적 내지 정신적 요소인 이른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일시적 가합假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에 의하면 영구불변의 실재로서의 독립적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수레라는 것은 바퀴, 판자, 심보, 밧줄 등으로 구성된 것에 붙여진 이름일 뿐, 수레 자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순간순간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란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극적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무아의 또 다른 논리적 바탕은 불교의 연기緣起(pratītya-samutpāda) 사상입니다. 연기란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예외 없이 다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영구불변의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는 성립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자아란 이렇게 실체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잡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으면 모든 사람, 모든 사물과 ‘하나’라는 것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사실 무아는 우리의 개인적 자아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의 모든 사물에도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함께 모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공통된 모습이라 합니다.
무아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접근
무아의 가르침은 세계 중요 종교들 밑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것을 ‘제자 됨의 값’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딱딱한 껍데기 ‘나’를 깨고 내 속에 숨어 있는 참 내가 움터 나오도록 한다는 종교적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자신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빌립보2:6,7). 예수님을 이렇게 비움의 견지에서 이해하려는 것을 ‘비움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또 우리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4:22~24)고도 했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죽음으로 새로운 나로 되살아 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입니다.
사실 예수님이나 바울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비우고 근원과 하나되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영혼이 자신을 생각하는 일을 그만둠으로써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했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만일 영혼이 하느님을 알려고 한다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장의 경우
노자老子님의 『도덕경』 제7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또 제16장에 보면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 봅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면 우리의 뿌리,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또 한 분의 도가 사상가 장자莊子는 우리가 우리의 옛 자신과 사별하는 ‘오상아吾喪我’와 함께, 자기 마음을 굶기는 심재心齋, 자기를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타
우리나라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인 ‘제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인 ‘얼나’로 변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유교도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 하여 나를 없애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Arnold Toynbee)도 종교의 핵심은 “개인과 단체에서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한 열쇠이지만 우리는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입장에 있는데, 우리가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게 되기까지는 인류의 존속이 항상 의심스러운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가면서
이렇게 볼 때 부처님의 무아사상은 약간씩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종교와 의식 있는 사상가들의 기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란 결국 껍데기 자기가 궁극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통해 해방과 자유를 맛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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