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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열반을 이루면 불변·절대의 궁극실재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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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3:34  /   조회1,38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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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붓다의 길을 걷는 구도자의 최종 목적지이다. 붓다의 육성 법문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는 니까야 경전은, 열반이야말로 구도의 궁극 목표라는 붓다의 말을 누누이 전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다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라다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 상윳따 니까야 『라다 상윳따』 「마라경」(S23:1)(주1)

 

열반의 초점 이동 - ‘삶의 열반’에서 ‘죽음의 열반’으로 

 

열반涅槃은 빨리어 닙바나(nibbāna), 산스끄리뜨어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말로서 모두 부정 접두사 nir가 붙은 √vā(불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언어적으로는 <(탐욕·분노·무지의 불을 불지 않아)(주2) ‘꺼져 감’ 혹은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주3) 그런데 대승불교나 선불교에 이르러서는 ‘열반’이라는 말보다 ‘깨달음[覺]’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목격된다. ‘궁극적 깨달음’(究竟覺)이 열반을 대신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다양한 원인이 작동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열반을 ‘죽음으로써 구현되는 완전한 깨달음’으로 간주하는 시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초기의 해석(남방 상좌부 교학)에서는 붓다의 깨달음 구현을 생전과 사후의 경우로 구분하고 각각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부른다. 붓다의 죽음을 ‘완벽한 열반’이라는 의미에서 반열반般涅槃(Parinibbāna)이라 기록하고 있는 니까야/아함 문헌은 이런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불지 않아 꺼진 상태’라는 언어적 의미에 대한 통념적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살아있는 정신·신체의 장애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난 열반이 최고의 경지’라는 인식이 초기 교학을 장악한 것이다. 

 

사진 1. 성을 넘어 출가하는 붓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사진: 서재영.

 

이런 교학과 인식은 열반을 ‘지금 여기의 삶’에서 누리는 구도의 목적으로 설한 붓다 가르침의 초점을 흐리거나 이동시켜 버리고 있다. <열반에 들었다>라는 말이 수행자의 죽음을 지칭하는 관용어가 되어 버린 것도 이 초점 이동의 부수 현상이다. 앞으로 누누이 확인하겠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의 정신·신체 현상에서 누리는 열반’, 즉 ‘죽음의 열반’이 아닌 ‘삶의 열반’(현법열반現法涅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니까야/아함 경전이나 초기 교학을 탐구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이다. 붓다의 길을 걷는 학인이라면, 니까야를 비롯한 모든 불교 언어를 ‘삶의 열반’과 연관시켜 탐구해야 한다. 깨달음이라 하든 견성이라 하든, 그것은 살아서 누리는 열반 경험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여야 한다. 

 

목적지로 이끄는 붓다의 안내 

 

<각 종교가 설하는 길들은 결국 같은 목적지로 이끈다>라는 종교 일치론적 신념은 사실이 아니라서 신빙성이 없는 명제다. 뿌리가 같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길과 목적지에 대해서는 그런 신념이 유효할 수 있지만, 불교·유교·도가의 길과 목적지까지 묶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적지와 그곳으로 안내하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 화해는 다른 지혜와 방식으로 이루어야 한다. 목적지와 길을 선택하게 한 조건들, 관점을 발생시킨 조건들을 사실대로 성찰하는 사유 능력의 향상과 그 노력이 궁극적 해법이라 생각한다. 

 

목적지가 다르면 길이 다르기에, 길을 고를 때는 무엇보다 우선 목적지를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 목적지를 잘못 알면 엉뚱한 길에 올라 헛수고한다. 목적지를 착각하고 길을 걸으면,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거나 엉뚱한 곳에 이른다. 그럴 때는 허무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의 특징과 풍경을 미리 세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데가 다른 목적지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곳에 가면 어떤 특징적 풍경이 기다리는지 정도의 기본 이해는 있어야 한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안내서가 소상하고 정확할수록 목적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 붓다는 자신이 직접 확인한 목적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최고의 길 안내자이다. 그런 분이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대해 <가보면 압니다. 묻지 마시고 그냥 열심히 걸어가세요. 내가 먼저 가보니 엄청난 곳입디다. 나 못 믿어요?>라고 했을까? 아니면, <열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면 무지한 중생은 부질없는 상상과 오해만 키웁니다. 그러니 최소한으로 간단히 말해 둡시다>라고 했을까? 둘 다 아니다. 열반에 대한 붓다의 설법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붓다와의 대화에 문제가 있다. 열반 자체에 대한 붓다의 언급들, 그리고 열반으로 이끄는 붓다의 설법을 ‘조건 인과적’(연기적)으로 음미하지 못한 결과이다. 결국에는 연기법의 의미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가 문제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짚어보겠다. 

 

같은 명칭의 서로 다른 두 목적지

 

흥미로운 것은, 불교 내부에서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대해 전혀 다른 시선이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열반·깨달음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하다>라는 관점이 그 하나이고, <붓다는 불변·절대의 실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따라서 열반·깨달음은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체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완전하다>라는 관점이 다른 하나이다. <열반은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의 상태이다>라고 보는 허무주의 시선이 아니라면, 두 관점은 모두 ‘지고한 행복 상태로서의 열반’, 즉 ‘경험으로서의 열반’(nibbāna as a state of experience)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열반을 경험 상태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경험 상태인 동시에 ‘존재 상태’(state of existence)라고 볼 것인가에 있다. 열반을 ‘존재 상태’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실재(reality)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영원한 실재’(everlasting reality),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절대적 실재’(absolute reality) 등으로 열반의 존재 상태를 지칭한다. <동일한 내용이 불변하는 존재 상태가 실재한다>라는 생각은, 언어 인간이 품게 된 언어적 환각이다. 세계와 우주 그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변화·관계의 특징적 양상이 일정 기간 그 양상의 유사 패턴을 유지하는 역동적 사태’일 뿐이다. 

 

사진 2.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 간다라(2~3세기), 독일 국립베를린아시아박물관. 사진: 서재영.

 

열반을 ‘존재 상태로 보는 시선’과 ‘단지 경험 상태로만 보는 시선, - 이 두 시선이 향하는 목적지는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르다. 그래서 어떤 시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목적지를 향하게 된다. 전자의 시선은 분명 붓다의 설법과 안 맞다. 그런데 붓다의 길을 이어가는 불교 내부에서, 교학이나 구도 현장 모두에서, 목적지를 보는 상충하는 시선이 혼재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같은 명칭으로써 전혀 다른 두 목적지를 가리키는 혼란이 불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 심각한 문제 상황이 교학이나 구도 현장에서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관용의 표현이 아니라 문제의식과 성찰의 미흡 및 부재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혼란이 지속되는 이유 두 가지만 짚어본다. 

 

첫 번째는,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는 ‘불변·절대의 궁극실재 관념’의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영향력이다. ‘불변·절대·전능의 궁극실재’는 인도 우파니샤드 전통뿐 아니라 동·서양 고금의 인간 사유를 지배해 온 보편적 열망이다.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향하는 시선은, <불변·절대·순수·만능·독자의 존재 공간을 차지하면 영원한 안락을 누릴 수 있다>라는 사유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사유는 인간이 발전시킨 언어능력에 수반하여 발생한 후유증이다. ‘변화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의 유사한 특징’을 하나의 기호에 담아 분류함으로써 문제해결력을 고도화시킨 것이 인간 특유의 언어능력이다. 인간은 언어에 담긴 ‘특징적 차이들의 역동적·관계적 사태’를 ‘불변의 동일한 존재 상태’ ‘독자적 존재 상태’로 간주한다. 그러나 불변의 동일한 존재나 독자적 존재는 세계와 우주 그 어디에도 없다. ‘언어의 속성에서 발생한 신기루’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신기루는 자신을 보호하는 종교와 철학, 통념의 성채에 둘러싸여 여전히 왕으로 군림한다.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불변·절대·전능의 궁극실재를 옹립하고 있는 전통 종교와 사상 속에서 사유의 토대를 형성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익혀 내면화된 ‘아트만·브라흐만 궁극실재’ 관념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불변·절대·전능의 아트만·브라흐만 궁극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궁극실재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이라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지식과 이론 수립 능력으로 교학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붓다 입멸 후, 붓다의 법설에 대한 최초기의 해석학인 아비달마 교학 이론에서부터 열반을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로 간주하는 관점들이 횡행한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불교 내부에 자리 잡은 이 ‘불변·절대의 궁극실재 선호 사유’가 열반에 대한 비불교적 관점을 옹호하고 변형시키면서 지속시켜 온 원인이다. 

 

두 번째는 <‘불변·절대의 궁극실재’를 설정하지 않고도 근원적인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라는 점이, 충분하게 혹은 적절히 이해되거나 해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한 길, 그 중도의 여정은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하는 현상들’을 초월하여 ‘불변의 동일성이 영속하는 실재나 세계’에 소속되는 길>이 아니다. 붓다의 길은 <‘변화·관계 속에서 인과적 응집성을 보여주는 현상들’과의 고리를 끊지 않은 채, ‘변화·관계로 인해 겪는 인간의 불안과 고통’을 원천에서부터 치유해 주는 길>이다. 필자는 이 길에서의 행보를, ‘넘실대는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파도타기 능력을 익혀 유희하는 것’에 즐겨 비유하곤 한다. 붓다의 길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것도 아니고, 동요하는 파도가 아예 없는 땅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붓다의 길에서 누리는 열반의 자유와 안락은, 파도타기의 유영遊泳에서 경험하는 ‘빠지지 않는 자유와 즐거움’에 대비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파도타기 기술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로움을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중도中道 학인들의 과제다.

 

<각주>

(주1) 각묵 번역, 『상윳따 니까야』 제3권(초기불전연구원, 2009), p.479.: “<세존이시여, 무엇을 위해 열반에 듭니까?> <라다여, 그 질문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라다여, 청정한 삶은 열반을 뿌리로 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는 삶이다.>”- 전재성 번역, 『쌍윳따 니까야』4(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0), p.477.

(주2)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소멸’ ‘행(行, saṅkhāra)의 소멸’은 열반 경험을 발생시키는 핵심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의 의미와 내용을 탐구한 만큼 열반의 문이 열린다. 이와 관련한 기존의 교학적 학문적 시선들은 그다지 견실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를 다룰 때 필자의 소견을 밝히겠다.

(주3) 열반이나 해탈解脫(mokṣa)이라는 용어는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서도 사용하던 말인데, 붓다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내용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이나교에서 해탈(mokṣa)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내용은 바라문교의 그것과도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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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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