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는 불상의 미학]
말법시대 불명참회와 53불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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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 2024 년 5 월 [통권 제133호] / / 작성일24-05-04 22:36 / 조회2,315회 / 댓글0건본문
지난 호에서 살펴본 윈강 11굴 태화 7년(483) 명문과 석경산 뇌음동의 참회의식은 당시 수행자가 말법시대를 대비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 때 조성된 윈강 11굴 95구 불상의 도상 의미는 과연 무엇이며 말법사상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또한 양현지楊衒之(6세기 중엽 활동)의 『낙양가람기』는 효문제가 핑청(평성)에서 뤄양(낙양)으로 천도한 494년부터 동·서위로 분열된 534년까지 뤄양의 불교사원에 관한 기록이다. 뤄양의 사원 수는 서진 영가년간(307∼313)에 42개소에서 북위 천도 이후 1367개소에 이른다. 룽먼석굴도 이 시기에 개착하였다. 그렇다면 효문제의 불교정책과 후원은 스스로 말법시대를 인지하고 불사에 치중했던 것일까?
남악혜사(514∼577)가 추정한 정법, 상법, 말법의 삼시三時 구분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대집경』 「월장분」과 차이가 있다. 나련제려야사(Narendrayasas, 6세기 생존)가 566년 한역漢譯한 「월장분」의 정법, 상법, 말법의 삼시 구분은, 석존 입멸 후 불법에 매진하여 해탈에 이르는 500년, 선정 삼매에 집중하는 500년, 학문과 염불에 매진하는 500년, 탑파와 사원건립에 치중하는 500년, 수행자들이 논쟁을 일삼고 불법을 소홀히 하여 정법이 사라지고 파계승이 난립하는 마지막 500년이다.
따라서 「월장분」에 의하면 효문제의 불사는 상법시대의 조탑 사원에 치중했던 5세기 말 사회적 현상이고, 그로부터 100년 후 수(581∼618) 승려 정완(?∼639)의 석경사업은 말법시대에 이르러 불법이 은몰할 것을 대비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대주성굴과 참회의식
그렇다면 6세기 승려 신행(540∼594)의 삼계교와 동시대 다른 승려는 말법을 어떻게 인지하고 수행하였을까? 수행자의 말법시대 인식은 폐불법난이다. 북주(557∼581) 무제는 건덕년간(572∼578)에 폐불을 단행하였다. 그 여파로 승려, 불상, 불탑, 사원 등이 파괴되었으며 또한 6세기 말은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던 시기이므로 현실적으로 말법시기와 다를 바 없었다.
하남성 안양시 영천사靈泉寺 대주성굴大住聖窟을 조성한 영유靈裕(518∼605)의 행적을 보자(사진 1). 보산寶山 남쪽 산등성이에 위치한 대주성굴은, 1960년대부터 선진 연구자들이 관심 있게 살펴본 말법시대의 석굴이다. 『속고승전』의 「영유전」을 보면, 그는 보산에 석감을 만들고 벽면마다 법멸의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석굴 조성 연대는 외벽 가비라신왕迦毘羅神王 상단 명문에서 수(581∼618) 개황 9년(589)에 개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석굴 입구는 남향이며 깊이 3.4m, 폭 3.43m, 높이 2.6m 크기이다.
석굴 내부를 보자. 정벽 삼존불감의 본존불은 노사나불(사진 2), 좌벽 삼존불감의 본존불이 미륵불, 우벽 삼존불감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이다.(주1) 석굴 내벽을 가득 채운 각 불감의 좌우 경계선에 7불이 표현되어 35불에 이르고 명칭을 새겼다. 석굴 내벽 입구 우측에는 세존의 열반 이후 불법을 전승한 24명의 전법조사상이 각각 그 명칭과 함께 부조되었다(사진 3). 24명의 조사상은 6단으로 나눠져 매 층 두 쌍의 조사가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다. 또한 석굴 입구 내벽 좌측에 『대집경』 「월장분」과 『마하마야경』이 예서로 서각되어 있다. 석굴 외벽 상단에는 25불과 하단에 53불, 35불 그리고 시방제불의 명칭과 참회문 석경이 서각되어 있다(사진 4).
이와 같이 6세기에 조성된 대주성굴의 내벽을 삼존불 불감으로 일실장엄一室莊嚴하고, 외벽을 불명佛名 석경으로 장엄한 이유는 분명하다. 즉 대주성굴은 말법시대에 이르러 불명참회佛名懺悔와 관불참회觀佛懺悔의 용도로 사용했고, 이는 7세기에 조성된 석경산 뇌음동의 석경장엄과 같은 용도이다. 영유의 불명참회와 관불참회는 신행(540∼594)의 육시예참 참회의식을 따른다(『고경』 제132호 참조). 관불참회는 지면상 다음을 기약한다.
53불명과 우리나라 53불신앙
다음은 대주성굴 53불신앙을 언급한 『불설관약왕약상이보살경(T1161/ 660c)』을 보면 과거 53불명은 아래와 같다.
보광普光·보명普明·보정普靜·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栴檀香·전단광栴檀光·마니당摩尼幢·환희장마니보적歡喜藏摩尼寶積·일체세간락견상대정진一切世間樂見上大精進·마니당등광摩尼幢燈光·혜거조慧炬照·해덕광명海德光明·금강뇌강보산금광金剛牢强普散金光·대강정진용맹大强精進勇猛·대비광大悲光·자력왕慈力王·자장慈藏·전단굴장엄승栴檀窟莊嚴勝·현선수賢善首·선의善意·광장엄왕廣莊嚴王·금화광金花光·보개조공자재왕寶蓋照空自在王·허공보화광虛空寶花光·유리장엄왕琉璃莊嚴王·보현색신광普現色身光·부동지광不動智光·항복제마왕降伏諸魔王·재광명才光明·지혜승智慧勝·미륵선광彌勒仙光·세정광世靜光·선적월음묘존지왕善寂月音妙尊智王·용종상지존왕龍種上智尊王·일월광日月光·일월주광日月珠光·혜당승왕慧幢勝王·사자후자재력왕師子吼自在力王·묘음승妙音勝·상광당常光幢·관세등觀世燈·혜위등왕慧威燈王·법승왕法勝王·수미광須彌光·수만나화광須曼那花光·우담발라화수승왕優曇鉢羅花殊勝王·대혜력왕大慧力王·아촉비환희광阿閦毘歡喜光·무량음성왕無量音聲王·재광才光·금해광金海光·산해혜자재통왕山海慧自在通王·대통광大通光·일체법상만왕一切法常滿王 부처님이시다.(주2)
세존이 멸도하신 후 정법이 없어질 때 수행자들이 약왕과 약상 두보살의 이름을 듣고 죄업을 없애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중략)
약상보살이 과거 53명의 부처님 이름을 설하자, 과거칠불 중 비바시불이 찬탄하며, 만약 어떤 이라도 이들 53불 이름을 듣는다면 장차 백천만억 아승지겁 동안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53불을 칭송한다면 장차 태어나는 곳마다 시방세계의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지극히 53불을 공경하며 예배한다면, 사중죄와 오역죄, 방등(대승의 가르침)을 비방한 죄업이 제거되고 청정하게 될 것이다. [사중죄는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음탕함(사음邪淫), 망어妄語를 말한다. 오역죄는 소승과 대승이 차이가 있으며 대승오역죄는 1. 탑, 불경, 불상을 훼손한다. 2. 삼승인(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비난한다. 3. 출가자의 수행을 방해한다. 4. 소승 오역 중 한 가지라도 행한다. 5. 업보를 부정하고 십불선十不善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시기여래·비사부여래·구류손여래·구나함모니여래·가섭여래가 이들 53명의 부처님 이름을 다시 찬탄하며, 이들 53불의 이름을 듣거나 그 이름을 칭송하거나 공경하여 예배하는 자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모든 죄장罪障들을 제거하여 없앨 것이라고 하였다.(주3)
다음은 우리나라 53불신앙을 살펴보자.
진평왕(재위 579∼632) 때 활동한 비구니 지혜가 꿈속에서 선도 성모를 만나고 안흥사 불당에 53불의 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주4)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53불신앙이다.
통일신라시대 53불신앙은 진성여왕(재위 887∼897) 9년(895) 기년이 있는 「백성산사길상탑중납법침기百城山寺吉祥塔中納法賝記」·탑지塔誌에서 53불명이 언급되었다. 「해인사묘길상탑기」와 함께 복장된 탑지 4매 중 하나이다. 당시 통일신라가 궁예(?∼918)와 견훤(?∼936)과 대치한 전투에서 전란에서 사망한 승속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 부근에 해인사묘길상탑을 세우고 탑지 4매를 묘길상탑에 안치하였다.
고려시대 53불신앙은 금강산 장안사 정전과 선실禪室에 각각 53불이 봉안되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이곡李穀(1298∼1351)의 『가정집稼亭集』 「금강산 장안사 중흥비」에서 찾을 수 있다. 금강산의 53불신앙은 유점사 능인보전에 봉안되었던 53불상(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서 확인된다(사진 5). 다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몇 분은 현재까지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다.
조선시대 53불신앙은 창녕 관룡사에서 볼 수 있다.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이지만 약사전은 조선 전기 건축물로 추정된다. 약사전 53불(사진 6) 벽화들을 살펴보면 창방 위의 가로로 긴 벽면에 불당 4면을 돌며 약 48불 좌상이 정연히 그려져 있다. 모두 원형 두광과 신광이 있고 연화좌에 앉아 있다. 광배 옆에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보개조공자재왕寶蓋照空自在王 등 몇 분은 불명만 존재한다.
안동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됐으나, 대웅전은 1696년 중수되었고 그 내벽에 과거칠불과 53불도가 있다. 53불은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 한 칸에 세 분씩 배치하였다. 그 외 조선 후기 53불도는 순천 선암사 불조전 53불도(1702년)와 송광사 불조전 53불도(1725년)가 있다. 송광사 53불도(사진 7)는 중앙의 7불 탱화를 중심으로 좌우를 6폭으로 나누어 그린 형식이며 화면에 각 여래명을 기입하였다. 또한 송광사는 불화와 석조 53불좌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어 조선시대 53불도상의 좋은 연구자료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나라의 53불신앙 연구는 천불신앙과 함께 대승불교의 다불사상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7세기 신라시대부터 점찰법회와 함께 나타난 53불신앙은 당시 수행자들이 말법시대를 인지하고 그에 따른 참회의식을 위한 53불도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53불도상은 과거 7불, 35불과 함께 수행자의 불명참회와 관불참회를 위한 도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53불도상은 고려시대 금강산 지역과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고 본다.
<각주>
(주1) 좌우 방향은 시자 관점이다.
(주2) T1161/663c8∼29.
(주3) T1161/664a1∼16.
(주4) 『삼국유사』 「감통」편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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