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화엄경』의 정수 법성게와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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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26회 / 댓글0건본문
서재영 |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교수
해동화엄의 초조로 추앙받는 의상 스님이 지은 법성게는 화엄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다!”로 시작하는 법성게는 법성法性, 즉 존재의 성품에 대한 실상을 밝히는 것인데, 첫 구절부터 중도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법성게는 일반적 게송처럼 텍스트로 서술된 문장이 아니라 「화엄일승법계도」라는 일종의 기하학적 그림으로 되어 있다. 의상 스님은 방대한 화엄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로 요약하여 정사각형의 그림 속에 새겨 넣었다. 사각인四角印으로 불리는 그림을 ‘일승법계도’라 부르고, 그 속에 새겨진 게송부분을 법성게라고 부른다. 210자로 작성된 법성게는 사각인 한 가운데에 배치된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54번 직각으로 꺾어지는 전개를 거쳐 다시 법法자로 돌아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형식적 틀 속에도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가마솥의 국 맛을 아는 법
예로부터 법성게는 화엄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일승의 요긴함과 중요함을 포괄했으니 천년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했으며, 성철 스님 역시 『백일법문』에서 “화엄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잘 표현한 골수”라고 했다. 그런데 『화엄경』은 80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에 속하고, 화엄학 역시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광대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방대한 화엄경과 화엄학이 담고 있는 광대한 사유의 세계를 어떻게 210자의 짧은 게송 속에 담아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일연 스님은 “솥의 국 맛을 아는 데는 고기 한 점이면 충분하다.” 하고 평했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이 어떤 맛인지 알기 위해 가마솥의 국을 다 먹어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점의 고기만 먹어봐도 그것이 소고기국인지 동태탕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엄사상이 방대하다고 80화엄을 다 읽고, 수많은 논소를 탐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10자로 압축된 법성게만 잘 이해해도 화엄사상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극찬이다.
의상 스님은 당나라로 건너가 지엄 스님 문하에서 법장 스님과 함께 화엄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하지만 의상 스님은 법성게가 담긴 일승법계도 외에는 어떤 책이나 글도 짓지 않았다. 이는 일승법계도를 통해 자신이 공부하고 깨달은 모든 내용을 담아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생일대의 공부를 모두 쏟아 넣은 유일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의상 스님은 ‘법계도기’의 발문에서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라고 했다.
화엄은 법계연기를 핵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조건(緣)을 따라 성립한다는 ‘수연성隨緣成’을 강조하며 개체적 실체를 부정한다. 의상 스님은 법성게를 통해 강조한 존재의 관계성, 개체의 무자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일생일대에 걸친 공부를 집약한 글을 짓고도 자신의 이름을 뺄 수 있다는 것은 법성게에서 다룬 수연성의 원리가 단지 구호가 아니라 철저하게 체화된 진리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법계도를 지은 연도에 대해서는 ‘총장 원년 7월 15일’이라고 정확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스승 지엄 스님이 입적하기 약 3달 전이다.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연도는 정확히 밝히는 이유에 대해 의상 스님은 “일체 모든 법은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려는 까닭”이라고 했다. 법성게를 짓게 한 연이란 자신이 유학하는 도량의 화엄학이었을 것이며, 자신을 지도해 준 스승 지엄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화엄의 지적 전통 속에서 복합적인 영향을 두루 수용하여 완성된 수연성의 결과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화엄종의 중도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에 맨 마지막 단계에 법성게의 중도사상을 설명한다. 화엄종의 중도사상에 대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성게라고 강조하는 대목이다. 성철 스님은 법성게의 핵심은 중도사상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화엄사상의 정수가 곧 중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법성게는 존재의 실상 즉 법성을 규명하는 것인데, 법성의 실체가 곧 중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성게는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수 있고,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라고 시작한다. ‘법의 성품은 원융무애하여 두 모습이 없다[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가 법성게의 제일성이다.
법성게의 핵심 주제는 법성을 밝히는 것인데 그 법성이란 두 모양[이상 二相]이 없는 중도라는 것이다. 즉 유와 무, 옳고 그름, 선과 악, 남과 여 같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극단을 떠난 것이 법성이라는 것이다. ‘두 모양 없음[무이상無二相]’이란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변을 모두 부정하는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법성, 즉 존재의 실상은 유와 무,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중생과 부처, 남과 여라는 차별적인 양변을 벗어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양변에 매달려 대립하고 갈등하면 중생이고, 양변을 떠나 본래 고요함을 실현하면 부처님의 경계라는 것이다.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변을 벗어나 있는 것이 법성이고, 존재의 실상이므로 일체 만법은 동요 없이 본래 고요하다[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성철 스님은 ‘두 모습 없다’는 내용을 ‘본래 스스로 공하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따라서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천변만화하며 요동치는 것 같지만 존재의 실상인 법성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언제나 고요하고 적멸하다.
이렇게 양변을 모두 벗어나 본래 고요한 법성은 어떤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어떠한 모양으로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에 일체가 끊어진 상태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로 표현된다. 화엄학에는 현란한 언어적 수사가 동원되고 광대한 사유가 등장한다. 그러나 변재천녀와 같은 음성으로도 법성을 표현할 수 없기에 법성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마음으로 헤아려 볼 수도 없기에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말도 끊어지고, 마음의 작용마저 끊어졌다면 어떻게 법성을 알 수 있을까? 의상 스님은 오로지 깨친 지혜로서만 알 수 있을 뿐 다른 경계로는 알 수 없다[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고 했다.
법성은 깨달음을 증득한 지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다른 경지에서는 볼 수 없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말하는 증지란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깨달음, 최후의 깨달음인 정등각正等覺이 증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법성의 세계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며 성문·연각·십지·법운지의 대보살조차도 알 수 없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여 장대비처럼 설법을 쏟아 부을지라도 구경각을 얻은 증지가 아니면 법성의 원융한 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곡해하면 중생은 법성을 알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법성을 꿰뚫어보는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뜻이므로 오히려 중생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가르침이다.
중도의 자리에 앉아야 부처님
법성게의 핵심은 결국 ‘두 모습 없음[무이상無二相]’으로 요약되고, 이는 대립적인 양변을 모두 부정하는 쌍차雙遮로 설명되었다. 핵심이 중도이므로 중도의 체득을 강조하는 것으로 법성게는 끝을 맺고 있다.
원융한 법성을 보는 증지를 성취하면 다라니의 무한한 보배들로써[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온 법계가 보배 궁전처럼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실보전이란 어떤 실체적 공간이 아니라 실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증지를 성취하면 시방세계, 진진찰찰, 일체불찰이 그대로 보배 궁전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고해苦海로 보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그대로 보배궁전이며, 하찮은 먼지 하나 조차 거룩한 보배궁전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의 눈이 열려 삼라만상이 보배궁전임을 보려면 궁극적 자리인 중도상에 올라앉아야 한다[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삼라만상이 그대로 보배로 장엄된 궁전임을 볼 수 있는 경지가 될 때 비로소 중도를 증득한 것이다. 이 경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확고부동한 경계이므로 부처님이라고 부른다[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는 것이다.
중도를 완전히 성취하여 중도상에 앉은 사람이 곧 부처라는 것이 법성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론이다. 성철 스님은 법성게는 ‘화엄종의 엑기스’이자 ‘화엄종의 근본 골조를 총망라해서 만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말은 화엄의 핵심을 담고 있는 법성게의 결론은 중도를 깨달아야 존재의 실상을 알 수 있으며, 중도를 깨달은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철 스님은 “중도中道는 근본적으로 화엄종의 골수이고, 동시에 불법 전체가 중도를 중심으로 삼아 모든 체계를 수립하고 모든 교리를 조직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은 궁극적 경지인 중도를 깨달아 중도상에 앉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은 간화종장看話宗匠답게 “중도를 알려면 결국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 짓는다. 화엄학은 불교철학의 심오한 사상체계이지만 그것은 결국 중도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수행에 몰두해야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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