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바다는 분별심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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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19 년 4 월 [통권 제7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56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문학평론가
조선 중기 서산대사의 제자로 자비덕화가 출중했던 청매인오(1548~1623)는 임진왜란 때 의승장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선사는 변산 월명암, 지리산 연곡사, 실상사, 영원사 등에서 수행 정진했으며, 도솔암을 세우고 ‘청매문파’를 열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선사는 광해군의 명으로 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선수부유 등 5대 조사의 영정을 직접 그려서 봉안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연곡사에서 말년을 보낸 선사는 76세로 원적에 들었으며, 양무제와 달마의 문답으로부터 육조혜능에 이르는 공안법문을 노래한 『청매집』에는 선정지혜와 자비실천의 시심이 잘 투영되어 있다. 청매는 천하제일 길지인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치열하게 참선수행 정진에 힘쓰던 시절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땔나무 해오고 물 길어 오는 일 외엔 하는 일 없네 반시운수야정용 般柴運水野情慵
참 나를 찾아 현묘한 도리 참구에 힘쓸 뿐. 참구현관성자공參究玄關性自空
날마다 변함없이 소나무 아래 앉았노라면 일취만년송하좌日就萬年松下坐
동녘 하늘 아침 해가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네. 도동천일괘서봉到東天日掛西峯
진정한 수행자는 머무름이 없는 진리에 머문다. 최상의 길지라도 그 자리만 탐내고 그냥 머문다면 끝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 물 긷고 나무 하되 지음에 지음 없으면 한가하고, 함이 없되 하지 않음도 없는 수행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선사의 이러한 수행은 날마다 변함없이 아침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소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는 언급에서 잘 표출되고 있다. 집착 없는 무심의 무주대無住臺 수행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이 산 속의 빼어난 풍광은 산간승개다 山間勝槩多
세속의 즐거움보다 앞서네. 준의인간락 准擬人間樂
솔바람은 비파소리 같고 송풍금슬성松風琴瑟聲
단풍 숲은 기막힌 비단색이네. 풍림기라색楓林綺羅色
홀로 앉아 보고 듣는 것으로 족하니 독좌족견문獨坐足見聞
얻고 잃는 것 관심 없네. 불요지득실不要知得失
누군가 날 찾아와 적막함을 위로하면 인래위적요人來慰寂寥
그의 소심함에 웃음나리라. 아소거착착我笑渠齪齪
청매의 자연교감의 서정이 잘 그려지고 있다. 산 속의 빼어난 풍광이 세속의 즐거움 못지않게 아주 다양하고 넉넉함을 읊고 있다. 솔바람 소리가 ‘우우’내는 비파소리와 같고, 가을 단풍 숲은 기막힌 비단색 같아, 이 경물을 홀로 앉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넉넉한 살림이라 생각하는 선사이다.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자족의 산중생활에 누군가가 찾아와 적막감을 달래주고 위로해 준다면, 선사는 그 사람의 속 작음에 웃음이 날 것 같다고 표현한다. 탈속 무애한 방외지미方外之味의 선지가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승찬의 법[심인心印]을 이어받은 도신은 기주 황매현의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 동자를 만났다. 나이는 일곱 살 정도였고 말하는 것이 특이하였다. 도신이 묻기를, “네 성姓이 무엇이냐?” 동자가 답하기를, “성은 있으나 예사로운 성이 아닙니다.” 도신은 “그게 무슨 성이냐?”라고 물었다. 동자가 대답하기를, “불성佛性입니다.” 도신은 “너는 성이 없단 말이냐?”라고 묻자 동자가 “그 성은 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도신문성道信問姓’이다. 이에 기반 한 『선문염송』 본칙 109칙에 대해 청매선사는 이렇게 읊고 있다.
동일한 성품이기에 법에 취함이 없고 동일성고법무취同一性故法無取
모습이 다르지 않기에 버릴 법이 없네. 절리상고법무사絶異相故法無舍
힘을 다해 소리 높여 불러도 응함이 없나니 진력고성환불응盡力高聲喚不應
북두의 별을 보려거든 남쪽하늘에서 보아라. 요간북두남천하要看北斗南天下
비록 나이 어리지만 보리심을 냈으니, 그를 어찌 어린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후일 5조 홍인이 된 어린아이는 세간법과 세간 부모의 인연이 공한 줄 알고 불성의 바다에 든 지도 모른다. 본성과 현상의 양변을 모두 끊어버린 자리이기에 취하고 버릴 것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각각의 다른 모습이 끊어졌는데 다시 버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동일성’이 곧 ‘절이상絶異相’인 것이다. 이 도리가 곧 ‘성性이 공空’인 이유이다. 중생의 집착이 있으므로 깨달음의 법을 설하고 세간 인연의 탐착이 있으므로 불성을 말한다. 힘을 다해 소리 높여 불러도 응함이 없는데 왜 갑자기 청매선사는 북두성을 남쪽에서 보아라고 하는가? 북두성은 북쪽하늘에 있어 남쪽하늘에서는 당연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깨달은 이에게는 북쪽도 남쪽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분별심에 의한 관념상의 방위개념 일뿐이다.
운문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꽃이 난간을 둘렀다.” 스님이 말했다. “곧 이렇게 갈 때 어떠합니까?” 선사가 말했다. “금털 사자[금모金毛]다.” 청정법신이 눈에 보이는 사법의 진실임을 난간 두른 꽃으로 대답했지만, 사법의 모습에는 모습이 없되 모습이 없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법의 모습은 그것에 그것이 없고 그것 없음도 없어 오직 살아 움직이는 행으로 주어짐을 ‘금털사자’라고 다시 말한 것이다. ‘청정법신’을 답한 운문의 법어에 기반하여 청매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산색과 시냇물소리 얼굴과 눈에 섞이고 산색계성면목휘山色溪聲面目渾
금털사자는 푸른 구름에 들어가며 금모사자입청운金毛獅子入靑雲
옥 같은 꽃에 해는 길어 호걸은 많은데 옥화장일다호걸玉華長日多豪傑
취해 붉은 난간 넘어뜨리니 벌써 밤이 되었네. 취도홍란도야분醉倒紅欄到夜分
소동파는 산색과 시냇물 소리 등 모든 소리가 법문이 아닌 것이 없고, 그대로가 청정법신이라 했다. 여기에서 푸른 산색과 시냇물 소리가 얼굴과 눈에 비쳐 하나로 되는 모습, 이는 곧 청정법신의 화현이다. ‘금털사자’는 뒤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내달리는 맹수의 왕이다. 그래서 가고 옴을 취하지 않고 머묾도 취하지 않는 행을 ‘금털사자’로 말했다. 그러나 그 머묾이 없는 행이 그대로 고요한 법신이 됨으로 청매선사는 ‘금털사자’가 구름에 들어간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이처럼 법신을 알고 ‘금털사자’를 알면 죽은 불의 차가운 재가 환히 빛날 것이다. 선사들의 비유와 상징은 상식을 초월하는 방편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탁월한 시적 상상력의 원천은 관념의 틀을 벗어난 걸림 없는 선적 사유에 있다. ‘불성’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 중생들은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 이에 대해 청매는 다음의 시 「외멱外覓」에서 범부가 한 마음을 돌리면 지금 여기에서 각자의 본심에 갖추어진 불성을 각성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가난하고 부유하며 귀하고 천함을 빈부여귀천貧富與貴賤
앞 세상 지은 것이라 말하지 말라. 막언전세작莫言前世作
순임금은 역산에서 밭을 갈았고 순유역산경舜有歷山耕
부열은 부암에서 집을 지었다. 설내축전암說乃築傳巖
왕후와 장군 재상이 왕후여장장王侯與將相
본래 없는 종족이니, 본래무종족本來無種族
범부가 만약 마음을 돌리면 범인약회심凡人若回心
현세에 성불하리라. 현세즉성불現世卽成佛
빈부귀천을 전생에 지은 것이라 말하지 말라는 선사이다. 몰록 깨치는 돈오의 법을 왕후장상이 본래 정해져 있는 종족이 아님을 말하고, 그 예로 순임금과 부열을 들고 있다. 법은 오래 닦아 공덕을 쌓아 기나긴 세월 동안 얻는 법이 아니라 마음 밖에 얻을 것이 없음을 단박 깨치면 이 자리가 법성의 자리이고, 이 한 생각이 공덕의 보장고가 된다는 것이다. 닦음과 닦을 것 없음을 논하는 것이 마음을 스스로 비추어 살핌만 같지 않으며, 또한 밖으로 구하는 자는 자성을 얻을 수 없음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한 바다에 많은 물고기들 노니는데 일해중어유一海衆魚游
물고기들 저마다 한 큰 바다 가지고 있네. 각유일대해各有一大海
바다는 분별심이 없으니 해무분별심海無分別心
모든 부처의 법 이와 같을 뿐이네.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
청매의 개체적 존재로서 중생을 바라보는 선적 직관이 분명하다. 바다 속의 물고기가 크고 작고, 생긴 것이 다를지라도 저마다 존엄한 존재로서 하나의 바다를 차지한다. 이 점에서 물고기는 평등하다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이는 의상대사 「법성게」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세계이기도 하다. 한 바다에 많은 고기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하나 가운데 여럿이 있음[一中多]을 비유한 것이고, 물고기들 저마다 한 큰 바다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多中一]를 언급한 것이다.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물고기들은 바다 안에 있는 각각 개체들이지만,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면 물고기들에게는 한 바다는 각각의 바다가 된다. 이때 물고기는 전체가 되고 각각의 바다는 또 각각의 개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물고기를 품고 있다는 생각도, 물고기는 내 바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념의 경지는 사량 분별로 헤아려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경지이다. 분별심이 없는 그 자리가 청매가 말하는 ‘일심一心’, 진여의 세계이다.
청매는 임진왜란 때 의승장으로 출전하여 3년간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전쟁에 대한 반성과 고통 받는 민초들에 대하여 무한한 연민과 자비심을 보이고 있는 많은 시에서 잘 묘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애민사상은 다음에서 잘 표출되고 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아녀자가 봉환일부녀蓬鬟一婦女
머리를 들고 푸른 하늘 향해 곡하네. 봉두곡창천捧頭哭蒼天
남편이 어디서 죽은지를 모르고 부서무사소夫壻無死所
한 자식은 세 번을 배에 오르네. 일자삼상선一子三上船
돼지와 닭은 한 마리도 없고 저계무일개猪鷄無一介
마을 사람들 함께 문 앞에 서 있네. 이서입문전里胥立門前
나락의 고통 어떻게 말할 수 없어 휴언나락고休言奈落苦
나도 모르게 두 줄기 눈물 흘렸네. 불각쌍루현不覺雙淚懸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실상과 고통의 현실을 함께 마음 아파하고 있는 선사이다. 선당에 앉아 참선 수행에만 몰두 하지 않고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는 중생이 아프니까 부처도 아프다는 동체대비의 생명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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