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책의 향기]
선은 정말 문자를 벗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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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우(조병활) / 2019 년 2 월 [통권 제7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93회 / 댓글0건본문
화중우火中牛 | 불교학자·자유기고가
선禪은 문자(문자로 된 경전)를 중요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선학사상禪學思想의 발전사發展史는 문자화文子化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초기 시기의 선수행자들은 ‘표면적으로는’ 문자와 경전을 멀리했다.
달마는 「이입사행론」에서 강조했다. “모든 중생, 즉 범부와 성인은 본성이 같다는 것을 깊이 믿어라. 다만 밖에서 날아온 먼지에 덮여 드러날 수 없을 뿐이다. 만약 잘못된 것을 버리고 진실한 것으로 돌아가 정신을 집중해 한 곳을 본다면, 자기와 타인 그리고 범부와 성인이 평등함을 알리라. (이 태도를) 견지해 움직이지 말고, 특히 언어의 가르침에 따라가지 말라.”(주1)
문자를 멀리한 경향은 혜가(487-593), 승찬(?-606), 도신(580-651), 홍인(594-674), 혜능(638-713)으로 이어졌다. 혜가는 『능가사자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학인이 문자와 말에 의지해 진리를 찾는 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행동이다. 어둠을 깨트릴 수 없다.”(주2) 당연히 승찬도 이를 계승했다. 그래서 승찬은 “마음을 비우고 조용하게 앉아 좌선할 뿐 글자를 만들어 뱉지 않았다.”(주3)
이원섭 선생이 지은 <선시-깨달음의 노래>와 <깨침의 미학>
도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드시 문자와 말을 끊어라.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홀로 깨끗한 곳에서 스스로 도과道果를 증득하라.”(주4) 홍인 또한 이러한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홍인 대사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한 곳에 앉아 좌선할 뿐 글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입으로 현묘한 이치를 말해 조용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었다.”(주5) 혜능은 “나는 일생동안 문자를 알지 못했다.”(주6)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혜가의 손자 제자인 법충法沖 마저 “의미라는 것은 진리다. 말로 한 것이 이미 진리와 멀리 떨어진 것인데, 하물며 종이 위에 펼쳐 놓은 문자는 진리로부터 떨어진 것 중의 떨어진 것이다.”(주7)라며 문자를 꺼려했다.
문자를 멀리한 태도는 마조(709-788)를 거쳐 백장(749-814)에게까지 이어졌다. 백장은 “12 베다를 다 외울지라도, 그것은 그저 증상만增上慢이라는 오만을 보태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불교를 비방하는 행위이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을 읽고 교리를 연마하는 것은 세속인의 기준에서 보면 좋은 일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이것(문자)은 다만 막히게 할 뿐이다.”(주8)라고 말했다. 마조의 제자 대주혜해는 “경전은 문자와 종이와 먹이다. 본질상 공한 그것들이 무슨 영험이 있단 말인가? 영험이라는 것은, 경전을 지니는 사람이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기에 신통하게 감응하는 것이다. 시험 삼아 1권의 경전을 책상위에 놓아보아라. 그 경전을 누가 지니지 않아도 경전 스스로 영험이 있는가 보라!”(주9)라며, 사람의 마음에 따라 영험이 있고 없고가 결정되지, 문자로 기록된 경전 자체는 영험이 없다고 확실히 말했다.
이런 전통에 획기적인 변곡점變曲點을 찍은 사람은 『금강경』 연구에 매진하다 선으로 전향한 덕산선감(782-865)이라 할 수 있다. “십이분교로 구분되는 경전은 귀신 이름을 적어놓은 호적부이자, 고름 나는 종기나 사마귀 닦는 종이다.”(주10)라고 단언한 것에서 상황을 알 수 있다. 문자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경전을 백안시하는 이 태도는 그나마 봐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붓다를 내동댕이치고 불태우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운문종의 대종사 운문문언(864-949)과 천하의 대기인大奇人 단하천연(739-824)이 그들이다. “문제제기[거擧]: 세존께서 태어나자마자 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주위를 일곱 걸음 걸으시고, 사방을 둘로 보았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하늘 아래 땅위, 나 홀로 인간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운문이 말했다: ‘만약 당시 내가 (걸어 다니며 말하는) 붓다를 보았다면, 천하의 평안을 도모하기 위해, 한 몽둥이에 때려 죽여 개 먹이로 던져 주었을 것이다.’”(주11) 천연은 어느 추운 겨울 날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서 목불을 불살라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누가 심하게 질책하자 천연이 “불 태워 사리를 찾고 있소.” 힐난하던 사람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연이 “그렇다면 나를 힐난할 필요가 있소?”라고 반문했다.(주12)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선禪이 문자(문자로 된 경전)를 ‘완전히’ 떠난 시기는 ‘한 번도’ 없었다. 달마는 “이치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경전에 의거해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다.”(주13)라고 가르쳤다. 뿐만 아니다. 혜가에게 『능가경』을 전해주기도 했다. “처음 달마 선사가 4권본 『능가경』을 혜가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가 한지漢地의 사정을 살펴보니, 오직 이 경전이 좋다. 수행자가 이 경전에 의거해 수행하면 스스로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주14) 혜가는 달마로부터 경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저서도 남겼다. “이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했지만 다만 붓과 먹을 잡지는 않았다. 때때로 (설명한 것을) 모았는데, 책이 될 정도였다.”(주15)
『능가사자기』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일승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해 ‘그윽한 이치’(주16)와 결부 시켰다. (그래서) 수행하고 마음을 밝히는 핵심을 간략히 설명했으며, 진실로 깨달음에 이르렀다.”(주17) 혜가는 결코 경전을 멀리 던지지 않았다. 『능가사자기』에는 혜가가 『능가경』·『십지경』·『화엄경』·『법화경』 등을 인용해 설명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혜가는 물론 스승 달마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한편으로는 문자를 멀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경전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혜가의 제자인 나선사, 나선사의 제자인 혜만 등은 비록 고행苦行을 했지만 항상 『능가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혜가 문하의 제자 가운데 『능가경』에 대한 주석서를 쓴 사람은 적지 않다.
백원기 교수의 저서 <선시의 이해와 마음치유> 및 <숲 명상시 이해와 마음치유>
“마음을 비우고 조용하게 앉아 좌선할 뿐 글자를 만들어 뱉지 않았다.”(주18)는 승찬이지만 『법화경』을 인용해 도신에게 설명하는 기록이 『능가사자기』에 전한다. 도신은 더하다. 『능가사자기』에는 도신이 『문수설반야경』, 『보현관경』, 『대품반야바라밀경』, 『화엄경』, 『무량수경』 등을 인용해 가르침을 설명하는 기록이 수북하다. 결코 문자나 경전을 멀리 하지 않았다. 특히 『속고승전』 권제20 「기주쌍봉산석도신전19」에는 “도적들이 성을 에워 싼지 70여 일이나 되었다. 성 안에 물이 부족해 사람들이 모두 곤궁해졌다. 도신은 밖에서 우물물을 들어오게 했다. 자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도적들이 언제 물러가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도신이 ‘다만 반야를 염송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온 성안의 사람들이 함께 반야를 염송했다. … 도적들이 흩어졌다.”(주19)라는 기록이 있다. 역시 반야경을 중시한 흔적을 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홍인 또한 경전을 버린 적은 없었다. 『능가사자기』에 현색의 『능가인법지』 기록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 여기에 홍인이 현색에게 『능가경』의 의미를 설명했다는 것과 홍인 자신이 신수와 『능가경』에 대해 논의했다는 글이 있다.(주20) 주지하다시피 홍인은 『금강경』도 중시했다. 혜능은 어떤가. “일체의 경전과 문자, 대소승의 12부 경전은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다. 지혜의 본성이 있기에 능히 (경전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일체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사람이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라. 모든 경전도 사람이 말해 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소인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은 대인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묻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설명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홀연히 깨닫고 이해해 마음이 열리면 지혜로운 사람과 차이가 없다.” (주21)라고 강조했다. 높은 근기의 사람은 문자에 크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본성[자성自性]’을 깨칠 수 있지만, 지혜가 낮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과 경전에 의지해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혜능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혜능의 어록인 『육조단경』에는 『유마경』 등이 인용되고 있다. 초기의 선사들도 결코 경전과 문자를 떠난 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문자와 경전을 경시輕視하던 초기 선종의 경향은 중당中唐(780-824)(주22) 이후가 되면 크게 변한다. 선문에 출가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권력 투쟁에 환멸을 느낀 사대부들이 점차 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선사들의 대화에 시詩 구절이 수시로 등장하고, 사대부들이 좋아하던 문자들이 대량 선문禪門에 유입된다. 불광여만의 제자 백거이(772-846), 약산유엄의 제자 이고(772-841), 황벽희운의 제자 배휴(791-864), 천태종 용흥중손의 제자 유종원(773-819) 등은 문인 사대부로 선에 침잠했던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이런저런 내외적인 영향으로 문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하던 선사들이 언어와 문자를 신비화神祕化하고, 현학화玄學化하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특히 후배 선사들이 선배 선사들의 ‘대화의 기록[문자]’을 ‘기봉機鋒’(주23)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선사들은 문자와 언어를 중시하고, 문자의 교묘함을 즐기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즈음 내면을 관조해 공성을 체득하는 ‘참선參禪’은 문자와 언어를 참구하는 ‘참현參玄’으로 바뀐다. 임제종의 삼현삼요三玄三要, 조동종의 군신오위君臣五位 등이 대표적이다. 위앙종은 아예 ‘선학禪學’을 ‘현학玄學’이라 부르기까지 한다.(주24) 교학의 의미인 의학義學과 상대적인 용어로 선학을 현학으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詩라 불러도 손색 없는 게송들도 중당 이후 출현한다. 마조의 제자 대매법상(752-839)의 게송은 전형적인 시다. “부러진 마른 나무 차가운 숲에 의지한 채, 몇 번인가 봄을 맞았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네. 나무꾼이 봐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는데, 나를 아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애써 찾겠는가?”(주25) 영운지근의 오도송은 또 어떤가. “삼십년 동안 칼을 찾던 검객, 낙엽 지고 나뭇가지 돋는 것을 여러 번 만났네. 복송아 꽃 핀 것을 본 후, 지금까지 다시는 의심하지 않네.”(주26) 선자덕성의 게송을 봐도 마찬가지 느낌이 든다. “긴 낚시 줄 곧바로 드리우니, 한 파도에 온갖 파도 따라 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운데 고기는 물지 않고, 빈 배 끌고 밝은 달과 함께 돌아오네.”(주27) 남송의 나대경이 편찬한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전하는 어느 비구니 스님의 게송도 주목할 만하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짚신으로 밭두둑의 구름만 부지런히 밟았네. 돌아와 웃으며 향기 가득한 매화가지 잡고 냄새 맡으니, 가지 끝에 봄이 이미 가득하네.”(주28) 이들 게송은 초기 선사들의 그것과 하늘과 땅 차이다. 문자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게송들이 나오겠는가? 약산유엄 문하에 게송의 거장들이 특히 많이 출현한다. 도오원지(769-835), 협산선회(805-881), 낙보원안(834-898) 등이 대표적이다. 동안상찰 역시 게송으로 유명한 선사다. 선의 오묘한 취지趣旨를 열 가지 면에서 노래한 「십현담十玄譚」은 사상과 수행경험 그리고 시詩가 아주 잘 조화된 게송, 즉 게송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선과 시>, <선학과 당송 시학>, <당대 시가와 선학>, <선과 시학>
오대 말 북송 초 본격화 된, ‘조사들의 언행’에 대한 ‘언어적 해석 능력’(주29)이 수행자들의 수행 정도를 판별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면서 선의 문자화는 급속히 진전된다. ‘조사들의 언행’이 바로 ‘공안公案’이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범법犯法 여부를 가리는 세간의 준칙準則, 즉 법률 조항을 담은 공문서[안독案牘]가 공안의 본래 의미다. 이것이 선문에 들어와 수행의 성숙成熟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지극한 이치[지리至理], 즉 ‘조사祖師들의 언행言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전화됐다. 공안은 물론 어록語錄과 등록燈錄에서 나온 것으로 ‘조사祖師와 학인學人의 문답’이 주된 내용이다. 어록과 등록은 선사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들이기에 선은 결국 문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문자에 더 귀속되고 말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공안을 정리·해석하는 과정에 더욱 정교한 언어적 장치, 즉 대어代語·별어別語·평창評唱·염고拈古·송고頌古·수시垂示(주30) 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공안과 화두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안이 화두고, 화두가 공안이라고 뭉뚱그려 보는 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공안의 한 부분, 즉 스승이 학인의 물음에 대답하는 말이 바로 ‘화두話頭’다. 화두를 궁구窮究하는 대상으로 삼는 수행법이 소위 간화선이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언어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자 고안된 것이 화두話頭다. 화두가 발전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라는 말도 등장했다. 논리적인 말은 ‘사구’, 논리가 통하지 않는 말은 ‘활구’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활구는 의미를 찾기 힘든 ‘무의어無義語’로 변했다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보통 사람은 생각해 낼 수 없는 ‘격외구格外句’로 흘러갔다. 소위 ‘격외도리格外道理’는 통상 시詩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선의 종착역은 시詩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활구든, 무의어든, 격외구든 게송으로 표현되고, 상식을 벗어난 말로 표현되는 한 넓은 의미의 시이기 때문에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선과 시, 시와 선은 차이점도 있지만 닮은 점도 상당히 많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유적이고 압축적이며 상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서술敍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선사상의 발전은 ‘언어(언어 표현)의 발전사’라고 다소 ‘거칠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깨달음을 언어로 전달할 수는 없지만 언어로 드러낼 수는 있다. 언어라는 것은 마음과 관련된 것이고, 깨달음의 표시이다. 표시를 살피면 마음이 (깨달음과) 계합한다. 때문에 수행자는 매번 언어를 통해 체득한 깨달음의 깊고 얕음의 정도를 알 수 있다.”(주31)라는 혜홍각범(1071-1128)의 말은 선과 언어, 선과 시의 연관성을 매우 적절하게 잘 표현한 탁월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선시를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 이원섭(1924-2007) 선생이 지은 『선시-깨달음의 노래』(민족사,1992)와 『깨침의 미학』(법보신문사, 1991)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들이다. 현대 한국의 선시 비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백원기 교수가 지은 『선시의 이해와 마음치유』(도서출판 동인, 2014)와 『숲 명상시 이해와 마음치유』(우리출판사, 2018) 역시 선시 읽기에 새로운 독법讀法을 제시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타이완의 두송바이杜松栢가 지은 『선학과 당송 시학禪學與唐宋詩學』(臺北:新文豊出版社, 2008)은 이 분야에서 알아주는 저서다. 박완식이 번역한 두송바이杜松栢의 저서 『선과 시禪與詩』(민족사, 2000) 역시 훌륭한 안내서다. 타이완의 샤리화蕭麗華가 저술한 『당대 시가와 선학唐代詩歌與禪學』(臺北:東大圖書公司, 1975)과 중국의 장뽀웨이張伯偉가 펴낸 『선과 시학禪與詩學』(北京:人民文學出版社, 2008) 등도 정독할 필요가 있는 저서들이다.
주)
1) “深信含生, 同一真性. 但為客塵妄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真, 凝住辟觀, 自他 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文教.”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7b.
2) “故學人依文子言說爲道者, 如風中燈, 不能破闇.”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9a.
3) “蕭然淨坐, 不出文記.”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10a.
4) “決須斷絶文子語言. 有爲聖道, 獨一淨處, 自證道果也.”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13b.
5) “其忍大師, 蕭然淨坐, 不出文記. 口說玄理, 黙授與人.”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17a.
6) “吾一生以來, 不識文子.” 周紹良 編著, 『敦煌寫本「壇經」原本』, 北京:文物出版社, 1997, p.153.
7) “義者, 道理也. 言說已麁, 況舒在紙, 麁中之麁矣.” 『續高僧傳』 卷第27 「唐兗州法集寺釋法沖傳39」. T50-p666b.
8) “縱然誦得十二圍陀經, 只成憎上慢, 却是謗佛, 不是修行. 讀經看教, 若准世間是好事; 若向理明人邊數, 此是壅塞人.” 孫昌武等点校, 『祖堂集』, 北京:中華書局, 2007, p.643.
9) “經是文字紙墨, 性空何處有靈驗? 靈驗者, 在持經人用心, 所以神通感物. 試將一卷經安著案上, 無人受持, 自能有靈驗否!” 『景德傳燈錄』 卷第28 「越州大珠慧海和尙語」, T51-p442c.
10) “十二分教, 是鬼神簿、拭瘡疣紙.” 『五燈會元』, 北京:中華書局, 1984, p.374.
11) “擧: 世尊初生下,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 云: ‘天上天下, 唯我獨尊.’ 雲門云: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 貴圖天下太平.’” 『五燈會元』, 北京:中華書局, 1984, p.924.
12) “後於慧林寺, 遇天大寒, 師取木佛焚之. 人或譏之. 師曰: ‘吾燒取舍利.’ 人曰: ‘木頭何有.’ 師曰: ‘若爾者何責我乎?’” 『景德傳燈錄』 卷第14 「登州丹霞山天然禪師」, T51-p301c.
13) “理入者, 謂藉教悟宗.”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7b.
14) “初達摩禪師以四卷《楞伽》授可, 曰: ‘我觀漢地, 惟有此經, 仁者依行, 自得度世.’” 『續高僧傳』 卷第16 「齊鄴中釋僧可傳6」. T50-p552b.
15) “其發言入理, 未加鉛墨, 時或纘之, 乃成部類, 具如別卷.” T50-p552b.
16) ‘그윽한 이치’를 『노자』·『장자』의 가르침과 결부시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야나기다 세이잔 지음·양기봉 옮김, 『초기선종사Ⅰ-능가사지기·전법보기』, 김영사, 1990, p.93.
17) “精究一乘, 附於玄理, 略說修道明心要法, 真登佛果.”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8b.
18) “蕭然淨坐, 不出文記.”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10a.
19) “被賊圍城七十餘日, 城中乏水人皆困弊, 信從外入井水還復. 刺史叩頭, 賊何時散. 信曰: ‘但念般若.’ 乃令合城同時合聲, … 群賊即散.” T50-p606b.
20) “蒙示《楞伽》義云, … 如吾一生, 教人無數, 好者並亡, 後傳吾道者, 只可十耳. 我與神秀, 論《楞伽經》.” 『禪宗全書』 第1册, 『楞伽師資記』, 北京:國家圖書館出版社, 2004, p.17b.
21) “一切經書及文字, 大小二乘, 十二部經, 皆因人置, 因智慧性故, 故然能建立. 若無世人, 一切萬法本自不有, 故知萬法本自人興; 一切經書, 因人說有. 緣其人中, 有愚有智, 愚為小人, 智為大人. 愚者問於智人, 智者與愚人說法, 愚人忽然悟解心開, 即與智人無別.” 『六祖壇經』. T50-p340b.
22) 명나라 고병(高棅. 1350∼1423)이 당나라 문학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품휘唐詩品彙』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개념. 초당初唐은 618∼712년, 성당盛唐은 713∼779년, 중당中唐은 780∼824년, 만당晩唐은 825∼907년이다.
23)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 혹은 예리한 언동. 선승이 다른 스님에게 보이는 말·태도·방식 등이 ‘민첩하고 격렬한 것’을 가리킨다.
24) “溈山問: ‘子既稱善知識, 爭辨得諸方來者, 知有不知有? 有師承無師承? 是義學是玄學? 子試說看.’” T47-p584a.
25) “摧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郢人那得苦追尋?” 『景德傳燈錄』 卷第7 「明州大梅山法常禪師」.
26) “三十年來尋劍客, 幾逢落葉幾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景德傳燈錄』 卷第11 「福州靈雲志勤禪師」.
27)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五燈會元』 卷第5 「船子德誠禪師」
28)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壟頭雲. 歸來笑捻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羅大經撰, 『鶴林玉露』, 北京:中華書局, 1983, p.346.
29) ‘언어적 해석 능력’이란 공안에 대해 대어代語, 별어別語, 평창評唱, 염고拈古, 송고頌古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30) 이들 각각의 상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불교사전을 참조하기 바란다.
31) “心之妙, 不可以語言傳, 而可以語言見. 蓋語言者, 心之緣、道之標幟也. 標幟審則心契, 故學者每以語言爲得道深淺之候.” 『石門文字禪』 卷第25 「題讓和尙傳」. 『嘉興大藏經』 第23册, 臺北:新文豊出版社 影印本, 1987, p.70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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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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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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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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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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