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허응당 보우 - “선·교가 둘 아님 알려면 수미산 최상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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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19 년 2 월 [통권 제7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26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 문학평론가
조선 중기 숭유억불의 시대에 꺼져가던 법등을 밝힌 허응당 보우(1509~1565)는 문정왕후의 발탁으로 선종판사가 되어 목숨을 걸고 불법을 수호하고 불교중흥을 위해 진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요승妖僧이라 낙인이 찍혔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자 제주 유배 끝에 장살杖殺 당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가 남긴 저술로는 『허응당집』 상하 2권, 『선게잡저』·『나암잡저』·『권념요록』 각 1권 등이 있다.
보우는 선·교 회통, ‘일정론一正論’에 기반 한 유·불 회통, 원융무애의 사상으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공존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지닌 보우는 시심詩心을 시마詩魔라 표현할 정도로 시 창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주옥같은 많은 시를 생산하였다. 그의 선·교 회통의 사상은 선이 부처님 마음[불심佛心]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불어佛語]이니, 선·교가 둘이 아닌데 양분되어 상쟁相爭하고 있음에 대한 경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지극한 도는 종래에 너와 내가 없는데
어찌 그대들은 종의 우열을 서로 다투는가?
봉은, 봉선 두 사찰은 모두 왕의 교화요
아난과 가섭은 일불을 섬겼네.
교가 곧 선이고, 선이 곧 교이며
얼음은 본래 물이고 물도 원래 얼음인 것을.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알고자 한다면
수미산의 최상층을 보라.
지도종래무피아至道從來無彼我 내하군배투종능奈何君輩鬪宗能
선은양사개왕화先恩兩寺皆王化 난엽동사일불승難葉同師一佛乘
교즉시선선즉교敎卽是禪禪卽敎 빙응원수수원빙氷應元水水元氷
욕지선교진무이欲知禪敎眞無二 간취수미최상층看取須彌最上層
지극한 도의 관점에서 보면 선·교의 나눔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선종 본찰 봉은사와 교종 본찰 봉선사는 다 같이 법왕의 교화이고, 선종의 초조 가섭과 다문제일의 아난이 일불을 섬겼다는 사실도 같은 이치이다. 교가 곧 선이고, 선이 곧 교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얼음은 본래 물이고 물도 원래 얼음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선·교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전체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선사는 선·교가 둘이 아님을 알고자 한다면 수미산 정상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수미산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산길은 수미산에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보우는 진리의 대본과 대용, 권도와 상도를 대비시키며 유·불이 무이無二의 도임을 밝히고 있다. 형상 없는 도가 결코 두 갈래로 분리될 수 없는 일원一元의 도임을 밝히고, 그 예를 물과 파도, 얼음과 눈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나 잡을 수 없는데
누가 두 끝으로 나눌 수 있는가?
물과 물결은 원래 같은 습한 것이며
얼음과 눈도 본래 다 차가운 것.
도를 어찌 유불로 나눌 수 있으리오?
사람들이 창과 방패를 세운 것일 뿐.
슬프도다, 어리석은 후배들이여!
그림자로 알면서도 다투어 잡으려 하네.
유물몰파비有物沒巴鼻 수능분양단誰能分二端
수파원홍습水波元共濕 빙설본동한氷雪本同寒
도개분유석道豈分儒釋 인응수극간人應竪戟干
감차광후배堪嗟狂後輩 인영쟁추반認影競追攀(주1)
표면적으로 물과 파도는 분명히 다르지만 습하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얼음과 눈도 겉으로는 이질적인 것이나 차갑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라는 아주 평범하고도 알기 쉬운 예를 들어 유·불의 원리도 같은 이치임을 펼치고 있다. 이어 도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도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분별심으로 창과 방패를 나누어 비춰진 그림자만을 보고 도의 실체 인줄로 착각하여 싸우는 어리석은 행동을 경책하고 있다.
한편, 모든 존재는 저마다 지닌 법성으로 차별이 없고 평등하게 존재한다. 선사들이 선심禪心을 노래함에 있어서도 역시 안과 밖의 경계가 둘이 아님[불이不二]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보우는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경지를 철저히 깨닫고 난 뒤의 환희심을 다음의 시에서 극화하고 있다.
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 아니니
대지에 가득한 산과 강이 무엇인고?
적적한 가을 산봉우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
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너울 춤추네.
경심심경경비타境心心境境非他 만지산하시십마滿地山河是什麼
적적추잠소우과寂寂秋岑踈雨過 풍전청초무파사風前靑草舞婆娑
모든 경계가 일심이고, 일심이 모든 경계라는 일심묘용의 경지를 멋지게 묘출하고 있다. 즉 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가 아님을 자연의 한결 같은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변함없는 모습을 적적한 가을 산봉우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 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 너울 춤추는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다. 깨침을 얻은 후의 고졸하고 적요한 조응의 세계가 참으로 이채롭다. 이렇듯 분별심을 털어 버리고 모든 존재가 동근동체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고 밝은 지혜를 얻게된다. 깨닫고 보면 일체 분별과 망상이 없고 얽매임 또한 없으며, 물아일체의 경지 그대로다. 선사의 이러한 만물교감의 인식은 다음의 시에서도 한결 깊어진다.
산이 딴 생각 있어 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나도 다른 생각 없이 푸른 산 빌려 쓰고 있으니
내가 곧 산이요 산이 곧 나인지라
흰 구름 사이에서 마주보고 있는 줄 모르노라.
산비유의용빈도山非有意容貧道 빈도무심가벽산貧道無心假碧山
아즉시산산즉아我卽是山山卽我 부지상대백운간不知相對白雲間
하늘과 땅이 한 뿌리이니 나와 사물 또한 한 몸이라는 인식이 선명히 표현되고 있다. 산이 다른 생각 있어 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내 자신도 다른 생각 없이 산을 대하고 있으니 내가 곧 산이고, 산이 곧 나이다.
이미 자연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그대로 물物인 것이다. 이 경지가 ‘흰 구름 사이에서 마주 보고 있는 줄을 모른다’는 시행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흰 구름과 마주 대하고 있지만 서로 마주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지, 즉 주객의 차별이 없는 경지, 그것이 곧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인 경지이다. 그야말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한편, 보우는 화엄세계의 본래 부사의한 묘체를 잘 표현한 「화엄부사의묘용송 2」에서 ‘참다운 묘용을 알고 싶다면 일상에서 천연스러움을 따라라’라고 하여 차 마시고 잠 잘 자는 일을 모두 하늘의 이치에 맡겨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묘용이라 했다.
진실로 묘한 작용 알고 싶다면
일상사 그대로가 그것이네
물 길어 차 달여 마시고
자리에 올라 다리 뻗고 잠자네.
솔개는 날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고
물고기는 뛰어 올랐다가 깊은 못으로 들어가네.
만물은 힘차게 약동하여 중단되는 일 없으니
푸른 구름 먼 산마루에 일어나네.
옥지진묘용欲知眞妙用 일용사천연日用事天然
급수팽차음汲水烹茶飮 등상전각면登床展脚眠
연비횡벽한鳶飛橫碧漢 어약입심연魚躍入深淵
발발무간단潑潑無間斷 청운기원령靑雲起遠嶺
선이 강조하는 것은 분별, 조작, 시비를 떠나는 평상심이다. 여기에서 선사는 화엄의 묘용이 바로 천연스러운 일상생활에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천연스러운 모습은 목마르면 물을 길어 차 달여 마시고 피곤하면 다리 뻗고 잠자는 일상의 삶이다. 아울러 그 천연스러움은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유영하며 솟아올랐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며, 부단히 계속되는 만물의 활동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모두는 자연의 이법에 따른 무위의 진리적 표현이다. 마지막 시행 ‘구름이 먼 산마루에 일어난다’는 대목에는 ‘평상심이 곧 도’라는 선지가 담지되어 있다. 이 평상심이 곧 무심이고 무상이며 무념이다. 그래서 선은 직관을 중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언어문자를 초월한다. 깨달음은 어떠한 말이나 기호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두두물물이 곧 불법의 현현顯顯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 되는 선의 세계요, 화엄의 묘체이다. 보우가 선승으로서 사물에 대한 관조의 사유와 자신의 깨달음을 시화詩化하고, 그것을 널리 알림으로써 타자들의 깨달음을 열어 주고자 하는 것은 다분히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두타행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세간과 출세간 사이의 갈등 속에서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고, 이를 전달하기 위한 성찰과 고뇌의 심경을 표출한 보우의 선시는 다분히 모든 분별의 경계선을 허물어가는 ‘원융’의 사유라 할 수 있다.
(주1) 『허응당집』 상권, 「차옥사축운병서次玉師軸韻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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