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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사이]
‘장葬’과 ‘조弔’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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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  2018 년 12 월 [통권 제6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56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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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나는 평소 장례는 검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서 어떤 과정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떻게 묻힐 것인지를 미리 잘 생각해두고, 그 내용을 유언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죽은 뒤에는 누구나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산 자들의 손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판단과 처리방식에 내 맡겨진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신의 주검처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기록해두지 않으면 스스로 원했던 방식대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냥 편의적으로 ‘처리 된다’. 내 죽음이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판단되고 해석될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종언을 미리 규정해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지막을 위한 ‘노트’를, 평소 작성해두는 것도 좋겠다. 격이 있는 죽음, 존엄한 죽음은 스스로 준비해야 얻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후한 장례[厚葬]’와 도굴의 풍경 

 

중국사상사에서는 일찍이 장례에 대한 검소함[薄葬]과 후함[厚葬]을 두고 유가와 묵가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가는 나와 남, 내 핏줄과 남 핏줄 사이의 사랑함[愛]에 ‘친소후박親疎厚薄’이 있음을 인정하여 차등적-원근법적 사랑인 ‘별애別愛’를 주장한다. 이에 비해 묵가는 무차별적-평등적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한다. 장례를 두고도 유가는 후한 장례 즉 ‘후장厚葬’을, 묵가는 검소한 장례 ‘박장薄葬’을 원한다. 묵자의 유가 비판을 보면 이렇다. 

 

유가는 장사葬事를 후하게 지내고 상喪을 오랫동안 행하여 널관 곽棺槨을 겹으로 만들고 옷[衣裳]을 많이 지어 죽은 이 보내기를 이사 가는 듯하며, 3년 동안이나 곡읍哭泣한다. 그리하여 상주는 부축해 주어야 일어나고 지팡이를 짚어야 걸으며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주1) 

 

『맹자』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상上」에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묵가에 속하는 사람[墨者]인 이지夷之가, 유가의 계보에 속하는 맹자를 제자 서벽徐辟을 통해 만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맹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서 만나지 않았다. 다시 이지가 맹자를 만나고자 하니 맹자는 겨우 이에 응하긴 하였으나, 서벽을 매개로 논의를 주고받는다. 그 요지는 이렇다. 묵가의 검소한 장례=‘박장薄葬’과 유가의 후한 장례=‘후장厚葬’을 대비하고, 사랑[愛]의 ‘친소후박親疎厚薄’의 차이를 맹자는 인정하나 이지는 인정하지 않는다.(주2) 

 

『장자』 「잡편」에 실린 「외물外物」 가운데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후한 장례의 예와 그에 따른 도굴의 풍경을 보여준다。

 

유학자들이 시와 예를 읊으며 무덤을 도굴하는데, 대유大儒가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 간 소유小儒가 도굴하는 무덤 속) 아래를 향해서 말했다. “여보게들!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대고 있는가?” (무덤 속에서 도굴에 한창인) 소유小儒가 말한다. “아직 (시신에 입힌) 하의와 저고리를 벗기지 못했는데, 입안에 구슬이 있습니다. 『시경』에 본래 이런 구절이 있지요.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무성하구나. 살아 베풀지 못한 이들이 어찌하여 죽어 구슬을 물고 있는가!”(주3) 시체의 귀밑머리를 잡고 뺨을 누른 채, 소유小儒가 쇠망치로 툭툭 아래턱을 쳐서, 천천히 시신의 입을 벌리니, 입속의 구슬을 손상시키지 않고 (무사히 훔칠 수가 있었다).(주4) 

 

우스꽝스런 것은 ‘시예詩禮’라는 것이 기껏 도굴할 때에 응용되는 타락한 세상의 ‘양념격’(주5)인 텍스트로 꼬집고 있다는 점이다. 화려한 무덤 속 시신에 들어있는 값진 보석들을 노리는 유자儒者들은 상례, 제례를 관장하니 무덤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했다. 그들은 낮에는 낮의 ‘시예’를, 밤에는 밤의 ‘시예’를 읊조릴 수 있었다. 즉 무덤 밖의 시가는 세상을 위한 장송곡이지만, 무덤 속의 시가는 일종의 도굴용의 레퀴엠(진혼곡)으로 변한다. 타락한 시대에 무덤의 구조를 알고 그 속의 보물을 파내서 살아가는 무리인 유자 그룹들의 추악함을 폭로해내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장례에 대한 논의 중에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상고 시대에 부모를 매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부모가 돌아가시자 들것에 들어다가 시신을 산 속 계곡에 내다 버렸다. 며칠이 지나서 그 사람이 그 곳을 지나다가, 여우와 살쾡이가 뜯어먹고 쉬파리와 등에가 파먹는 것을 보고서는, 그 사람은 이마에 진땀을 흥건히 흘리며 곁눈질로 볼 뿐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가 이렇게 진땀을 흘린 것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요, 진실로 마음속으로 뉘우쳐 얼굴에 드러나게 된 것이니, 아마도 그는 집으로 돌아와 삼태기와 삽을 가지고 가서 시신을 다시 매장하였을 것이다.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이라면, 효자와 어진 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장례 치르는 것도 반드시 그 나름의 도리가 있다.(주6) 

 


청산도 초분

 

위의 내용 중에 “시신을 산 속 계곡에 내다버려…여우와 살쾡이가 뜯어 먹고 쉬파리와 등에가 파먹는”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상고시대의 천장天葬을 말한다. 천장이란 풍장風葬을 의미한다. 풍장이란 사체를 지상 혹은 나무 위, 암반 등의 자연상태에 방치해두고 비바람을 맞아 부패하여 자연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뼈를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이 점에서, 풀무덤=초분草墳(=1차 장葬)을 통해서 탈육脫肉한 후 세골장洗骨葬(=2차 장葬. 원장/본장)을 하는 이중장제二重葬制와도, 시신의 소멸을 조류에 맡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장과도 다르다.(주7) 이를 증명해주는 기록들이 있다. 즉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질박하여…사람이 죽으면 띠풀로 싸서 들판에 버렸는데, 효자는 부모가 날짐승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활을 쏘아서 지키고, 날짐승 들짐승의 해를 끊었다.”(주8)라고 한다. 이를 보면 매장 이전에 천장을 하지만 들짐승 날짐승들이 시신을 해치는 것을 막았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풍장 혹은 조장 같은 ‘천장’이 진행되다가 차츰 ‘매장埋葬’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초분 위에 꽂힌 솔잎

 

 

‘장葬’은 ‘잡풀 우거질 망茻’과 ‘죽을 사死’ 합한 것 

 

사실 장사 지낼 ‘장葬’ 자는 ‘잡풀 우거질 망茻’ 자와 ‘죽을 사死’ 자를 합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사람이 죽으면[死(=屍身)] 풀섶[茻]으로 싸서 들판에 내다버려두었던 풍습과 관련된 것이다.[도표1 참조] 망茻은 풀[屮]이 우거진 모양이다. 사死 자는 앙상한 뼈 알歹 자에 사람 인人 자를 합친 것으로 사람이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장葬은 원래 죽은 이를 풀섶으로 싸서 들판에 내다버린 모양이다. ‘사死’ 자 시(尸, 屍)의 최초표기로 보인다. 사死 자 밑의 일一 자 표시 는 시신을 놓아두는 깔개를 표시한 것이거나(주9) 섶으로 두텁게 옷처럼 입힌 것으로 보인다. 풀섶[茻]이 깔개와 옷의 역할을 한 것이라 하겠다. 남해 완도 의 청산도에 가면 초분을 만들 때 미물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돌 위에 솔잎을 깔거나 초분의 지붕에 솔잎, 솔가지를 꽂아 벌레들 의 근접을 방어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풀섶의 역할을 살필 수 있다. 

 


 

 

『주역』, 「계사繫辭·하下」에 보면, “고지장자古之葬者, 후의지이신厚衣之以薪, 장지중야葬之中野, 불봉불수不封不樹”라는 구절이 있다. 즉 “옛날의 장례는 풀 섶으로 두껍게 입혀서 들판에다 장사지내고는 봉분이나 표식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다음 구절에 “상기무수喪期無數, 후세성인역지이관곽後世聖人易之以棺槨” 즉 “상을 치르는 기간에 (정해진 법식의) 날짜가 없었다. 후세에 (예법과 문화를 만든) 성인이 관곽으로 바꾸었다.”라고 말이 이어진다. 천장에서 매장으로의 이행을 알려준다. 

 

그런데, 시신을 들판에 내다 버리면 새(날짐승)나 들짐승들이 쪼아 먹으러 오기 마련이다. (어디 금수에만 머물겠는가. 온갖 벌레들도 달려든다) 그러면 유족들이 그것을 그대로 방치했을까? 아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弔’ 자[도표2 참조]가 이 점을 알려준다.(주10) 

소전小篆에 나오는 조弔 자를 보면 사람 인人 자에 활 궁弓 자가 보인다. 마치 이[夷: 大(대→사람)와 弓궁의 합자. 사람이 활을 들고 있는 모양] 자처럼, 사람이 활을 지닌(=들거나 메고 있는) 모습이다. 

 


 

 

무슨 말인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마지막 가는 길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옛날 장사를 지내는 자는, 섶으로 두텁게 옷 입히고, 사람들이 활을 가지고, 모여서 새를 쫓는다.”(주11)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오월춘추』에서도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띠풀로 싸서 들판에 버렸는데, 날짐승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활을 쏘아서 지키고 날짐승, 들짐승의 해를 끊었다.”고 나온다. 안사고顔師古는 『급취편急就篇』에서 ‘조’ 자를 이렇게 풀이하였다. 

 

조弔는 죽음을 위문하는 것이다. 문자에서 사람이 활을 지닌 것을 조弔로 하였다. 상고시대의 장례는 섶[薪]으로 두르고 관곽棺槨이 없었다. 항상 날짐승 들짐승들[禽獸]이 해할까 염려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문하는 이가 활[弓]을 지니고 모여서 활 쏘는 것을 도왔다.(주12) 

 

지금 ‘조문을 간다’고 할 때, 장례 풍습이 바뀌었기에 조弔 자는 맥락을 잃어버렸다. ‘조’ 자의 흔적은 없을까. 얼마 전 여수의 초도에 들렀을 때, 그곳 주민들이 예전 마을 뒷산에 초분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고 했다.(주13) 나는 초분의 모습이 궁금해 그것을 찾아 다시 완도의 청산도로 향했다. 청산도 초분의 풍습은 사라졌고 그 모형만 남아있었다[사진 1: 청산도 초분]. 잘 살펴보니 초분 위에 거꾸로 꽂힌 솔잎이 보였다[사진 2: 청산도 초분의 솔가지]. 조문객들이 고인을 위해서, 잘 썩지 않는 솔잎의 기운으로 벌레나 나쁜 기운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하나씩 고이 꽂아두는 것이란다. 멧돼지 등의 들짐승들로부터 고인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솔잎만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소나무 가지를 꽂아 두기도 한단다.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여기서 천장天葬의 사인(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주)

(주1) 『墨구閒詁』 「公孟」: 又厚葬久喪, 重爲棺槨, 多爲衣衾, 送死若徙, 三年哭泣, 扶後起, 杖後行, 耳無聞, 目無見, 此足以喪天下. 

(주2) 『孟子』, 「滕文公章句·上」 참조. 

(주3) 지금의 시경에는 보이지 않는 구절이다. 어쩌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주4) 『莊子』, 「外物」: 儒以詩禮發冢,大儒臚傳曰, 東方作矣, 事之何若, 小儒曰, 未解裙襦, 口中有珠, 詩固有之日,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接其鬢, 擫其顪, 儒以金椎控其頤, 徐別其頰, 无傷口中珠. 

(주5) 김용옥, 『논어역주』1, (통나무, 2008), p.179. 

(주6) 『孟子』, 「滕文公章句·上」: 蓋上世嘗有不葬其親者, 其親死, 則擧而委之於壑, 他日過之, 狐狸食之, 蠅蚋姑嘬之, 其顙有泚, 睨而不視, 夫泚也, 非爲人泚, 中心達於面目, 蓋歸反虆梩而掩之, 掩之誠是也, 則孝子仁人之掩其親, 亦必有道矣. 

(주7) 천장을 조장鳥葬이라 보기도 하는데, 조장이란 풀이 우거진 수풀 속에 내다버려 새나 짐승, 벌레가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후술하는 조弔 자가 말해주듯이 짐승들을 쫓는 것이 있기에 조장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장과 풍장에도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풍장 등에 대해서는 장철수, 『옛무덤의 사회사』, (웅진출판주식회사, 1995) 및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초분』, (국립민속 박물관, 2003)을 참고 바람. 

(주8) 『吳越春秋』 卷九: 古者人民朴質, 饑食鳥獸渇飲霧露, 死則裹以白茅, 投於中野, 孝子不忍見父母為禽獸所食, 故作彈以守之, 絶鳥獸之害. 

(주9) 曹先擢, 『중국어한자의 어원』, 송강호 역, (지식과 교양, 2011), pp.190∼191. 

(주10) 曹先擢, 『중국어 한자의 어원』, 송강호 역, (지식과 교양, 2011), p.191 참조. 

(주11) 問終也, 古之葬者, 厚衣之以薪, 从人持弓, 會敺禽. 

(주12) 顔師古, 『急就篇』: 弔謂問終者也, 於字, 人持弓爲弔, 葬者, 衣之以薪, 無有棺槨, 常苦禽獸爲害, 故弔問者持弓會之, 以助彈射.[曹先擢, 『중국어한자의 어원』, 송강호 역, (지식과 교양, 2011), pp.191∼192에서 재인용]. 

(주13) 초도의 초분에 대해서는 李光圭, 「草島의 草墳- 草島葬制에 관한 一考察-」, 『民族文化硏究』 3,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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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영남대 철학과 졸업,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 취득. 전공은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 동경대, 하버드대,북경대, 라이덴대(네덜란드) 객원연구원 및 방문학자. 한국양명학회장 · 한국일본사상 사학회장 역임했다. 저서로 『노자』,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일본판, 대만판, 중국판, 한국판),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상상의 불교학』 등 30여 권이 있고, 논문으로 「원효와 왕양명」, 「릴케와 붓다」 등 200여 편이 있다.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6권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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