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마음달 외로이 둥글어 그 빛이 만상을 삼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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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기 / 2019 년 12 월 [통권 제8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572회 / 댓글0건본문
백원기 /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
‘길 없는 길’을 살아있는 눈[活眼]으로 살다 간 경허 성우(1846-1912)는 풍전등화 같던 한국불교의 선맥을 되살린 선불교의 새벽별이며 중흥조이다. 9세에 모친을 따라 청계사 계허에게 출가하였으나 계허가 환속하자 동학사 만화 강백 밑에서 경학을 익혔다. 이어 영호남의 제방 강원에서 경·율·논 삼장과 유학,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고 대강백이 된 경허는 스승 계허를 찾아 나섰다.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한 후,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를 들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를 물리치며 치열하게 참구를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활연 대오하였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忽聞人語無鼻孔
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月燕岩山下路
들사람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콧구멍 없는 소’. 그 소는 코뚜레를 뚫을 수 없어 고삐를 묶을 수 없고,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도 없다. 이는 분별심이 없는 본래면목을 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고 하는데, 선사는 이 경지를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집’은 본래심을 뜻한다. 사실, 깨닫고 보니 상대적 경계에 걸리거나 집착이 없고, 일 없는 들사람들이 태평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무애의 경지에 이른 환희심의 ‘오도송’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경허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탈속한 대자유인으로서의 무애 자재함을 보여 주었다.
속세와 청산이 어느 쪽이 옳은가 世與靑山何者是
봄볕 있는 곳 꽃피지 않는 곳이 없다네 春光無處不開花
누가 성우의 가풍을 묻는다면 傍人若問惺牛事
돌계집 마음속 영원의 노래라 하리라 石女心中劫外歌
‘천장암에서 부른 노래’로 세간과 출세간이란 이항대립의 관념을 초월한 격외의 도리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와 청산 어느 쪽이 옳은지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있는 자리가 어디든 봄볕만 비춘다면 꽃이 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누군가 경허의 가풍을 묻는다면 석녀의 마음 속 영원의 노래라고 설파하고 있다. 경허의 이러한 선풍은 만공, 보월, 금오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한편, 세상에 머물지만 물들지 않는 경허의 무심의 평상심은 다음의 시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일없음이 오히려 일을 이룸이라 無事猶成事
사립문 닫고 한낮에 조나니 掩關白日眠
산새들이 나의 고독 아는지 幽禽知我獨
그림자가 자꾸 창 앞을 지나가네 影影過窓前
온 종일 잡일에 시달려도 무심의 경지에 이른 도인은 외물의 경계에 미혹되지 않아 일삼을 것이 없다. 하여 한낮에도 사립문을 닫고서 할 일 없이 조는 것이다. 스스로가 고요해지니 대상도 고요해져서 무심해 진다. 그러데 화자의 고독함이 선창 앞을 자꾸 지나가는 산새들의 그림자에서 확인된다. 자아와 대상의 존재성을 ‘무심’이라는 한 지점에서 공유하며 교감을 나누고 있는 선사의 모습이 선연하다.
참으로 살기 좋은 조촐한 세계가 있으니 有一淨界好堪居
아득한 겁 이전에 이미 터가 마련되었네. 窮劫已前早成墟
나무계집과 돌사람 마음 이 본래 실다우니 木女石人心本實
별무리, 등불의 환영 같은 것도 헛되지 않네 星翳燈幻事非虛
깨달음으로 터득한 청정 불성을 ‘살기 좋은 조촐한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이 조촐한 세계는 만상의 본체인 생명이며, 상대적 분별 이전의 절대적 경계로 생사가 없고 무위진락無爲眞樂을 누릴 수 있는 ‘적광토寂光土’이다. 경허의 이러한 깨달음의 충만과 법희선열은 자연을 매개한 서경 속에 한결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빛나고 태평스런 화창한 봄이여 熙熙太平春
볼수록 온갖 풀이 다 새로워 看看百草新
계룡산 자락에 내린 비 鷄龍山上雨
지난 밤 티끌을 다 씻었네 昨夜浥輕塵
방외의 촉목보리제觸木菩提濟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밝고 태평스러운 화창한 봄이고, 바라볼수록 새롭게 보이는 초목들이다. 간에 내린 봄비로 산하대지가 티끌을 깨끗이 씻기어 졌으니 만상이 청신하게 보인다는 선사이다. 비에 씻겨 봄빛에 반짝이는 초목에서 사물의 형상뿐만 아니라 티끌에 가려졌던 청정법신을 보고 있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는 모두가 진여의 모습으로 법음을 노래하고 불법의 꽃을 피우는 것으로 다가온다.
경허는 영호남지방 일대를 다니며 선풍을 크게 떨쳤다. 서산 개심사와 부석사 등에서 수행 교화하였고, 1894년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으며, 또한 1899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경전간행불사와 수선사修禪寺 불사의 법주가 되기도 하였다. 경허의 선정몰입의 기쁨은 성철 스님(1912-1993)이 방장으로 사용했던 해인사 퇴설당 주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봄 가을 내내 참 좋은 날 많더니 春秋多佳日
마땅한 약속 지켜 풍년이 들었구나 義理爲豊年
달을 읽는 물고기 소리 고요히 들으며 靜聽魚讀月
하늘을 얘기하는 새와 웃으며 마주하네 笑對鳥談天
선 수행자의 지극히 고요한 정신세계가 경물과 조화를 이루어 잘 표현되어 있다. 물고기, 달, 새, 구름 등 자연물을 두루 원용하여 확 트인 선열禪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자락이 속진俗塵을 막아주고, 계곡 물소리는 바깥소리를 잠재우며, 보름밤이면 둥근달이 계곡물에 부서지는 소리를 냈을 산당山堂에서 선정에 드는 선사의 모습이 선명히 읽혀진다. ‘달을 읽는 물고기 소리를 고요히 듣는’ 화자는 능히 하늘을 이야기하는 새와 웃으며 마주할 수 있다니, 가히 성성적적한 선사의 선심의 시심화의 압권이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은 길지 중의 길지라 할 수 있다. 무흘구곡 끝자락, 도선국사가 이곳에 터를 잡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된다. 해인사 조실로 있던 경허가 수도암에 주석하고 있을 때, 한암 중원(1876-1951)이 찾아와 경허의 『금강경』 강의를 듣고 심안이 환하게 열렸다. 그런데 겨울 한철을 함께 지낸 한암이 떠나려 하자 경허는 “슬프다.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며 이별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대 멀리 떠나보내는 내 마음 爲君賦遠遊
한없이 눈물이 흐르누나 使我涕先流
인생은 한 백년 나그네 百歲如逆旅
어디에 묻힐지 아득하구나 何方竟首邱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 홀연히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였다.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한암은 오히려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다.”라는 시로 화답한 채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 스승을 쫓지 않았다. 비록 경허와 한암은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지음을 떠나 영원히 빛나는 마음의 달로서 서로를 비추었다. 그런데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경허는 삼수갑산의 도하동에서 어린 학동을 가르치며 살다가 1912년 4월25일 새벽, 원적에 들었다.
마음 달 홀로 둥글어 心月孤圓
그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光呑萬像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光境俱忘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復是何物
경허의 ‘임종게’이다. 선가에서 달[月]은 깨침의 상징으로,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의 달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 달[心月]이다. 이 마음 달 하나만 홀로 둥글게 떠 있고, 그 빛이 모든 삼라만상들을 삼켜버렸다. 이는 삼라만상을 마음이 남김없이 수용하여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여 달빛은 무엇을 비추는 일도 없다. 빛을 받을 경계가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언어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본래부터 밝고 신령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할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 없는 ‘한 물건’이 무엇인가? 영원한 화두이다. 삼라만상을 삼킨 외로운 ‘마음 달’의 주인공 경허는 수월, 혜월, 만공(월면)이란 세 달[三月]이 한반도를 환하게 비추게 함으로써 한국 선의 불꽃을 되살리는 등 치열한 삶을 살다 환지본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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