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손가락 사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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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63회 / 댓글0건본문
무덤기행6
슬슬 은퇴를 생각하며 고향에 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리미리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연습, 친했던 것들과 손을 흔들고 냉담하게 돌아서는 훈련을 미리미리 해보는 것이다. 슬프다거나 쓸쓸하다든가 하는 등등의 모든 감정을 청산하고, 조용히 냉담히 떠나는 다짐과 용기이리라.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퇴락하고 소멸해가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 가며, 오히려 그것들보다 더 앞서가서 바라보는 연습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흘러가는 사태를 읽고 바라보며 넘어서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것 보다 더 위에 서게 되어 한결 초연해지고 평온해지리라. 망각과 종말을 일찍부터 준비하는 것이다.
귀향 …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곳으로
고속도로를 내려서서 시골길로 접어들어 고향이 가까워지면, 70년대에 나온 ‘흙에 살리라’는 노래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초가삼간 집을 짓는 내 고향 정든 땅/아기 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어릴 적 많이 듣고 불렀던 노래인데, 그게 글쎄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당당히 버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노래 전부가 아니라 ‘아기 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이란 가사 한 구절 때문이다. 이 의미를 이제껏 잘 몰랐다. 고향의 논둑 밭둑길을 걸으면 그것을 소유한다는 관념이 아니라, 발에 밟히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존재들이 어느새 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양 느껴진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온통 이 세상의 것’이 되어 있다. 이렇게 읽어도 되고 저렇게 읽어도 되는 문맥 속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맥을 나는 ‘고향’이라 말하고 싶다.
병령사 석굴의 11면관음보살상
고향은 근원이다. 고향가기=귀향歸鄕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시인이란 존재의 근원으로 끝없이 귀향하는 자’(Der Beruf des Dichters ist die Heimkunft)라고 했듯이, 귀향(歸鄕. Heimkunft)을 하는 자의 마음은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자이다. 그 근원을 보는 자, 고향을 만나는 자는 누구나 ‘길=도道’에 들어선 자이고, 그 자체로 ‘시인’이다.
톨스토이가 한 세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답은 이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현재,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이다. 그렇다면 고향은 어디인가? 꼭 시골만이 아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만도 아니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다. 고향을 만나는 방법은 “〜(a) 벗을 삼아 〜(b)길을 가노라면”이다. ‘〜(a)’ 자리에 들어갈 것은, 다름 아닌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다. 함께 이야기하며 도와주는 사람, 딛고 서 있는 건물이나 흙, 곁에 서 있는 나무나 풀들, 재롱을 피우는 동물들, 지저귀는 새, 울어주는 벌레…. 모두 함께 있는 벗이다. 〜(b)는 순간순간 마음과 몸이 이동해가는 길이다. 복도이든 난간이든 들길이든 산길이든,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곳이면 다 길이다. 의미가 깃든 곳, 그곳이 고향의 길이다.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소작인 파홈이라는 사람은 땅값 1000루블을 내고 아침 해뜨기 전에 출발하여 다섯 군데 표시를 하고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그 다섯 군데를 연결한 안쪽의 땅을 모두 준다는 마을을 찾아간다. 아침 일찍 출발한 파홈은 사방에 펼쳐진 비옥한 땅을 보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너무 멀리까지 가게 된다. 아뿔싸! 해지기 전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덕에 그는 해가 떨어지기 전 겨우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나머지 안타깝게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결국 죽음의 대가로 파홈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나 그게 무슨 소용이랴! 세상을 떠난 그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관을 묻을 쪼끄만 땅이었다.
『장자·소요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초료소어심림鷦鷯巢於深林, 불과일지不過一枝, 언서음하偃鼠飮河, 불과만복不過滿腹.” “조그마한 뱁새 한 마리가 깊은 숲에서 둥지를 틀 때도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실 때에도 자신의 작은 배하나 채우는 것이면 족하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는 말이다. 파홈이 묻힌 몇 평의 땅, 그의 고향은 바로 그 무덤이었다.
오늘 마침 우리나라에서 85세의 말기암 환자 김모씨가 존엄사를 선택하고, 8월 중순 입원한 병원에서 ‘생전生前 장례식’을 열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지인들에게 부고장을 보내며 “검은 옷 대신 밝고 예쁜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50여 명과 즐겁게 춤추고 노래했다. 그는 “죽은 다음 장례는 아무 의미 없다. 임종 전 지인과 함께 이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살아있는 순간이 감사하게 느껴지며 다가올 죽음에 대해 진지하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인공호흡기 달고 좀 더 살아서 뭐하나요. 그거 아무런 의미 없다고 봐요.”라고 전했다.(주1) 맞는 말이다.
‘생전 장례식’ … 망각과 종말에 앞서가기
최근 일본에서 ‘생전 장례식’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 바 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죽어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품위 있게 ‘스스로 죽어가는’ 것에 말이다. 동물은 죽음이 없다. 그냥 죽어나자빠져 사리질 뿐이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느끼며 생각하며 죽는 시간과 공간, 그 형식마저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을 수 있다’. 죽음은 삶과 연결된 것이다. 삶의 완성이거나 또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다. 마치 『장자』에서 ‘고기⇄새’(주2), ‘사람(장자)⇄나비’(주3) 혹은 ‘사람·닭·탄환·말’(주4)과 같은 물화物化의 관점처럼, 소풍놀이 하듯이 자연스레 우주만물의 변화에 따라 영원토록 ‘진리[道]=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예컨대 수메르인들에게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과 다르다. 그들의 세계관은 다음의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 잘 나와 있다.
인간은 죽습니다. 내 가슴은 무겁습니다.
가장 큰 인간도 하늘에 닿을 수 없습니다.
가장 넓은 인간도 땅을 다 덮을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무덤 속으로 가게 됩니까?
나도 그런 운명입니까?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을 주었고
자신들은 생명을 가졌다.
그들은 삶과 죽음을 ‘철저히 단절적으로 이해’하였다.(주5) 이들의 죽음에 는, ‘죽음=삶의 완성’이나 또 ‘죽음=다른 곳으로의 여행’이라는 관념은 없다.
주)
(주1) 『중앙일보』(2018.10.10.)[https://news.v.daum.net/v/20181010010053393?d=y](검색일자: 2018.10.10)
(주2) 『장자·소요유』.
(주3) 『장자·제물론』.
(주4) 다음의 문장을 보기로 하자: “자여子輿가 별안간 앓아누웠다. …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가로 가서 수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더니 다시 말했다. “아아, 저 조물주가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고 말았구나.” 자사子祀가 말했다. “자네는 그게 싫은 거로 구만.” 자여가 대답했다. “아닐세. 어째서 싫겠는가? 점점 내 왼팔이 바뀌어 닭이 된다면 나는 때를 알리겠네. 점점 내 오른팔이 바뀌어 탄환이 된다면 올빼미라도 쏘아서 구이로 만들겠네. 점점 내 엉덩이가 바뀌어 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馬]이 된다면 그것을 타고 가겠네.”(俄而子輿有病,… 跰而鑑於井,曰, 嗟乎, 夫造物者又將以予為此拘拘也, 子祀曰, 女惡之乎, 曰, 亡,予何惡, 浸假而化予之左臂以為雞,予因以求時夜, 浸假而化予之右臂以為彈,予因以求鴞炙, 浸假而化予之尻以為輪,以神為馬, 予因以乘之)(『莊子·大宗師』)
(주5) 김용옥, 『논어역주』1, 통나무, 2008, p.32 시를 재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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