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너는 내 속으로 나는 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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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11 월 [통권 제6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92회 / 댓글0건본문
“이 안에 너 있다!” 몇 년 전에 종영된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에게 했던 말이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연인들의 밀어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사랑이 가진 속성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사랑이 깊어지면 가슴에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간절한 사랑 때문에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일심一心’의 상태가 되는 셈이다.
그 때 사랑하는 대상은 밖에 있지 않고 자신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그 때부터 상대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상대가 잘 되면 내가 행복해진다. 둘을 분리하던 인식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야말로 일심동체一心同體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담고 있는 이치는 사랑하는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제법무애도리 중 첫 번째가 ‘이문상입異門相入’이었다. ‘네 속에 내가 들어가고, 내 속에 네가 들어오는 것’이 이문상입의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안에 너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더 넒은 범주로 확장된다. 내 속에 대지가 있고, 내 속에 바다가 있고, 내 속에 태양이 있고, 내 속에 바람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나[我]’란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속에는 사랑하는 연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들어 있다. 나와 우주의 이와 같은 일체성에 대해 승조僧肇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고 했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 속에 네가 있으려면 나는 너 속으로, 너는 나 속으로 들어올 수 있어야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문상입’이다.
바다·태양·바람 등이 내 안에 있다
모든 존재를 역용力用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들은 각자의 영역이 있지만 서로 다른 존재 속으로 자유롭게 드나든다. 다른 문으로 드나든다는 것은 내 속에 너가 있고, 너 속에 내가 있는 것을 뜻한다. 그와 같은 역용을 설명하면서 등장한 개념이 유력과 무력이었다.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힘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두 힘은 서로 길항拮抗 관계에 있고, 그런 힘의 작용과 조화에 따라 하나의 존재는 결정된다.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힘을 유력有力이라 한다면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은 무력無力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땡감의 상태는 가을 햇살을 받고 달콤한 홍시로 익고자 하는 힘과 땡감 상태를 유지하려는 두 힘에 의해 결정된다. 홍시가 되고자 하는 힘은 유력이고, 땡감으로 머물고자 하는 힘은 무력이다. 홍시가 되려면 익고자 하는 힘은 작동하고, 땡감으로 머물고자 하는 힘은 없어야 한다. 결국 한 알의 홍시는 유력과 무력의 조화가 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두 힘이 동시에 작동하는 유력이 되면 홍시와 땡감이 동시에 있는 오류가 발생하고, 두 힘이 모두 작동하지 않는 무력이 되면 홍시도 땡감도 없는 오류가 생긴다.
중국 감숙성 난주 부근에 있는 병령사 석굴의 조각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에서 유력과 무력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한다. 즉 “하나가 여럿을 지닐 수 있으니[一能持多], 하나가 유력이므로 여럿을 포섭할 수 있고[有力能攝多], 여럿이 하나에 의지하니[多依於一] 여럿이 무력이므로[多是無力] 하나에 숨어들어간다[潛入一].”는 것이다. 이 짧은 구절에는 존재의 역용에 대한 깊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첫째, 하나가 여럿을 포함하고 지닐 수 있다[一能持多]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한 알[一]의 홍시는 존재의 주체가 되는 인因이다. 그런데 그 한 알의 홍시는 제 혼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조건인 연緣들의 도움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한 알의 홍시는 수많은 존재들을 자기 속에 모두 함축하고 있다. 바람, 빗물, 햇살, 토양의 자양분, 벌과 나비 등 수많은 조건들이 동참하여 한 알의 홍시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앞에 있는 하나[一]의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들[多]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함축관계는 생태적 관계를 넘어 온 우주로 확장된다. 하나의 현상은 수많은 것들에 의지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단지 개별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를 있게 해준 일체를 대표하는 하나이며, 일체를 자기 속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이다. 이렇게 하나의 인이 유력으로 작용할 때 그 힘은 일체 모든 것을 포섭하고 움켜쥐고 있는 셈이다.
둘째, 많음[多]이 하나에 의지해 있을 수 있는 것은 많음이 자신의 힘을 숨기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연緣들은 자신의 모습[相]이나 힘[力]을 드러내지 않고 한 알의 홍시에 의지해 자신을 드러낸다. 한 알의 홍시가 익기까지는 봄날 떨어진 낙엽, 지나가던 강아지가 싼 똥, 땅 속의 자양분 등 무수한 인연들이 동참하고, 그것들의 복합적 작용에 의해 탄생했다. 만약 그와 같이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홍시에 주렁주렁 달라붙어서 자신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것은 홍시가 아니라 두엄 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무수히 많은 다多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비결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의 인에 의탁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연은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내려놓고 뒤로 숨어야 한다. 무수한 연들은 서로 다투며 전면으로 드러나겠다고 싸우지 않고 오로지 인因 하나만 앞세우고 나머지는 조용히 뒤로 빠져 있다. 이것이 ‘많음이 하나에 의지한다’는 ‘다의어일多依於一’에 담긴 의미다. 무수한 연들이 모여서 달콤한 홍시 한 알을 익게 했음으로 ‘많음이 곧 무력[多是無力]’이라는 의미가 된다. 무수한 연들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하나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한다.
전체는 하나에·하나는 전체에 의지하고
셋째,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는 하나는 무수히 많은 다를 숨기고 있다. 법장은 하나의 사물은 “언제나 여럿을 자기 속에 온전하게 두고[多在己中], 동시에 자기를 여럿 속에 숨겨 두지만 서로 장애가 없다[同時無碍].”고 했다. 존재는 한 알의 홍시처럼 개별적 개체로 눈앞에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 한 알의 홍시는 자신을 있게 해 준 무수한 조건을 저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있기까지 힘을 보태고, 조건이 되어준 무수한 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속에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과 연의 관계는 개별적 사물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 관계로 확장된다. 한 알의 홍시가 익기까지 온 우주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상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했다. 미세한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법장도 ‘다재기중多在己中’이라고 했다. 하나의 존재 속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연緣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들은 라깡Lacan의 표현처럼 ‘무덤처럼 조용히 침묵’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침묵과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주의할 것은 홍시로 대표되는 특별한 존재만이 전체를 자기 속에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특별한 유일자 속에서 모든 것이 나왔고, 유일자가 세상의 근원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제법무애도리의 첫 번째 문은 이문상입,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가기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내 속에 함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나 스스로도 무수히 많은 것들 속에 들어간다.
한 알의 홍시가 영글 때 거름과 강아지 똥과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은 드러나지 않고 숨죽이며 홍시에 의탁해 있다. 반대로 홍시가 떨어져 썩고, 두엄 덩어리가 되어 냄새를 풍길 때 먹음직스러운 홍시는 소리 없이 조용히 숨는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존재는 내 속에 모두를 포괄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것들 속에 비밀스럽게 들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 숨고,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와 숨는다. 여기서 ‘내 속에 너 있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나와 너는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두 몸이 아닌 상즉相卽이 되고,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나는 너 속으로, 너는 나 속으로 드나드는 상입相入이 된다.
유력과 무력의 조화관계는 존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현실 속에서도 유용한 교훈이 된다. 사람들은 늘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소리치며 대립한다. 그래서 수많은 주의와 주장이 난무하고, 서로 자기가 옳다며 대립하고 충돌한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소리를 내면 조화는 무너지고 대립과 갈등만 존재한다. 어느 한쪽은 반드시 무력無力이 되어 자기 소리를 양보해야만 타협이 되고 조화의 길이 열린다.
‘하나’와 ‘많음’이 서로 포섭하려면 한쪽은 유력이고 한쪽은 무력이 되어야 한다. 다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유력이 되면 수많은 주의주장들이 뒤엉켜 소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 합당하면 그 주장이 전면에 드러나는 유력이 되고, 다른 주장은 숨어주는 무력이 되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하나의 의견은 전체를 함축하는 또렷하고 힘 있는 소리가 된다.
그렇게 탄생한 주장은 다른 모든 견해를 배제한 독단적 주장이 아니다. 그 속에는 무수히 많은 견해들을 함축하고, 수많은 소리를 대표하게 된다. 우리가 뽑은 대표나 지도자들은 자기만의 견해를 갖고 있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유권자의 선택이 숨어 있다. 이런 이치를 수용할 때 하나와 많음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화합할 수 있다. 결국 제법무애도리를 잘 이해할 때 우리는 현실에서 조화와 공존을 만들어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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