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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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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아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3,12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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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는 『중론』에서 ‘대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승을 거론할 때 등장하는 반야, 혹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용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용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공空’을 ‘대승’이나 ‘보살’ 등과 연관지어 논 의하는 것은 이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용수를 반야사상을 계승하여 대승을 크게 일으킨 논사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승 8종파의 조사라고도 한다. 또한 잘 알려져 있듯이 대승불교에서 대승논사로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용수이다. 그 이유는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야계 경전과 대승불교

 

대승불교는 기원전후 백년 경에 성립했고 대승경전은 붓다의 사후 3, 4 백년 후에 등장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시기의 인도는 그야말로 변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불교 내부적으로는 정법正法이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인도 자재신(이슈바라신) 신앙이 확산되고 흰두교가 성립하고 있었다. 또한 고전 상키야 학파와 바이쉐시까 학파 등이 등장하며 정통 바라문의 실재론적 사유체계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인도의 각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교역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불교는 정치적으로 남북 왕조의 비호를 받았다.(주1)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하면서 불교계는 교리를 재정립하고 이를 통해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잘 봉안되어 있는 티벳대장경. 티벳 대장경은 칸규르(불설부)와 텐규르(논소부)로 이뤄져 있다. 공사상은 티벳불교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초기대승경전들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도 반야계 경전들은 ‘공空’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도의 뿌리 깊은 실재론적 사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인 원인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당시 실재론적 사유체계를 확립한 인도 정통 철학학파는, 심지어 불교내부의 실재론적 경향을 갖는 학파들조차도 인도의 주류계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오랜 역사를 통해 구축된 것이었고 그 만큼 정치하고 복잡한 사유구조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체계를 비판하고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의 발생에는 당시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맞물려 일반대중들의 요구가 깃들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정립되어 있는 체계는 진리이고 그러므로 암묵적으로 순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복잡한 교리체계에 얽매이지 않아도 자유롭게 자신의 상황에 맞는 깨달음을 찾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편으로 반야계 경전들은 존재론적인 측면의 ‘공’을 강조하였다. 당시 불교내부의 학파 중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항상 있는 것, 즉 다르마(dharma, 法)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다르마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개념일 뿐인 것과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다르마에는 고유한 성질(自性, svabhāva)이 있고 후자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고유한 성질을 갖는 것은 같은 다르마이고 그것과 다른 타자의 성질을 갖는 것은 다른 다르마이다. 고유한 성질에 의해 자신과 타자가 구별된다.(주2)

 

하지만 반야계 경전들은 다르마에도 고유한 성질이 없기 때문에[無自性] 모든 것은 공하다고 말한다. 공하다는 것은 고유한 성질이 없다는 것이고 모든 것이 고유한 성질이 없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자신과 타자, 삶과 죽음, 번뇌와 지혜 등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을 통해 생기는 집착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공이 설일체유부의 다르마를 포함해서 인도 정통 철학 학파의 실재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용수가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후 200년경에는 반야계 경전에서 말하는 ‘공’이 비존재로 해석되면서 설일체유부나 정량부 등의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비판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空은 불교의 기본 교리인 네 가지 진리[四聖諦], 붓다·붓다의 가르침 · 불교도[三寶], 행위의 선악과 그 과보, 언어관습 등을 모두 부정하게 된다고 주장했다.(주3) 용수는 이와 같은 비판에 대응하여 반야계 경전들의 공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공을 비존재로 해석하는 오류에 대해서는 초기불교의 중도설로 반박한다. 『중론』이 유일하게 인용하고 있는 초기불교경전 『상윳따 니까야』의 「깟짜야나곳따경」에는 존재와 비존재의 양극단에서 벗어난 중도를 논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이 경우의 중도는 12연기의 하나하나가 생겨나는 과정인 유전문과 역으로 하나하나가 소멸해가는 과정인 환멸문을 근거로 설명된다. 12연기중 근원적인 번뇌의 원인인 근본무지[無明]까지 소멸하여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12연기의 생성과 소멸을 존재로도 비존재로도 보지 않는 중도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은 반야계 경전과 초기불교의 실천적인 공 해석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도 이에 기반해서 보다 분석적이고 논증적인 자신의 공사상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용수가 대승불교의 아비달마를 확립한 논사로 칭송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

 

그렇다면 용수가 말하는 ‘공’의 대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모든 것은 공’이라는 말은 불교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웬만한 불교도들은 매일 암송하기도 하는 반야심경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용어도 ‘공’이다. 대승불교의 전통에 속하는 한국에서 현재 대표적인 불교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열 명 중 일곱 명은 ‘공사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불교도라고 해도 열 명 중 세 명 정도가 아닐까 싶다. ‘공’은 불교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의미는 그만큼 명확하지 않다.

 

다행히 용수의 대표적인 저서 『중론』제15장 제2게송에는 초기불교의 중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고유한 성질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원인 등의〕타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주4)

이 게송에 의하면 고유한 성질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고 정의된다. 바로 앞 게송(15.1)의 설명에서는 만들어지는 것은 사물과 현상이 직접적인 원인과 보조적인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을 말하고 타자에 의존하는 것 역시 직접적인 원인 등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조건으로 하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24.19) 그러므로 고유한 성질을 갖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無自性] 이것이야말로 반야계 경전에서부터 줄곧 말해오던 ‘공’이다. 이와 같이 고유한 성질을 갖지 않기 때문에, 즉 다른 것에 의존하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작용하고 변화할 수 있다. 오히려 공이 아니라면 어떤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의 ‘네 가지 진실’도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용수는 반야계 경전의 ‘공’에 대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설명을 한 후, 이 설명을 그 자신의 공 해석에 적용시킨다. 용수가 공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중론』제24장 제18게송은 언어적인 측면에서 대승의 공사상을 확립하는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갖가지 사물과 현상이 어떤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緣起]을 우리는 〔모두〕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緣起]은 〔어떤 것을〕 원인으로 〔어떤 것이〕 개념 설정되는 것[因施設]이고, 그와 같은 것이 중도中道이다.(주5)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구절은 어떤 것을 원인으로 어떤 것이 개념 설정되는 것이 연기이자 공이고 중도라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것은 고유한 성질이 없기 때문에 어떤 언어에 의해 어떤 개념이 상정되기도 하고 그 개념이나 언어를 통해 어떤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로 일어나는 행위 작용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활동이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길고양이’라는 말은 길고양이의 고유한 성질을 지칭하지 못한다. 만일 지칭할 수 있다면 길고양이는 결코 집고양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주)
(주1) 중관관련 저서와 논문들을 참조하였다.
(주2) 다르마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함. 『중론 : 용수의 사상 · 저술 · 생애의 모든 것』, 가츠라 쇼류/고시마 기요타카 저 · 배경아 역, 서울:불광출판사, 2018, pp.16~17.
(주3) 桂 紹隆 外 『空と中觀 』シリーズ大乗仏教 6, 東京:春秋社, 2012. 참조.
(주4) 『중론 : 용수의 사상 · 저술 · 생애의 모든 것』, 용수, 가츠라 쇼류, 고시마 기요타카 저/ 배경아 역, 불광출판사, 2018년.
(주5) 위의 책. 용수의 이와 같은 공 해석은 후에 아상가 · 바수반두의 유가행파, 불교인식론, 논리학의 디그나가, 중관학파의 바비베까 등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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