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산책]
“홀연히 세월은 번개처럼 흘러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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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제원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25회 / 댓글0건본문
절기상 한로寒露를 지나면서 금수강산을 실감한다. 해마가 반복되는 계절현상이지만,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단풍이 번지고 있다. 한국의 가을 단풍은 세계 으뜸이다. 산악 비율(70% 이상)이 높아, 수목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수종의 대규모 산림을 조성하기엔 제한된다. 대표 색상은 붉은색과 노랑, 갈색 등 3가지이다.
중국 신강성 투루판에 있는 고창고성 유적지. 폐허로 변한 유적지에서 번개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단풍 한 단어에 ‘색상色相의 스펙트럼’을 담기엔 넘친다. 익숙하진 않지만, ‘가을빛’이라 부르면 어떨까. 색깔 중립적이고 계절 체감도가 살아난다. 찾아보니 영미권은 autumn colors/tints/foliage 등으로 표현한다. 가을빛은 절기상 상강(霜降, 10/23) 무렵 절정을 이룬다. 추분(9/24) 무렵 금강산을 출발해 하루에 20km씩 남하한다. 반면 봄꽃은 30km씩 북상한다. 가을빛 미색의 조건은 우선 ‘따뜻하고 건조한 맑은 낮 시간’이 지속돼야 한다. 그리고, 기온이 7℃ 이하인 밤이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한 밤에 얼음이 얼지 않아야 고운 빛을 낼 수 있다.
추풍급秋風急 추상고秋霜苦,
세월간歲月看 간향모看向暮,
가을 바람 드세지고 가을 서리 매서운데,
세월을 살펴 보니 점차 저물어감이 보이네,
군목락群木落 사산황엽四山黃葉
송균독창창松筠獨蒼蒼.
나무들은 낙엽지고, 사방의 산은 노랑 잎으로 뒤덮였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홀로 푸르건만,
인간사人間世 능기세能幾歲,
홀홀광음전서忽忽光陰電逝.
인간은 능히 얼마를 살겠는가!
홀연히 세월은 번개처럼 흘러가네.
수맹성須猛省 세사량細思量,
무나일몽장無奈一夢場.
모름지기 맹렬히 살피고 자세히 생각해야만,
한 바탕 꿈을 다시는 꾸지 않으리.
- 혜심(1178~1234), 물시계[更漏子]
‘물시계’는 운문의 장르 가운데 사詞에 속한다. 사는 노랫가사, 즉 곡자사曲子詞의 약칭이다. 시가 율시 등으로 정형화되면서 음악과 분리된 뒤 탄생했다. 송대宋代에 가장 유행했고, 원과 명을 거쳐 청대에 부흥했다. 별칭이 10여 가지에 이른다. 악부樂府, 신성新聲, 여음餘音, 별조別調, 장단구長短句, 시여詩餘, 의성倚聲, 전사塡詞 등이다. 새로운 노랫가사 내지 자유로운 창작형식의 운문을 뜻한다.
곡사曲詞의 흥취를 보면, 시공과 색감의 대비가 뚜렷하다. 먼저, 가을바람과 서리, 노을이 흐르는 공간을 그리고, 노랑[黃葉]과 청록[松筠]의 색채를 더했다. 해와 달, 즉 시간과 세월이 번개처럼 지나가는데, 백년 안쪽 ‘인생 수명’은 탄지경彈指頃 찰나와 다르지 않다. 한바탕 꿈에 비유했다. 돌이켜보니, 짧은 인생에 깨달음을 위한 발심이 선다. 보다 더 깊이 성찰하고,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권세와 재력은 물론 탐진치가 판치는 세상을 넘어서야 한다.
심심십이제경률甚深十二諸經律
도유백가제자술道儒百家諸子述
깊고 깊은 모든 경전과 계율,
도가와 유가 제자백가의 저술
세여출세제법문世與出世諸法門
진종저리이연출盡從這裏而演出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문,
그 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펼쳐져 나왔네!
여피대허무불괄如彼大虛無不括
역여일월편진찰亦如日月遍塵刹
저 큰 허공과 같이 감싸지 못하는 것이 없고,
또한 해와 달처럼 온 우주에 두루한다.
막간치소여존비莫問緇素與尊卑
총향피중동사활捴向彼中同死活
승려와 속인, 존귀한 이와 비천한 이를 불문하고,
모두 그 가운데서 죽고 사는 것이라.
- 함허 득통(1376~1433), 지혜의 노래[般若頌]
고대와 중세 등 현대 이전 국가에선 ‘책 그 자체가 권력’이었다. 동서양이 동일하다. 특히, 경전과 『바이블』 등은 왕실과 관청, 종교시설에서만 사용했다.민간 접근을 철저히 통제해 일반 백성은 볼 수조차 없었다. 목적은 통치수단 때문이다. 대표 사례가 면죄부이다. 『바이블』엔 단어 하나도 없지만, 구매하지 않으면 천당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이 『바이블』에 기록돼 있다고 속여 돈을 벌었다. 종교권력이 낳은 문맹文盲 구조의 모순이자 착취와 억압이 아닐 수 없다.
종이가 없던 시대에 경전은 목간과 죽간에 쓰고 새겼다. 내용은 우주자연의 인식과 함께 도덕과 규정, 법률 등을 담았다. 자형字型 원리를 보면 보다 쉽게 다가온다. 경經은 물줄기와 같이 세로로 곧게 뻗은[巠] ‘죽간’ 등을 엮은 것이고, 전典은 제사상에 바쳐 놓은 기록물 모양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경전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함허 선사는 반야송에서 외친다. “그 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펼쳐져 나왔네!” ‘여기’가 어딘가? 공空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 대기를 수용하고, 지구뿐 아니라 해와 달에 두루 존재하고 있다. 모든 상황이나 상태를 만들고[演出], 스스로 존재한다. 물론 세상 계급에 구속되지 않고, 생로병사를 초월한다. ‘여기這裏’ 그 자체도 존재케 하는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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