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종교와 불교의 미래]
사제팔정도, 비율법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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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11 / 조회1,488회 / 댓글0건본문
지난번에는 부처님의 성불 체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성불 체험 후 보리수 밑에서 7일(혹은 49일)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코브라가 와서 그의 몸을 감싸주고, 그 머리를 부처님의 머리 위에 두어 햇빛과 비를 가려주었습니다.
망설임
부처님은 자기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한 후 사람들 속으로 돌아감의 망설임(refusal to return)은 위대한 정신적 영웅들이 겪는 일종의 공통적 현상입니다. 부처님의 경우 망설이게 된 이유는 일반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바쁜데 그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이야기한들 관심을 가지지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진리가 너무나도 심오하고 고매해서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돕겠다는 옛날 자신의 서원을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하늘의 브라흐마 신이 와서 제발 그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부처님 자신도 연못에 있는 세 종류의 연꽃을 보았는데, 첫째는 물 위에 올라와 아름답게 피어 있고, 둘째는 흙탕물 표면에 나왔다가 잠겼다 하고, 셋째는 흙탕물 아래에 잠겨 있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속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속세로부터 자유스럽고자 애쓰는 사람, 속세에 완전히 빠져 자유니 뭐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세 부류가 있을 것으로 보고 둘째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가서 가르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다섯 친구
그러면 누구에게 가서 가르칠까? 부처님은 우선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두 스승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안佛眼을 통해 그들이 이미 천상에 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함께 고행하던 다섯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베나레스, 지금의 바라나시 외각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이라는 공원에서 고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습니다.
다섯 친구들은 멀리서 부처님이 오는 것을 보고 오더라도 고행을 포기한 친구를 모른 척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올수록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시하려던 마음이 자신들도 모르게 바뀌어 모두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고 발 씻는 물을 떠오는 등 따뜻이 맞아들였습니다.
영적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은 영적으로 깨친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나 빛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모세도 시내 산에서 아훼 신을 만나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너무 빛나 눈이 부시니 좀 가려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화에 보면 예수님 머리 주변으로 후광이 둘러쳐져 있고, 많은 불상 배경에 불꽃이 함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따뜻한 영접을 받은 부처님은 자기를 더 이상 고타마 혹은 친구라 부르지 말고 그 대신 여래如來(타타가타)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위해 설법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라는 것입니다.
사제,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사제四諦’란 ‘네 가지 진리’라는 뜻입니다. 한자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 하고, 영어로는 ‘The Four Noble Truths’라고 합니다.
첫째 진리 고제苦諦는 삶이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duḥkha라고 하는데 기름이 들어가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수레바퀴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림을 뜻한다고 합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生老病死],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해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존재 자체의 괴로움[五蘊盛苦]. 이를 일러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합니다. 괴로움은 육체적이나 심리적 혹은 정신적 요인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생래적 한계, 인간의 조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둘째 진리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에 대한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목마름(tṛṣnā)’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 애착, 집착, 정욕, 탐욕 등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진리 멸제滅諦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만 거기서 해방될 수 있다는 위대한 해방 선언입니다. 이처럼 괴로움에서 해방된 상태가 바로 열반,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nirvāṇa)란 욕망의 불꽃을 훅하고 불어 끈 상태, 그리하여 시원함과 평온함을 느끼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보통 열반을 죽은 후에 들어가는 장소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열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다가 산꼭대기에서 짐을 내려놓았을 때의 홀가분함, 자유스러움과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넷째 진리 도제道諦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이 있다고 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 길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영어로 ‘The noble eightfold path’라고 합니다. 여덟 가지 길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덟 겹의 길, 하나의 길에 여덟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제의 특성을 들라면 그것이 하늘의 계시 같은 초자연적 근원에 의지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삶을 깊이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진리라는 것입니다. 사제를 의학적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고제와 집제는 진단에 해당되고, 멸제와 도제는 처방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위대한 영적 의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팔정도, 여덟 겹의 길
여덟 겹의 길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정견正見: 부처님의 가르침을 옳게 보고 받아들이는 것, ② 정사正思: 자기를 비우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해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거짓말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사람 사이에 불화를 가져올 말을 하지 않는 것, ④ 정업正業: 살생, 훔치기, 음행을 금하는 것, ⑤ 정명正命: 생명에 해를 주지 않는 직업을 택하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 건전하지 못한 마음 상태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그런 마음 상태가 이미 생겼으면 없애도록 노력하고, 건전한 마음 상태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겼으면 더욱 잘 가꾸도록 하는 것, ⑦ 정념正念: 몸의 움직임, 감각이나 감정, 마음의 움직임, 개념이나 생각 등에 대해 마음을 다해 지켜보는 것, ⑧ 정정正定: 마음을 한 곳에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중 ①과 ②를 합해 ‘혜慧’라 하고, ③, ④, ⑤를 합해서 ‘계戒’라 하고 ⑥, ⑦, ⑧을 합해 ‘정定’이라고 하여 이 세 종류의 가르침을 계정혜 ‘삼학三學’이라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짚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③에서 정어, 바른 말이라고 할 때 비록 거짓이 없는 말, 이른바 팩트를 말하더라도 그것이 둘 사이에 불화를 가져오는 말이라면 옳은 말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특히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계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⑤에서 정명, 바른 직업에서 전통적으로는 도살업이나 무기상이나 독물 거래상 등 생명을 해치는 직업은 바른 직업일 수 없다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바른 직업이라 여겨지는 의사직이나 변호사직도 그것이 사람들의 아픔이나 곤경을 이용하여 오로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옳은 직업일 수 없을 것입니다. ⑦의 정념은 현재 영어로 mindfulness라고 번역하는데, 베트남계 틱낫한 스님을 통해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수행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국어로 ‘마음 다함,’ ‘마음 챙김’으로 번역됩니다. ⑧의 정정은 산스크리트어로 samādhi로 독서 삼매라고 할 때의 ‘삼매三昧’입니다.
비교종교학적 관찰
일반적으로 여러 종교에서도 거짓말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하는 등 계율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렇게 계율을 지키면 금생이나 내생에 거기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렇게 초월자나 심판자가 주는 상벌을 염두에 두고 계율을 지키는 태도를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팔정도에서 말하는 계율은 상벌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상과 관계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심판자나 초월적 존재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율법주의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계율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기 위한 준비 작업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율법적 접근, 영어로 humanistic approach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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