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세상 읽기]
무한한 자비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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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93회 / 댓글0건본문
“한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물었다. ‘오래전부터 조주의 돌다리가 유명하다기에 막상 와 보니 그저 간단한 외나무 다리가 아닙니까?’ 조주 화상이 대답했다. ‘너는 간단한 외나무 다리만 보고 돌다리를 보지 못하느냐?’ 스님이 ‘그 돌다리는 어떤 겁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 화상이 답했다. ‘나귀도 건너가고 말도 건너가지.’”(주1) (『벽암록』 제52칙)
논산 대건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당시 종교과목이 있었다. 천주교 교리를 주요하게 설명한 교과서의 맨 앞장에 ‘동양종교’를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마호메트교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호메트교를 제외한 불교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정의했다. 교과서는 첫째 절대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내세관이 존재해야 종교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유교는 철학이며, 내세관은 있으나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있는 불교는 오히려 철학 쪽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부처님을 신적神的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나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정의에 호기심이 끌렸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존재인가?” 학교 도서관에서 『석가모니-상 · 하』를 빌려 읽었다. 출판사나 지은이는 지금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당시 읽은 『석가모니-상 · 하』는 모든 것이 경이로움이었고 사상적 충격이었다. 그 때 이후 읽은 수많은 부처님 일대기 어느 것도 당시 그 책의 내용과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 책은 초기불교에 기초해 일대기를 정리한 것이었다. 신격화가 없는 순수한 고타마의 일생은 가장 인간적이면서 뭉클한 감동을 나에게 던져줬다. 당시 읽었던 부처님 일대기와 청소년 시절 보았던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동 · 서양의 철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를 읽고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올해로 헤르만 헤세가 세상을 떠난 지 56년, 그도 싯다르타의 삶에서 자신을 각성시키는 어떤 계기를 찾았으리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헤세를 변화시킨 강렬한 메시지는 ‘평화’와 ‘용서’가 아니었나 싶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헤세의 조국이다. 그는 세계대전을 모두 지켜 본 인물로서 말한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뿐이다.” 전쟁을 반대한 그에게 독일은 매국노라는 지탄을 퍼부었고 그의 책을 판매 · 출판금지 시켰다. 그러나 세상은 인도주의의 새 지평을 연 그에게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헤세의 각령覺靈을 일깨운 불교. 신학자의 집 안에서 태어난 헤세에게 불교의 무엇이 영향을 끼쳐 소설 『싯다르타』를 쓰게 만들었을까? 불교는 기원 전 고대사회에서 출현한 종교로 강력한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붓다가 다른 스승들과의 차이는 그의 심원한 열정과 만민에 대한 박애정신에 놓여있다.” 영국의 불교학자 토마스 윌리엄 리즈 데이비스(Thomas William Rhys Davis. 1845~1922)는 부처님의 특징을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데이비스의 말처럼 중생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무한한 사랑이 부처님의 정신이다. 지극한 연민과 무한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바로 ‘용서’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성을 갖는다면 ‘용서’로 대별할 수 있다.
경전에 나오는 살인마 ‘앙굴리마라’도 부처님에겐 용서의 대상이었다. 앙굴리마라는 외도外道의 꾀임에 빠져 99명의 목숨을 앗은 살인마였지만 부처님은 그를 용서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당시 부처님은 앙굴리마라를 받아들일 때 “국법(국가)이 버리는 자라도 정법(불교)은 이를 넉넉히 포섭한다”고 해 무한정의 용서를 표현했다.
이교도 장자 ‘아일다’에 대한 용서도 깊은 인상을 준다. 하나라성에 아일다라는 부자의 아들이 있었다. 아일다는 어머니와 통하고 아버지를 죽였다. 어머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자 어머니를 죽였다. 살인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라한 친구도 살해했다. 그 후 아일다는 기원정사에 출가를 원했다. 그러나 대중은 ‘삼역죄三逆罪’를 범했다 하여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역죄란 부처님을 살해하려 한 데바닷타에게 적용시킨 죄목이다. 첫째 ‘파화합승破和合僧’으로 부처님의 교단을 나와 분파활동을 함으로써 교단을 분열시킨 죄, 둘째 출불신혈出佛身血로 산꼭대기에서 큰 돌을 굴려 부처님의 발가락에 피가 나게 한 죄, 셋째 살아라한殺阿羅漢으로 부처님을 위험하게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연화색비구니蓮華色比丘尼를 주먹으로 때려죽인 죄를 말한다.
대중은 아일다에게 삼역죄를 적용해 교단의 입문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러자 아일다는 점점 노해져 승방에 불을 지름으로써 무고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다. 이후 왕사성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가 출가를 간청했다. 대중들이 아일다의 범죄를 들어 극구 반대했으나 부처님은 그를 용서하고 진리의 설법을 펼쳐 제자로서 품에 안았다.
부처님은 또 음식에 독을 타 당신과 제자들을 살해하려던 장자 ‘시리굴’도 용서했다. 시리굴을 국법으로 처단하겠다는 아사세왕을 설득해 시리굴을 정법으로 인도하는 무한한 자비심을 펼쳐 보이신 부처님에게 ‘용서’는 한정된 그릇이 없었다. 용서의 전제 조건이나 단서가 없었다는 얘기다.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 용서의 장면에서 부처님의 무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벽암록』 제52칙에 등장하는 조주의 ‘돌다리’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주의 선적 지도력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지만 신분과 전력을 따지지 않고 선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는 조주의 넓은 포용력으로도 해석된다. 조주는 제방의 선지식을 편력하면서 “일곱 살짜리 아이라고 하더라도 나보다 나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청할 것이며, 백세의 늙은이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칠 것이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구도의 편력 앞에서는 왕과 신하, 젊음과 늙음, 지연과 혈연 따위는 작용하지 않았다. 조주선사에게 분별심은 없었다. 따라서 용서하고 이해할 대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주의 ‘돌다리’는 그러므로 누구나 건널 수 있는 길이다. 죄가 있다고 해서 제지되거나 차별받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선문이며 차별 없는 평등의 세계다.
그러기 위해선 용서가 전제돼야 한다. 온갖 지천과 강물이 자연스럽게 바다로 흘러들어오듯이 사해중생이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 용서는 그 장벽을 허무는 기능이다. 진정한 상생과 참된 공동체는 차별이 없어야 이루어진다. 만일 용서가 없다면 상생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에는 용서에 인색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불교계에서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논리를 앞세워 단죄를 먼저 주장하는 불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그래야 사회정의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되었을 때 재야불교단체들이 앞장서 체포조를 결성하고 백담사로 몰려 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뿐만 아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의 비리나 범죄행위가 드러났을 때도 불교계 일부에선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고 나선다. 물론 이를 잘못됐다고 탓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사회변혁의 운동논리에도 용서의 정신이 바탕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용서가 없는 사회는 진정한 화합과 소통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시민운동이든 노사문제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어느 누구든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긴다면 세상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무한의 자비, 즉 보살의 마음은 용서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조주의 ‘돌다리’를 건너는데 차별이 있어선 곤란하다.
(주1) “擧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彴.’ 州云: ‘汝只見略彴 且不見石橋’ 僧云: ‘如何是石橋.’ 州云, ‘渡驪渡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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