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중관中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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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아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3,107회 / 댓글0건본문
용수는 기원후 2세기경 남인도에서 활약했던 저명한 불교 논사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은 중관학파와 유가행파를 중심으로 거의 모 든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관학파는 『중론』에 나타나는 사상을 계승하고 따르는 학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중관학파의 ‘중관’이라는 말은 용수의 핵심적인 사상이자 『중론』의 중심 주제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중관’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수록 대승불교의 출발점이자 중심에 서 있는 용수의 사상이 더 분명하게 밝혀진다.
중관 - 중도의 통찰
그러나 『중론』을 포함한 용수 시대의 문헌들 중에는 중관이라는 말이 등 장하지 않는다. 우선 중관학파라는 명칭은 중국의 경우, 7세기경 당나라 의정(義浄, 635~713)이 지은 『남해기귀납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대승에는 중관학파와 유가행파만 있었고 그 중 중관학파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공空이라고 보는 학파이다. 한편 인도에서는 6세기경 청변(淸辯, 490~570경)이 『중론』의 주석서인 『반야등론』에서 처음 중관학파에 해당하는 말을 사용하였다. 다만 이 경우에는 원래의 범어용어인 마디야미까Mādhyamika, 혹은 마디야마까 바딘Madhyamaka-vādin이 정확히 중관학파의 의미로 번역되지는 않는다. 전자는 ‘중中’을 나타내는 ‘마디야Madhya’에서 파생된 말로 ‘중도中道를 논의하는 논서’, ‘중도설’, ‘중도를 논의하는 자’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중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관’의 ‘중’은 중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바비베까는 『중관심론』의 주석서인 『사택염』에서 ‘중’은 존재와 비존재의 양 극단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여기에서 말하는 ‘중’이 초기불교의 중도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반야등론』에 대한 복주를 지은 인도의 논사 아발로끼따브라따(8세기경)는 그들 자신을 ‘대승중도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주1)
미얀마 인레호수 고양이 사원의 불상
이와 같이 바비베까와 그 이후의 주석가들은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을 계 승하는 학파라는 자각이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중론』에 나타나는 중 도설을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의식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미 널리 알려져 통용되고 있는 이상 ‘중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중도의 통찰’이 될 것이다. 또한 『중론』의 핵심개념인 이 중도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양극단에서 벗어난 중도’에 기반하고 있다.
‘양극단에서 벗어난 중도’의 의미는 『중론』의 제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래의 범어제목을 직역하면 『근본중송Mūlamadhyamakakārikā』이 되는데 이 또한 근본이 되는 ‘중’, 혹은 ‘중도’에 관해 논의하는 게송이라는 의미이 기 때문이다. 티벳에서는 반야계 경전들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근본반야 론이나 반야론 등으로 언급하기도 하였지만 인도의 주석가들은 ‘중도에 관 해 논의하는 논서’라고 하였고 한역으로도 『중론』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중론에서 말하는 중도란 무엇인가? 『중론』제15장 7게송을 보면 용수의 중도론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無]을 잘 아는 세존(世尊, 붓다)은 「까띠야야나kātyāyana를 가르치고 훈계함[教誡]」 중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어느 쪽도 부정하셨다.(주2)
이 게송은 『중론』에서 초기경전의 내용을 언급한 유일한 부분으로 존재 와 비존재의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것, 즉 초기불교의 중도를 말하고 있다. 양극단의 예로 존재와 비존재를 언급한 것은 붓다가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에서 벗어난 중도를 설했기 때문이다. 용수는 자신이 말하는 중도는 다름 아닌 ‘붓다의 말[佛說]’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정통성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붓다는 실천수행에 장애가 되는 양극단뿐만 아니라 온갖 형이상학에서 발생하는 양극단의 사고마저도 깨뜨렸다. 용수는 자신도 붓다와 마찬가지로 생성과 소멸, 동일함과 다름 등 어떤 종류의 양극단이든 그것을 부정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와 관련된 보다 상세한 설명이 『상윳따니까야 · 깟짜야나곳따경』에 나 온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을 벗어나는 것이 중도이고 그 중도란 바로 12연기十二緣起이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양극단에서 벗어난 중도가 바로 12연기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중론』에서는 중도가 12 연기를 가리킨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업과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12연기의 각 지분을 근원에서부터 차례차례 소멸하여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환멸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해석 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주3) 다만 12연기의 실천수행적인 측면을 별 도로 두고 『중론』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중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론』제24장 18게송에 의하면, 연기란 어떤 것을 원인으로 어떤 것이 개념적으로 설정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중도이다. 즉 초기불교의 ‘양 극단을 벗어난 중도’를 계승하면서도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에서 벗어난다는 실천 수행의 관점이나 존재와 비존재의 양극단에서 벗어난다는 존재론적 인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적인 측면의 양극단에서도 벗어난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도 - 오래된 거울에 비치는 것
언어적인 측면의 극단이란 언어는 대상을 지칭할 수 있다는 주장과 언어는 어떤 경우에도 대상을 지칭할 수 없기 때문에 무용하다는 주장의 양극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전에 익힌 언어관습에 의해 어떤 것, 예를 들면 ‘회색고양이(A)’를 인식하지만 그 언어에 의한 인식은 개념적으로 상정된 것일 뿐 지금 눈앞에 있는 ‘회색고양이(A)’를 있는 그대로 지칭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지칭하고 있는 언어는 예전에 그 ‘회색고양이(A)’와 유사한 ‘회색고양이(A)’를 지칭한 적이 있는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언어도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한 마리의 회색고양이를 지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어로 지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회색고양이(A)’는 우리에게 인식될 것인가.
예를 들어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치는 것이다. 거울이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비추어 보기 위함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거울이 없다면 어떻게 ‘나’를 비추어 볼 것인가? 비유하자면 붓다의 언어,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거울이다. 비록 거울이 낡고 오래되었을지라도 그것에 비추어진 ‘나’는 현재의 ‘나’이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나’이다. 순전히 언어에만 국한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언어는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고 내 앞에 있는 어떤 거울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순간 생겨난 것이 아닌 이상 오래된 거울[古鏡]이다. 그 오래된 거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언어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다. 『중론』은 그 오래된 거울에 자신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비추어 보라고 말하고 있다.
주)
(주1) 八力 広喜, 「「中論」と中観派」 『印度学仏教学研究』29 巻 2 号, 1981, pp. 556∼559 ; Jaideva Singh, 『An Introduction to Madhyamaka Philosophy 』, 1976; 桂紹隆 etc., 『空と中觀 』(シリーズ大乗仏教 6), 東京 : 春秋社, 2012 등 수많은 논문에서 ‘중관’의 ‘중’은 중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주2) 가츠라 쇼류/고시마 기요타카 지음 · 배경아 옮김, 『 중론 : 용수의 사상 · 저술 · 생애의 모든 것 』, 서울:불광출판사, 2018, p.81.
(주3) 특히 위 책의 공저자 고시마 기요타카와 마쓰모토 시로에 의하면 『중론』의 연기는1 2연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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