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의 미감과 마투라의 미술(1)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불상의 세계]
인도인의 미감과 마투라의 미술(1)


페이지 정보

유근자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23회  /   댓글0건

본문

고대인도미술의 중심지, 마투라(Mathura) 

 

마투라는 갠지스강의 한 지류인 야무나강 서쪽 언덕인 중인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북방 이민족인 쿠샨족이 건립한 쿠샨(Kushan) 제국(30-375)의 남쪽 지역에 해당하며, 간다라 미술이 꽃핀 서북인도와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연결하고, 해로(海路)를 통해 서아시아와 지중해로 통하는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사진 1). 

 


사진1 . 쿠샨제국의 간다라와 마투라 

 

교역과 통상의 중심지였던 마투라는 종교가 번성한 곳으로도 유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83년경-168년경)는 마투라를 ‘신들의 마을’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방세계에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크리슈나 신앙의 성지이기도 하며, 불교 및 자이나교와 관련된 미술품이 많이 제작된 고대 조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마우리야 왕조(기원전 322~기원전 185) 때부터 민간신앙의 남신인 약샤(Yaksha)와 여신인 약시(Yakshi) 그리고 뱀신인 나가(Naga) 등의 조각상들이 이곳에서 활발하게 조성되었는데, 쿠샨시대에는 부를 축적한 왕과 상인계층의 지원을 얻은 불교와 자이나교에서 상(像)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마투라 미술의 특징은 재료와 표현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서북인도인 간다라에서는 검은 빛이 나는 편암을 사용했고, 인체 표현을 사실적으로 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붉은 빛이 나는 사암을 사용했으며, 요가 수행으로 온 몸에 생기가 넘치는 원만한 인체 표현을 선호했다.

 

인도미술 연구의 선구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 

 

기원 전후 1세기 경에 불교미술에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는 바로 불상의 탄생이다. 인도 고대미술의 연구에서 불상의 기원 문제는 논쟁이 되어 왔는데,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에서 성장한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표적인 학자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서북인도인 간다라에서 불상이 창안되었다는 ‘불상의 간다라 기원설’을 주장한 알프레드 푸쉐(A. Foucher, 1865-1952)이다. 이와 달리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것은 불교 내부의 사상적 변화와 함께 전통의 신(神)인 약샤(Yaksha) 상을 조성한데서 간다라와 같은 시기에 인도 본토인 마투라에서 비롯되었다는 ‘불상의 인도 기원설’을 주장한 학자가 있다. 바로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 1877-1947, 사진2)이다.

 

 

사진2. Ananda Coomaraswamy, 출처 : Wikipedia

 

 

그는 1877년 현재의 스리랑카 타밀족 명문 집안에서 아버지 무투 쿠마라스와미(Muthu Coomaraswamy)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대 중반에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올 때까지 영국에서 성장기를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런던의 유니버시티 대학(University College)에서 지질학과 식물학을 전공한 후 1906년에 런던대학에서 광물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스리랑카로 돌아온 후 광물 탐사에 열중하다가 점차 인도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인도미술에 관한 저서를 발간했다. 1917년에 보스턴미술관의 인도미술 큐레이터 직을 맡으면서 미국으로 이주한 후 인도미술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 가운데 1928년과 1932년 두 번에 걸쳐 <약샤(Yakṣas)>를 출판했다.

 

쿠마라스와미는 서양인 중심의 인도미술 연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도의 독자적인 출발을 강조하였다. 특히 서양미술의 영향으로 불상이 창시되었다는 간다라 기원설을 반박하는 논문인 “불상의 기원(The origin of the Buddha Image)”을 1927년에 Art Bulletin에 발표하였다. 

 

민간신앙의 남신 약샤와 여신 약시

 

인도에는 아리아들이 인도에 들어오기 이전인 인더스 문명기부터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인도 본래의 토양 속에서 성장한 민간신앙이 존재했다. 신성한 나무에 거처하는 정령으로 알려진 약샤와 약시는 일찍부터 인도의 서민 사이에서 신앙되었다. 불가사의한 힘과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병을 치료하고 아들을 낳게 해주며, 재물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서 일찍부터 숭배되었다. 마우리아 왕조 이전부터 상으로 조성되어 사당 안에 모셔져 사람들의 공양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석가여래의 일대기에서도 약샤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는 에피소드가 전하고 있다. 싯타르타 태자를 안고 약샤를 모신 사당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앞으로 부처님이 될 것을 직감한 약샤가 먼저 싯타르타 태자에게 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진3. 위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Kubera, 남신 Yaksha, 여신 Yakshi 


사진4. 술 취한 여신 Yakshi  

 

중인도의 인체 표현은 헬레니즘의 영향이 강했던 서북인도인 간다라와 큰 차이가 있다. 인체의 양감을 한껏 살린 표현법을 선호했는데 <사진3>에서 보다시피 근육질의 몸이 아니라 둥글둥글하며 탄력적인 신체이다. 둥굴고 큰 배를 가진 약샤는 인도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재물을 담당하는 재보신(財寶神)인 쿠베라(Kuber)로, 북방을 지키는 방위신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커다란 배를 가진 포대화상(布袋和尙)도 쿠베라 모습과 유사하다.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의 ‘술취한 약시’는 흥미를 끈다. 앞면과 뒷면에 모두 조각이 된 이 작품은 쿠샨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술에 취한 여신의 모습은 여신이 가진 관능적인 표현과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풍성한 가슴과 성기를 가리지 않은 채 허리에만 장식이 달린 띠를 두르고 있는 점에서 한층 관능미는 두드러진다. 

  

다산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약샤와 약시상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는 단독의 조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탑의 출입문인 탑문(塔門)과 탑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난순(欄楯)에 배치하였다. 불탑에 수용된 가장 유명한 약시상은 보팔(Bopal)에 있는 산치(Sanchi)대탑 탑문의 것인데, 나무 아래에 서 있는 관능적인 여신의 모습은 인도 문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상당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쿠샨제국의 두 황제, 비마 탁토(Vima Takto)와 카니슈카(Kanishka)

 

인간의 형상을 한 불상을 조성하는데 인도 전통의 신인 약사와 약시상을 만들던 기법에서 자연스럽게 유래했을 것이라는 것이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불상의 인도 기원설’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조성하는데 모델은 누구였을까. 이에 대해 왕의 초상이 불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불상이 탄생한 간다라와 마투라는 쿠샨제국의 영역 안에 있던 서북인도와 중인도의 두 지역이었다. 쿠샨제국의 왕들은 자신의 초상을 새긴 동전과 조각을 남기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투라 지역의 마트(Mat) 신전에서 발견된 비마 탁토와 그의 손자 카니슈카의 초상 조각이다(사진4).

 

비마 탁토의 초상 조각은 그동안 카니슈카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비마 카드피세스(Vima Kadphises)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의 연구에 의해 비마 탁토상임이 밝혀졌다. 이 두 조각상이 주목되는 것은 서북인도의 간다라 양식도 아니고 재래의 마투라 양식도 아닌 독특한 양식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이란미술의 영향이다.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사자좌에 앉은 비마 탁토는 허리에 벨트를 맨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짧은 튜닉(tunic)을 입고 있으며, 유목민의 상징인 장화를 신고 있다. 복장은 유목민인 쿠샨족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표현기법은 인도 전통식과 이란식을 혼용하고 있다. 

 


사진 . Vima Takto (좌)와 Kanishka (우)  

 

카니슈카상은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허리띠를 매고 있으며 투박한 장화를 신고 왼손으로는 긴 검을, 오른손으로는 대해(大海)에 사는 신령스런 동물인 마카라(makara)가 새겨진 긴 곤봉을 잡고 서 있다. 외투의 아래 부분에는 “왕 중의 왕 카니슈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거운 외투를 입은 카니슈카왕의 모습은 얇은 옷을 입는 중인도의 복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 

  

두 황제의 초상은 얼굴 부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표정을 살필 수는 없으나, 동전에 새겨진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턱수염이 나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만한 몸을 가진 약샤와 약시 그리고 쿠샨제국 왕의 초상을 만들 수 있었던 조각 전통을 가진 마투라에서는, 인간 모습을 한 부처님을 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유근자
「간다라 불전도상佛傳圖像의 연 구」로 문학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전공 초빙교수,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 저서에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 연구』, 공동 저서로 『치유하는 붓다』·『간다라에서 만난 부처』 등이 있다.
유근자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