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이야기]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유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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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89회 / 댓글0건본문
1. 유식무경이란 인식識만 있고 인식 외부의 대상(境)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 밖의 대상을 만날 수는 없고 우리가 만나는 대상은 이미 마음 안에 인식되어 있는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삼성(三性.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도 마음 안에 인식되어 있는 대상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존재방식이 된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알아차리는 모든 것들은 이미 ‘수동적으로’ 마음에 인식되어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어떤 대상에 ‘능동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말하거나 분별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이미 ‘수동적으로’ 마음에 ‘인식’되어 있는 것을 사후적으로 ‘재-인식’(해석적으로 분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현상학에서는 이미 수동적으로 어떤 것들을 인식하고 있는 마음을 선先-반성적 의식(수동적 지각)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마음에 인식되어 있는 것들 중의 어떤 것에 마음이 능동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리는 것을 반성적 의식(능동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반성적 의식은 선-반성적 의식을 재-인식할 수 있을 뿐, 선-반성적 의식에 의해 인식되기 이전의 대상, 이른바 외부 대상[外境]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모든 대상은 ‘간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상학은 반성적 의식을 통해 선-반성적 의식을 반성하면서, 선-반성적 의식 안의 주관 작용과 ‘내부 대상’[內境]을 분석하고 서술함에 의해, 주관의 구조와 대상의 구조를 해명한다.
그런데 일반인은 그렇게 분석되고 서술되는 주관과 대상이 선-반성적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반성적 의식 외부에, 곧 선-반성적 의식과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세계 속에서 자아와 사물로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이런 일반인의 믿음을 현상학에서는 ‘맹목적 객관주의’나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일반정립’이란 ‘모든 것이 자립적으로 있다고 판단함’을 말한다.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은 자아와 대상이 나의 반성적 의식과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에 해당한다.
2. 그런데 선-반성적 의식이 성립하려면, 여하튼 이 의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먼저 자아와 사물이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당연히 긍정적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 태도가 이른바 ‘자연적 태도’이다. 이런 태도 속에는 이미 ‘일반정립’이 놓여 있다. 그러면 결국 의식은 의식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반성적 의식은 선-반성적 의식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것은 서양 근대 경험론의 인식론적 탐구의 결론이고, 이 결론은 칸트에 의해 수용되었고,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롯한 모든 현상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것은 현상학의 제1의 진리이다.
현상학의 제1의 진리를 납득함에 있어서는 의식이라는 말의 독일어적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의식은 독일어로 ‘베부스트자인’Bewusstsei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원적으로 ‘베부스트-자인’bewusst-sein이다. 여기서 ‘베부스트’는 ‘알고 있는’과 ‘알려진’을 함께 의미한다. 그래서 ‘베부스트-자인’은 ‘대상을 알면서-있음’과 ‘대상이 알려진 채로-있음’을 함께 의미한다. 이런 어원적 의미에 따르면, 의식과 대상은 이미 서로 만난 채로 머물고 있다. 이렇게 만난 채로 머물러 있음을 현상학에서는 ‘지향성’(Intentionalität, 의식은 대상을 지향한 채로 있음)이라는 말이나 ‘어떤 것에 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 의식은 항상 어떤 것에 관한 의식임)이라는 말로 표시한다.
베부스트-자인’이란 독일어로 보면, 의식과 대상의 만남이 이뤄져 있는 영역이 바로 의식이다. 그런데 의식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대상을 마주하는 (대상의) 상대자(주관)가 아니라, 대상을 포괄하고 있는 (대상의) 포괄자이다. 주관과 대상은 모두 의식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이른바 ‘주관’(견분, 見分)이 아니고, 그래서 ‘대상’(상분, 相分)의 상대자도 아니다. 의식은 주관과 대상(객관)의 포괄자이고, 주관과 객관은 다만 의식의 구성요소들이다. 이 구성요소들은 반성적 의식이 선-반성적 의식을 반성할 때에 알려지는 것들이다. 이는 8식八識이 각각 자기 안에 견분과 상분을 갖고 있다고 보는 유식학의 견해와 유사하다. 현상학은 유식학과 마찬가지로 꽤나 복잡하게 논의를 전개하지만, 그 둘은 논의 주제와 논의 내용에 있어서 매우 유사하다. 특히 현상학의 제1의 진리가 유식학의 제1의 진리(유식무경)와 상통한다. 이런 까닭에, 현상학은 종종 현대적 유식학이나 서양적 유식학이라고 불린다.
3. 유식학에서 장식藏識이니, 전7식이니, 종자니, 현행이니, 견분이니, 상분이니 하는 것들은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반성적 의식에 의해 선-반성적 의식을 반성하고 분석하고 서술함에 의해 얻어진 결과물들일 뿐, 선-반성적 의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선행적으로 존재해하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다. 반성을 중단하면, 달리 말해 선-반성적 의식만이 유지되도록 하면, 종자니, 현행이니, 견분이니, 상분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
선-반성적 의식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차별 없이 단지 현존(現存, wesen)할 뿐인데, 이런 존재방식이 원성실성이다. 반성적 의식을 통해 선-반성적 의식 속의 하나의 존재자를 알아차릴 때, 이것이 법계연기法界緣起 속의 다른 존재자들과 상입(相入, 상호침입)하고 상즉(相卽, 상호접속)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의타기성이다. 반성적 의식을 통해 선-반성적 의식 속의 하나의 존재자를 알아차릴 때, 이것이 나에 대해 이로움과 해로움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변계소집성이다.
달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선-반성적 의식 속의 경계의 성품이 원성실성이다. 반성적 의식에 의해 선-반성적 의식을 반성하는 것이 이른바 분별이다. 1차적 분별은 경계를 그 전체성에 있어서 분별하는 것인데, 전체적으로 분별되는 경계의 성품은 의타기성이다. 2차적 분별은 전체적 경계 속의 개체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분별하는데, 이 경우 분별과 더불어 개체들에 대한 호오의 감정이 일어나면, 개체들은 집착이 수반하는 경계들로서 변계소집성이라는 성품을 갖게 된다.
4.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선정禪定이란 선-반성적 의식만이 유지되도록 하거나 1차적인 분별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선정에 대한 정의는 때로 이처럼 간명하다. 물론 이런 정의는 ‘어떻게 하면’ 선-반성적 의식만이 유지되도록 하거나 1차적인 분별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어려운 물음을 자기 뒤에 남겨 놓고 있다. ‘어떻게 하면’이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수행자들에게는 간명한 것일 테지만, 일반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은 오랜 훈련과 반복적 체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에서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해소하는 방법을 ‘판단중지’(epoche, 에포케)라고 부른다. 일반정립을 하는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판단중지, 곧 에포케는 그리스어ἐποχή로서 원래 ‘자기-억제’Ani-sich-halten를 의미한다. 이것은 아집과 법집에 이르는 판단으로부터 자기를 억제하는 것이다. 아집과 법집으로부터의 자기-억제가 불교에서는 열반의 관문으로 제시되는 반면에, 일반정립으로부터의 자기-억제가 현상학에서는 의식 분석의 출발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자기-억제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무경無境을 납득하지 못하겠고, 유식唯識도 납득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집과 법집에서 벗어나려면, 이론적 논의 외에 실천적 수행이 필요하다.
현장은 『성유식론』의 끝부분에서 ‘오직 심식일 뿐’(唯識)이라고 말할 뿐 ‘오직 대상일 뿐’(唯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호법의 입장을 소개한다. 호법의 입장 속에서는 ‘마음 관찰’(觀心)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대상에 미혹되고 집착하여, 번뇌와 행업을 일으키고, 생사[의 윤회]에 빠져들고, 마음을 관찰(觀心)하여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남을 힘써 구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을 애처롭게 여기기 때문에, ‘오직 심식일 뿐’이라는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을 관찰(自觀心)하여 생사에서 해탈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부 대상이 외부 대상처럼 모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주1)
이러한 소개에 따르면, 『성유식론』의 의의는 ‘마음 관찰’을 통한 ‘생사의 해탈’을 역설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호법이 ‘생사로부터의 해탈 방안’으로 제시한 ‘마음 관찰’을 프라우발러와 프란시스 쿡은 모두 ‘마음을 관조함’(contemplating the mind)으로 번역하고 있다.(주2)
1) 『 成唯識論』, T1585_.31.0059a09-a17: 或諸愚夫迷執於境起煩惱業生死沈淪不解觀心勤求出離. 哀愍彼故説唯識言令自觀心解脱生死. 非謂内境如外都無. 현장,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동국역경원, 2008, p.652.
2) Erich Frauwallner, Philosophie des Buddhismus,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Delhi, 2010, p.437. Fransis H. Cook, Three Texts on Consciousness Only, Numata Center for Buddhist Translation, Berkeley, 1999,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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