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로 세상 읽기]
“가짜와 헛것들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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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8 년 7 월 [통권 제6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61회 / 댓글0건본문
날씨가 매우 추워 난로를 찾으니 보이지 않고, 땔감을 찾던 중 법당 안에 모셔진 목불상을 발견했다. 그래서 목불을 안고 나와 모탕 위에 놓고 쪼개 군불을 지피고 있는데 마침 혜림사의 원주가 보고는 깜짝 놀라 단하를 비난했다. 단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사리가 혹 나오나 해서…” 원주가 말하길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겠소?” 단하가 대답했다.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 부처가 아닐 것이요, 그렇다면 나를 책망할 게 없지 않소.” 원주는 할 말을 잃었다.(『경덕전등록』 제14권 )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선생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대학생 시절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한국사찰을 돌며 동양사상에 대해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었다고 적고 있다. 외국인 친구들은 거대한 목불 혹은 철불 앞에서 큰 절을 올리는 불교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우상숭배라며 힐난詰難하였다고 한다. 서양종교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그 비난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올은 기독교 신자이긴 해도 그들의 비난이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말하는 우상숭배란 한국문화와 사상으로 보면 맞지 않는다고 여긴 도올이었다. 이를 해명할 수 있는 마땅한 논리나 근거를 찾지 못해 애를 태웠다.
목불을 태운 단하천연丹霞天然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와는 다른 차원의 불교를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어 자존심이 무척 상해 있던 중 도올은 한 사찰 공양간에서 단하가 목불을 쪼개 군불을 때는 그림을 발견하였다. 도올은 그 사찰 주지 스님으로부터 그림의 내용을 듣고 충격을 받은 한편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인 친구들이 단순하게 비난하고 있는 우상숭배를 불교의 입장에서 반박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도올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내용을 설명하였고, 이러한 파격이 불교, 특히 선불교 전반에 감춰져 있음을 주지시켰다고 한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는 석두희천石頭希遷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제자가 된 이로 어느 추운 겨울 날 혜림사라는 절에 들렀다가 이 같은 일화를 남기게 된다. 날씨는 추운데 방에 불을 지펴주지 않자 단하선사는 법당 목불을 들고 나와 도끼로 쪼갠 후 아궁이에 불을 땠다. 이를 보고 놀란 원주가 단하에게 야단을 치며 달려들었다. 원주란 절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소임을 말한다. 단하는 싸울 듯 달려드는 원주의 분노를 이렇듯 사리문답舍利問答을 통해 시원하게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옛선사들에겐 목불을 불쏘시개로 쓴 단하보다 더 한 일화들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게 살불살조殺佛殺祖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뜻이다. 혜연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인데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의 법어다. 임제의현은 ‘살불살조’와 ‘오무간업五無間業’을 설파했다. 오무간업이란 어머니를 죽임 [殺母] · 아버지를 죽임[殺父] · 아라한을 죽임[殺阿羅漢] · 화합승가를 깨뜨림[破和合僧] ·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出佛身血]으로 모두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중죄重罪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무시무시할뿐더러 아무리 속가를 버리고 출가한 이라 할지라도 극악무도한 패륜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여기엔 관념에 집착하면 본분사를 망가뜨리게 된다는 경계를 담고 있다. 관념이란 다름 아니다. 어떤 이미지나 인식을 절대화하면 그 틀에 갇혀 오히려 구속되고 만다. 임제는 이것을 경계하면서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즉, 어머니를 해친다는 것은 애착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의미이고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아라한을 죽임은 근기 낮은 행동과 헛된 깨달음을 경계하는 것이며, 화합승가를 깨뜨린다는 것은 허공과 같이 꾸밈이 없는 곳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의 몸에 피를 낸다는 것은 청정한 법계 가운데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자유로움을 누리라는 뜻이다. 임제의 이러한 설명은 결국 관념과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라는 뜻으로 그가 말한 살불살조와 의미가 통한다.
덕산선감(德山宣監. 778~863)도 임제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불조佛祖를 관념적 우상으로 떠받드는 풍조를 비판적으로 봤던 덕산은 다음과 같은 독설毒舌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역대 선사들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보리달마는 냄새나는 야만인에 불과하다. 석가모니는 별볼 일 없는 밑씻개요, 문수와 보현은 변소 치는 사람이다. 삼먁삼보리와 오묘한 깨달음이란 족쇄를 벗어난 평범한 인간성에 지나지 않으며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어두는 나무 기둥에 지나지 않는다. 12분교의 교학이란 귀신의 장부일 뿐이며 종기에서 흐르는 고름을 닦아내는 휴지에 적당하다.”
교조와 교리를 비판하는 것은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다. 종교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는 가장 끔찍한 벌과가 주어진다. 기독교에 익숙한 서양 청년들에게 ‘살불살조’와 교조를 밑씻개로 비유하는 선사들의 독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도올은 친구들에게 우상숭배의 헛것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관념에 있다는 점을 일깨우며 상쾌해했다..
“문수와 보현은 변소 치는 사람”
그러나 진정 불교 안에는 우상숭배가 없는 것일까?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정한 자유, 다시 말해 해탈의 즐거움을 맘껏 구가하고 있는 것인가? 불교는 결단코 우상숭배의 종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불조를 공격하면서 관념적 우상을 경고했던 8~9세기를 훨씬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우상의 틀에서 벗어나 있을까? 시대는 과학과 문명의 최첨단을 살고 있다는 21세기지만 우상의 형상은 원시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전히 우리는 ‘헛것’에 매달리고 ‘가짜’에 속으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헛것과 가짜에 속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령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 끝을 보나?’라고 했을 때 달을 잘못 가리키는 스승의 손가락이라면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바로 볼 수 있다. 과거 선사들이 살불살조를 내세운 이유는 관념에 집착하게 되면 가짜 부처와 조사의 형상에 매달려 수행에 대한 진척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는 부처님의 유훈遺訓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등신불에 의지하고 매달리는 게 일반적인 신도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찰 어디에 가든 불상 앞에서 동그랗게 손을 말아 엎드려 절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불교가 기복祈福으로 빠진다면 우상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불교는 작인작과作因作果의 연기론緣起論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기초에 입각해 보면 불교는 작복作福의 종교다. 어떠한 초월적 힘이나 신에 의지해 복을 구하는 기복종교가 아니라는 얘기다.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다. 어떠한 영이靈異와 신비한 힘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불상을 통해 구원을 바란다면 잘못된 신행형태가 아닐 수 없다. 『아함경』 등 불전에 의하면 불상은 처음 코삼비국의 우다야나 왕이 향나무로 석가상을 조각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불상이 출현하게 된 때는 부처님 입멸 후 500년 기원 전후였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들은 이때를 즈음하여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과 북부 마투라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의 불상들이 출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상은 사찰의 경제적 욕구가 강해지면서 예배대상이 아닌 기복의 우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를 소설가 김성동씨는 그의 문단 등단작품이기도 한 장편소설 『만다라』를 통해 통렬한 아픔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소설 속 파계승으로 자처하는 지산스님이 온갖 아픔과 고통을 담고 있는 이지러진 모습의 불상을 조각하자 주인공 법운 스님이 “부처님의 모습이 왜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띤 모습이 아니냐?”고 묻자 내뱉는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중생들이 저리도 아파하는데 부처님이 어찌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 있는 가짜 부처의 형상은 제거해 내는 것이 옳다. 단하선사가 목불을 불쏘시개로 사용하듯 가짜와 헛것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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