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고경이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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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8 년 5 월 [통권 제6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565회 / 댓글0건본문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성철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밀려오는 적막감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른스님 모신다고 백련암을 떠나본 적 없는 소납이었기에, 인맥도 부족하고 견문도 깊지 못해 그때는 사실 앞이 캄캄했습니다. 100여과 이상 나온 큰스님의 사리를 모실 사리탑 건립이 당시엔 무엇보다 걱정거리였습니다.
큰스님 생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찾으시기에 찾아뵈니 “홍도여관 터에 내 부도탑을 세웠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 그 터는 ‘해인사를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영빈관을 지으면 좋을 자리’라고 여럿이 말하는 곳입니다. 먼저 그곳에 영빈관을 짓고, 앞 정원 터에 ‘큰스님 부도탑을 세운다’는 임회 의결을 받아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소납의 대답을 들은 큰스님은 언뜻 못마땅한 표정을 비쳤습니다. 당시 조그마한 연못만이 홍도여관 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큰스님! 그 터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해인사 입구의 마지막 장소이니, 영빈관 용도로 건물을 먼저 짓고 부도탑을 세운다는 산중 결의를 받아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재차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 “급한 것이 아니니 주지하고 잘 의논해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스님께서 “어느 신도가 해인사에 불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해인강원도 불교대학으로 승격되어야 할 것인데 승가대학 허가 받을 수 있는 건물 규모를 알아보고 학교 건물을 지으라.”고 소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다시 “큰스님! 대학인가도 어렵고 하니 불사금으로 해인사 영빈관을 짓고 큰스님 부도탑 자리를 정했으면 합니다.”고 여쭈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당시 지어진 건물이 지금 축구장 뒤편에 있는 화장원이고, 시주자는 화승그룹의 현구봉 회장님이셨습니다. 당시 소납의 좁은 생각엔 사리탑 부지 선정의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빈각 건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장경각에 들어가 책 보려고 안쪽의 서고문을 여니 문틀이 틀어져 이제는 내 힘으로 잘 열리지 않는다. 언제든지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개가식 장경각을 새로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영빈관을 지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큰스님께서 ‘장경각 신축’을 말씀하시자, 뜻밖이라 약간 놀랐습니다. 큰스님께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장경각 신축을 시작했습니다. “‘장경각’이라 하지 말고 ‘고심원(古心院)’이라고 이름 붙여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영빈관의 꿈을 접고 고심원 불사를 시작해 벽채를 바르고 있을 때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큰스님 생전에 사리탑 건립 장소를 결정하지 못했기에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방장스님을 찾아뵙고, “큰스님께서 옛 홍도여관 터에 부도탑 세우시기를 바라셨습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후 방장스님이 부르셔서 찾아뵈었더니, “임회에 논의를 부쳤더니 그 자리는 앞으로 해인사 영빈관을 지을 요긴한 자리라 해 동의를 얻지 못했어. 그 뒤 언덕이 넓잖아! 그 터에 108평이 넘게 잘 해드리면 되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은근히 염려해 오던 일이 현실이 되자, 늘어날 부대시설과 공사비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져 왔습니다. 지관 큰스님을 위원장으로 모시고 사리탑 현상 공모를 통해 당선작을 선정하려 했으나,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우수상 선정에만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주명덕 선생님의 추천으로 최재은 설치작가를 만나 사리탑을 완공해 1998년 열반 5주기에 회향했습니다.
당시 성철스님 사리탑 건립에 관심을 가진 시주님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영수증 대용(代用)을 목적으로, 1996년 봄 『고경』을 계간지로 창간해 1998년 가을 호(통권11권)를 끝으로 발간을 중지하였습니다. 『고경』의 ‘불면석’란에 큰스님과 친교가 있었던 원로 스님들을 방문해 인터뷰하고 글을 실었습니다. 몇몇 원로 스님들이 말씀해 주신 돈오돈수 사상과 봉암사 결사의 증언 등은 지금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옛 『고경』을 보면, 기록과 증언의 중요성에 고개를 끄떡입니다. 게다가 많은 신도들이 『고경』을 계속 내지 않고 종간한 것에 대해 매우 서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난 2013년 5월 『고경』을 월간지로 다시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 3월 11일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 11월은 큰스님 열반 20 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탄신 100주년 기념식을 마치면서 “내 할 일이 끝나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열반 20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되니 “큰스님의 법음을 전하는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는 문도들의 마음이 모여 “고경”을 다시 월간으로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의 사상을 좀 더 쉽게 풀어 널리 알리는 데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것이 벌써 통권 61권이 됐고, 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고경』 통권 62호부터는 불교사상을 쉽게 소개하는 글과 대중적인 글을 함께 담아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고경』이 대중적인 학술잡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간단히 편집장의 이력을 밝혀 둡니다. 필명 활인검(活仁黔)인 편집자는 2007년 2월 중국으로 유학 가, 2012년 6월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북송시대의 선사 혜홍각범의 선학사상을 연구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하려다 이왕 간 김에 공부를 좀 더 하는 게 좋겠다는 주변의 제안에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티벳학 연구원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티벳어로 박사논문을 쓸 것을 요구하는 티벳인 지도교수를 만나 공부하던 중, “북경에서 공부해서는 티벳어로 논문을 쓰기 어려우니 티벳 지역에 있는 사찰에 들어가, 중관과 유식에 뛰어난 스님들을 만나 티벳어도 익히고 티벳불교 전적들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지도교수의 말씀에, 청해성에 위치한 겔룩파 사찰 토리곤빠에 들어가 3년간 티벳어와 티벳불교 전적들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티벳어로 쓴 350쪽에 이르는 박사학위논문을 2017년 12월 제출, 2018년 3월 1차 논문심사를 통과했습니다. 5월말에 2차 심사를 마치면 6월 말에 티벳불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중국불교와 티벳불교를 연구한 활인검(活仁黔)이 중국의 승조 스님이 쓴 『조론』을 시작으로 도안, 혜원, 축도생 등 초기 중국불교 개척자들의 사상과 선사상, 그리고 겔룩파의 창시자 쫑카파의 중관사상 등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고경』을 수준 높은 불교 전문잡지로 만들어 주기를 소납은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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