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손가락 사이]
하염없이, 산길을 헤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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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 2019 년 7 월 [통권 제7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111회 / 댓글0건본문
하염없이, 산길을 헤매다
부처님 오신 날
나도 따라 왔다
내 버릇도, 붉은 입술도, 자식들의 고단한 인생도
함께 따라왔다
부처님 오신 날
무명無明도 함께 따라왔다
그 그림자도 쓸쓸히 따라오며
피었다 시들고,
뼈아픈 고통의 이파리가 푸르러
부처님을 묻어버렸다
꽃처럼 가신 부처님을, 꽃처럼 오리라 믿고
강물처럼 떠난 부처님을, 강물처럼 오리라 믿는
바보 같은 인생이
하루 종일 피었다 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적막 속으로
거미줄이 늘고, 거짓말이 먼지처럼 쌓였다
그 많던 전쟁도, 고통도, 슬픔도
하나 구원하지 못하는
구름과 바람과 쓸쓸함을 쳐다만 보고 있다
아, 부처님은 애당초
그렇게 오셨다
그렇게 가셨다, 하니
하루 종일
그렇게 오실 것만 생각하고, 그렇게 가실 것을 알지 못해
여래如來와 여거如去
두 분의 부처를 업고
나는, 하염없이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 그만 싸우자
흔들리다 결국 금이 가버린 윗니를 뽑고 와서,
우울하게 누워있었다
하나 둘, 비어가는 치아가 좀 서러웠다
어쩌면 내 삶도, 그렇게 차츰 이빨이 빠져나가
가벼워지고 있었다
아는 분한테 전화가 걸려 와서, “이를 뽑고 누워있다”고 하니,
대뜸 하는 소리가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이제 세상과 너무 싸우지 마세요”라고 한다
“예, 자중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부끄러워서 얼른 끊었다
생각해보니, 참 오랜 세월 세상과 멱살 잡고 싸워온 게, 분명했다
그게 누군지도 모르고, 왜 그런 줄도 모르면서…
뺨을 몇 대 더 맞고 나면, 아랫니마저 빠질게 끔찍하여
이제 그만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풀꽃에 내 인생을 묻다
지난 달 네 고랑, 오늘 다섯 고랑
삽질, 괭이질로 천천히 흙을 파서 일굽니다
아직도 다섯 고랑이 더 남았습니다만,
힘에 부쳐 오늘은 고만 할랍니다
팔공산 한 구석에 햇살이 따뜻해
밭두렁에 퍼질러 앉아 쉽니다
잠시 바닥을 처다 보니
아 글쎄, 여기저기 온갖 자잘한 꽃들로 가득한데요,
세상이 송이송이 이렇게 많이도 피어나는 줄을 몰랐습니다
나는 내 인생도 구석구석 좀 그랬으면 했습니다
이름 없는 곳에서, 이름 없이 흔들리는 잡초도
가장 아름다운 한 때가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만 그것을 꺾어보았습니다
열 장의 흰 이파리,
보일 듯 말 듯 맑게 서로 달라붙은 조각조각이
하나의 원圓이 된 꽃은, 세상을 그렇게 온통
원으로 장식해댑니다
항상 그렇게 가장 아름다울 때도 모르면서,
피는 까닭도 모르면서
흔들리는 흰 자태만을 남기고
세상 그 어느 것과 눈 맞춤도 없이
모두 저 언덕으로, 피안으로 떠나갑니다
그곳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르고
모두 흔들리며 떠나갑니다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오늘은 풀꽃에게 내 인생을 묻습니다
아니 차라리 내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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