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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오래된 미래]
『유가사지론』 「보살품」의 삼삼매와 무분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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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8 년 5 월 [통권 제6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3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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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살펴보았듯이 삼삼매해탈문은 초기 대승이래 수행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유식학파의 중요한 논서인 『유가사지론』 「보살품」에 나타나 있는 공, 무상, 무원 삼매에 대한 설명은 대승불교 사상과 수행에 대한 완성된 이론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후 선법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보살의 공삼매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모든 언설을 자체로 하는 자성을 여읜 사태는 불가언설을 자성으로 한다고 보는 보살의 마음의 안주가 그에게 공삼매라고 설해진다. 무원삼매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보살은 바로 그 불가언설을 본질로 하는 사태가 삿된 분별에 의해 분출된 번뇌와 고통에 의해 포섭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잘못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고 보면서, 미래에 그것에 대한 무원에 의거하는 마음의 안주가 그에게 무원삼매라고 설해진다. 무상삼매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보살이 모든 분별과 희론의 특성들을 제거한 후에 바로 그 불가언설을 본질로 하는 사태를 여실하게 적정의 측면에서 마음을 쏟을 때에 마음의 안주가 그에게 무상삼매라고 설해진다.

 

언어에 의해 지칭되는 사태는 자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그 사태의 본질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상태를 공삼매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가언설을 본질로 하는 사태는 어떻게 자각될 수 있을까? 만약 그 사태가 수행의 대상으로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위이지 무위가 아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장차 불가언설을 본질로 하는 사태를 획득하겠다는 의식적 노력을 멈추어야만 한다. 이 상태에 마음을 머무는 것이 무원삼매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상황들, 다시 말해 자성을 갖지 않은 사태를 마치 자성을 갖는 것인 양 언어화하는 활동인 희론(戱論)과 미래에 어떤 상태를 획득하려는 노력 속에 개입된 분별활동을 멈춤으로써 수행자는 비로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적정의 상태에 마음을 머물 수 있다. 이것을 무상삼매라고 한다. 이상으로 『유가사지론』 「보살품」은 초기 대승의 삼삼매해탈문에서 강조했던 언어의 문제를 삼삼매의 핵심적인 관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삼삼매와 언어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들 세 가지 삼매들에 대해 이것보다 높지도 않고 이것보다 뛰어나지도 않다는 언어적 표현이 생기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삼삼매가 다른 수행법보다 뛰어나다면 그 발화 행위 자체도 분별의 소산일 것이다. 그러므로 삼삼매가 무분별적이라는 설명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반론에 대한 『유가사지론』 「보살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존재(sat)와 비존재(asat)의 양자이다. 거기서 존재란 유위와 무위이며, 비존재란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이다. 존재하는 유위에 대해 원함이 없기 때문에 또 싫어하기 때문에 무원삼매의 확립이 있다. 또 무위의 열반에 대해 원함의 관점에서 또 올바른 기쁨을 갖고 잡기 때문에 무상삼매의 확립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존재하는 사태에 관하여 보살은 원도 일으켜서는 안 되며 무원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 비존재하는 것을 비존재한다고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 그것이 통찰과 관련하여 공삼매의 확립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실하게 안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삼삼매가 다른 수행법보다 우수한 까닭은 존재와 비존재를 다 포괄하기 때문이다. 유위와 무위는 존재, 즉 실제적인 사태이지만,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은 존재가 아닌 가상, 즉 허구적인 비실재이다. 그런데 유위는 존재이지만 윤회의 세계를 형성하는 힘이기 때문에 수행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무원삼매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수행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바로 진실한 존재인 무위의 열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위가 아니므로 특정한 표식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은 상이 없는 삼매인 무상삼매를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 자아와 자아에 속하는 것은 추구해서도 안 되며 추구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비존재이기 때문에 수행의 진실한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존재는 그것이 비존재임을 여실하게 보는 것이 요청된다. 이를 공삼매의 확립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가사지론』 「보살품」의 삼삼매에 대한 설명에서 보이는 “무분별”은 일반적으로 사마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삼삼매는 “모든 관념상의 (재)산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함축한다. 하지만 슈미트하우젠이 지적하듯이 보살지에서 경험하는 관념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무분별은 모든 심적 작용이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출세간지 이전 단계처럼 단순한 잠재적 상태가 아니라 모든 다양성의 완전한 사라짐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신비적인 초월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의 수행과 성문의 수행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하여 『유가사지론』 「보살품」의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성문들이 어떤 점에 대해 훈련하고 증득할 때, 보살은 그것과 다른 측면들을 가진 세 가지 삼매들을 여실한 확립의 방식에 의해 이해함에 의해 또 수습의 방식에 의해 이해함에 의해 여실하게 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이들 삼종 삼매에 의해 그와 같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은 성문들의 훈련하고 증득하는 유위적인 수행법에 대하여, 삼삼매는 ‘여실한 확립’의 방식과 ‘수습’의 방식에 의해 여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여실한 확립’과 ‘수습’은 성문의 수행과 구별되는 삼삼매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살의 수행과 성문의 수행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성문지에서 반복적인 훈련과 증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가사지론』 「성문품」에 대한 슈미트하우젠의 설명을 참고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생사윤회의 완전한 소멸만이 바라던 목표라는 사실에 정서적으로 동감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원인은 수행자가 “나는 고를 고통이라고 본다.” 또는 “나는 열반을 위해 선법을 수습한다.”는 생각에 있다. 이러한 개념화는 수행자가 무의식적으로 이 관찰행위를 자아의 마지막 보루로서 느끼고 있고, 따라서 일체 현존요소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이 명상주체에 대한 부정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정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만을 제거하기 위해 성문지에서 채택하는 방법은 명상적 행위 자체를 관찰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행자는 명상 과정에서 선행하는 심의 찰나가 뒤따르는 심의찰나에 의해 소멸되며, 즉 그것들도 무상하고 따라서 고통스럽고 무아이며, 그것 뒤에 어떠한 분리된 자아가 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의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방법의 반복 수행은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동일한 그러한 인식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이 관찰행위는 동일한 성질을 갖는 바로 직전의 관찰행위를 그러한 것으로서 대상으로 갖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거친’ 아만의 마지막 은신처는 제거되고 아만이 계속 작용하는 것이 억제되며 그리하여 수행자가 정서적인 거부감 없이 열반을 유일하게 적정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자에게는 반복적인 관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반면, 삼삼매해탈법은 비존재를 비존재로서 여실하게 보는 방식과 무위를 수습하는 방식에 의해 이해되어진 것이다. 여기서 ‘이해’라는 말은 의식의 분별 작용이 아니라 현전지를 의미한다. 무분별의 상태, 즉 완전한 사마타의 상태에 대한 슈미트 하우젠의 다음 설명은 삼삼매해탈법의 ‘여실한 확립’과 ‘수습’에도 적용될 수 있다.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심의 검사로서의 심리적 활동과 노력을 포기하고, 어떠한 행위도 여읜 따라서 무분별한 상태속에 자신의 마음을 세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전의 반성적 행위와 사유노력의 결여 및 그것을 넘어 동시에 모든 의식적인 관념작용과 지각작용이 그것의 내용물과 함께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상태 속에서 그의 마음은 존재하기를 그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은 어떤 대상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대상을 갖고 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 상태 속에서 열병에 걸린 것처럼 혼침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사마타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분별적 의식 활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여실하게 보는 삼매의 확립과 수습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런 점에서 삼삼매는 언설로 표현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지만 다른 수행법보다 탁월하다는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다.

『유가사지론』 「보살품」에서 논의된 ‘무분별’은 초기불교에서 나타난 용어지만 대승불교 이후 그것은 해탈의 핵심적인 관건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 유의한다면 선종의 발생과 전개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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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운문사 승가대학을 마치고 10년간 강사로서 학인을 지도했다. 경전 연찬을 하는 틈틈이 제방에서 정진했으며, 서울대와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해오고 있다. 2016년 미르문화원을 열고 그곳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한다. 새로운 형식의 불교모임인 무빙템플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이 밖에도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와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은유와 마음』, 『미술관에 간 붓다』,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등이 있으며, 「무지한 스승으로서의 선사」, 「『선문염송』의 글쓰기-정통과 민족적 정체성의 지향」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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