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설날 운세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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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8 년 3 월 [통권 제5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91회 / 댓글0건본문
설날에 차례를 지내러 정심사에 갔다. 삼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명절을 절에서 보낸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려면 힘도 비용도 더 들 것이기에 수고와 비용을 줄여보려는 속셈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량의 힘을 믿는 편이다. 부처님 계신 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지내주시는 게 훨씬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안고 법당에 들어서니 개금불사를 하는 중이라 불단에 빙 둘러 휘장을 쳐 놓았다. 장막 속에 계신 부처님을 모시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절과 합송으로 공경을 올린 뒤에 주지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방에서 동계올림픽을 보다가 나왔다면서, 스켈레톤에 출전한 윤성빈 선수가 메달을 딸지 어떨지 궁금하다는 말로 법문을 시작했는데 그 다음엔 무슨 말씀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침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고 자리도 비좁고 해서 영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토정비결’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때부터 법문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어서 여러분들 중에는 더러 토정비결도 보고 운세를 보러 가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보십시오. 그러나 저는 ‘성격이 운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어서 그런 사례로 며칠 전 개금불사 때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했다.
정심사는 이번 불사를 신도들이 함께하는 장으로 기획했다. 개금은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일이라서, 보통 숙련된 장인이 맡아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벌 금박을 신도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어차피 마무리는 장인의 솜씨로 깔끔하게 장엄이 될 터이니, 긴 과정 중에 한 단계를 모두의 불사로 만든 것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중생장엄’이라고나 할까. 자기가 다니는 절 부처님 몸에 직접 금을 입혀드린다면, 내생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그 자체가 복일 것이다. 행사일정을 잡고 금을 입히던 날, 늦게 온 신도가 있었다. 도착했을 때 그날의 불사는 야속하게도 막을 내린 뒤였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나 그 신도는 끝났다는 말을 듣고서 “연장전 없어요?” 하더란다. 대중에게 웃음과 감동을 안겼을 그 신도를 위해 연장전을 열고 금을 입힐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주지스님은 ‘성격이 운을 만든 사례’로 이 이야기를 든 것이다. ‘하는 수 없지’ 하면서 그냥 돌아서는 대신, 되든 안 되든 말이라도 해보는 자세가 놓친 기회를 살려놓은 셈이다. 그런 자세는 대체로 성격에서 나오는지라, 그렇구나, 수긍하면서 듣고 있는데 앞줄에 앉아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사람이 윤성빈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알렸다. 다 함께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주지스님은 윤성빈 선수도 연습, 연습, 연습 끝에 이런 결과를 낸 것이라며, 끊임없는 훈련이 운임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이 법문을 듣고도 운세 보러 갈 사람은 갈 것이다. 현안이 닥치면 답답한 마음에서 찾게 되는 곳이 그곳이니까.
나도 40대의 답답하던 어느 날,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사주카페에서 일하던 친구가 자기네 사주선생 용하다고 한번 와보라고 하였다. 마침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심심해하던 사주선생을 독차지하여 사주를 보았다. 생년월일시를 불러주자 그 선생은 빠른 손놀림으로 숫자를 뽑아보더니 첫마디를 이렇게 던졌다. “평생 남 뒤치다꺼리할 팔자네요.” 듣는 즉시 기분이 나빴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순간, ‘뒤치다꺼리’라는 한마디에 나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꿰어졌다. 앓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중풍에 치매로 고생하는 엄마. 두 분을 떠맡은 걸로도 모자라, 사정이 생긴 오빠를 대신하여 그의 가족까지 챙겨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남이 번역한 원고를 고치는 일로 돈을 벌다보니, 집에서건 밖에서건 남 뒤치다꺼리를 실컷 하고 살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 사주선생이 용하긴 용한가본데, 진짜 알고나 하는 소린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누구 뒤치다꺼리를 그렇게 해요?” “부모, 형제, 주변사람들 다요.”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도 묻긴 해야겠는데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 그 선생의 첫마디에 이미 이성이 날아갔지만 조금 남은 정신줄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반박할 말을 생각해냈다. ‘남 뒤치다꺼리,’ 이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누구에게나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모든 부모들, 많은 주부들, 남 밑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자유를 찾아 출가한 사람도 어른스님이 되면 상좌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오죽하면 ‘상좌 하나에 무덤 하나’라는 말이 생겼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남 뒤치다꺼리다.
그래서 “그건 누구나 다 하고 사는 일 아닌가요?”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사주가 따로 있단다. 내 말대로라면 자기가 모든 손님에게 같은 사주를 내놔야 하지 않겠냐고 반박해왔다. 기가 꺾인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언제까지 하나요?” 그거라도 알고 싶었다. 65세까지란다. 그 말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면 엄마도 돌아가셨을 테고, 학교 다니는 조카도 다 커서 제 살림을 차렸을 텐데 무슨 뒤치다꺼리가 남았단 말인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혹시 늦게라도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는데 그놈이 속을 썩이나요?” 사주선생은 웃으면서 내 사주에는 평생 남자가 없다고, 그냥 팔자려니~ 하고 살란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 선생 족집게네, 감탄하면서 사주카페를 나선 순간부터 한참동안 우울했다. ‘남 뒤치다꺼리’라는 말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한술 더 떠서 지나온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춰가며 자기연민에 빠져 지냈다. 매일같이 닥쳐오는 일을 몸으로 때우고 돈으로 막으며 정신없이 달리는 중에도 언뜻언뜻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면 ‘역시 난 안 돼,’ ‘주인공으로 살기는 틀렸네’ 하면서 후렴구를 읊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성격이란 좀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격의 ‘격(格)’ 자가 말해주듯, 이미 틀이 되어 나온 탓이다. 업을 녹이는 수행이라면 바꿀 수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타고난 성격에다 살면서 더해진 비뚤어진 성격까지 해서 나의 성격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그 사주를 받아들고 한참동안 비관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왔던 것이다.
아까 그 개금불사의 주인공.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나 같은 사주를 들었다면 어떻게 해석했을까. ‘65세까지 남 뒤치다꺼리를 하려면 일단 몸은 건강하겠구나. 남을 보살피려면 수입이 있어야 하니 일거리도 있겠구나. 나 혼자 입에 풀칠하며 외롭게 사는 것보다는 남을 보살필 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좋아, 보살 팔자로다.’ 이러지 않았을까. 성격이 운이라는데 내게는 성격을 고칠 힘이 없으니, 그 사람이 내게 빙의했다 치고, 올해부터는 팔자타령 하는 대신 내 인생에 개금할 수 있기를, 턱없이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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