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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구나발타(求那跋陀) 삼장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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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8 년 2 월 [통권 제5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4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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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명추회요』의 100권-3판(765쪽)에는 구나발타 삼장의 말씀이 ‘마음이 그대로 이치이고 이치가 그대로 마음이다’라는 제목 아래 짧게 수록되어 있다. 각주를 보면 그 말씀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는 문헌에서 인용되었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능가사자기』라는 문헌은 7세기 중국 선종사의 흐름 가운데 출현했다가 근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추회요』나 그것의 바탕이 되는 『종경록』에도 『능가사자기』라는 제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이 발견된 20세기 초에 이 문헌의 전모가 공개된 이후, 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을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명추회요』의 내용이 바로 『능가사자기』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헌이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책에서 기술된 선종 조사들의 흐름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육조혜능대사가 활동했던 7세기 중국 선종계에는 법맥을 둘러싸고 우리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수용된 『육조단경』과 다른 관점이 『능가사자기』, 『전법보기』, 『역대법보기』 등의 선종 역사서에 등장한다. 이 가운데 『능가사자기』는 육조혜능 대사에게 밀려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대통신수(大通神秀)가 전면에 등장한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안심(安心)의 가르침 

 

『능가사자기』는 제목 그대로 ‘『능가경(楞伽經)』을 전수한 스승과 제자에 대한 기록’을 뜻한다. 『육조단경』을 보면, 오조홍인 대사께서 육조에게 전한 가르침은 『금강경』이다. 훗날 육조가 되는 노행자(盧行者)는 저잣거리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금강경』의 문구를 듣고 구도의 길을 나서게 되고, 오조를 만난 뒤 다시 이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라 도(道)의 눈을 뜨게 된다.

 

반면 7세기에 출현한 『능가사자기』에는 그와 전혀 다른 얘기가 전해진다. 즉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후 전한 경은 『금강경』이 아니라 『능가경』이었다는 것이다. 『능가경』에 대한 중시는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의 스승이 바로 『능가경』을 한역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삼장임을 강조하는 데 이른다.

그러므로 『명추회요』에 나온 구나발타 삼장은, 『능가사자기』에 따르면, 보리달마의 스승이자 『능가경』을 한역한 구나발타라 삼장이다.

 

『능가사자기』에서는 중국 선종의 계보를 (1)구나발타라-(2)보리달마-(3)혜가-(4)승찬-(5)도신-(6)홍인-(7)신수-(8)보적·경현·의복·혜복으로 기술한다. 이 가운데 (2)보리달마에서 (6)홍인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조사의 계보와 일치하지만, 구나발타라가 맨 앞에 있고, 홍인 다음에 신수와 보적 등이 나오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다르다. 선을 연구하는 이들에 따르면, 우리가 현재 상식으로 수용하는 선종 조사의 계보는 7~8세기경 매우 치열한 격돌 끝에 정립된 이후, 800년대 이후로는 이견이 없게 되었다.

 

영명연수 선사가 『능가사자기』에서 직접 구나발타 삼장의 글을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간접 인용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가 구나발타 삼장의 말씀 전체를 읽은 다음 『명추회요』에 인용된 내용만을 뽑아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명추회요』 100권-3판의 내용은 구나발타 삼장이 설한 안심(安心)의 네 가지 가르침 중 네 번째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심의 가르침 네 가지를 같이 읽어보면 『명추회요』의 인용문이 훨씬 수월하게 이해되는 점이 있으므로, 이를 한꺼번에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능가사자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금 안심(安心, 마음을 편히 함)이라고 할 경우, 대략 네 가지 경우를 들 수 있다. 첫째, 이치를 등지는 마음이니, 오로지 범부(凡夫)의 마음이다. 둘째, 이치로 향하는 마음이다.

 

이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고자 하여 고요함으로 향하는 것이니, 바로 성문(聲聞)의 마음이다. 셋째, 이치에 들어간 마음이다. 이는 비록 장애를 끊고 이치를 드러냈지만,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니, 바로 보살의 마음이다. 넷째 이치 그대로의 마음이다.

 

今言安心, 略有四種. 一者背理心, 謂一向凡夫心也. 二者向理心, 謂厭惡生死, 以求涅槃, 趣向寂靜, 名聲聞心也. 三者入理心, 謂雖復斷障顯理, 能所未亡, 是菩薩心也. 四者理心.

(大正藏 권85)

 

위의 네 가지 경우 중 첫 번째는 불교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이치와 진리를 그야말로 등지는 범부에 해당한다. 이는 마음을 편하게 하는 안심(安心)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이 경우가 가장 많기 때문에 첫 번째에 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는 성문(聲聞)의 마음인데, 이들은 생사의 현실세계를 버리고 저 멀리 고요한 열반을 따로 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지닌다. 세 번째는 보살(菩薩)의 마음인데, 이들은 불법의 이치에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깨닫는 자와 깨달아지는 법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네 번째는 이치와 마음의 구분이 사라져버려서, 이치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이치가 되어버린 경우를 말한다. 구나발타 삼장에 따르면, 마음을 편히 하는 것에는 여러 층차가 있으니, 그 가운데 이 네 번째가 가장 수승하다.

 

마음이 그대로 이치이고 이치가 그대로 마음이다 

 

연수 선사는 아마 위의 네 가지 내용을 쭉 다 봤을 것이다.

다만 『종경록』 후반부의 인증장은 매우 간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들만 선별하는 경향을 보이므로, 앞의 세 가지는 생략하고 네 번째의 ‘이치 그대로의 마음’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구나발타 삼장이 말씀하신 네 번째 경우를 『명추회요』의 인용(765쪽)을 통해 살펴보자.

 

이치 그대로 마음이란 것은, 마음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고 이치가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니, 마음이 그대로 이치이고 이치가 그대로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과 이치가 평등한 것을 이치라 하고, 이치로 비추어 밝힐 수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하며, 마음과 이치의 평등함을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한다. 마음이 진실한 성품에 부합한 사람은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범부와 성인이 차이가 없고 경계와 지혜가 하나이며, 이치와 현상이 함께 원융하고 진제와 속제를 다같이 관조하여 원만하게 통하고 걸림이 없는 것을 ‘대도(大道)를 닦는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안심(安心)의 가르침 중 앞의 세 가지를 보지 않고 위의 문구만 본다면 그냥 좋은 말씀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네 가지를 같이 놓고 보면 『명추회요』의 인용문이 갖는 깊은 의미를 보다 수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 열심히 살기도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혹은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단지 세속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열심히 사는 것은, 위에 나온 삼장의 가르침에 비춰 보면 이치를 등지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를 떠나 따로 고요한 열반을 구하는 것 역시 그릇이 작은 성문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금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이치를 발견한 보살의 경우도 복잡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 많이 시달리다 보면 그런 자각에 괴리감이 생길 수도 있다. 즉 이치 따로 나 따로의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구나발타 삼장은 네 번째 경우를 제시하는 것 같다.

즉 추구하는 이치 그대로가 바로 내 마음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따로 구할 것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보니, 이 네번째 말씀은 노행자의 마음에 벼락같은 충격을 줬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금강경』의 문구와 그 뜻이 곧장 통하는 것 같다. 아마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능가사자기』와 『육조단경』이라 해도, 업의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서 걸림 없이 사는 것을 최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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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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