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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드러난 반달과 숨어 있는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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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1 월 [통권 제5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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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과 존재의 실상

 

연일 계속되는 한파에 밤하늘이 유난히 맑고 투명하다. 냉기가 차가울수록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은 더욱 고고해지는 법이다. 물론 밝기로 말하자면 보름달이 단연 으뜸이지만 상징적 의미로 보자면 조각배처럼 생긴 반달이 훨씬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시인 윤극영은 서쪽 하늘로 떠가는 반달을 보며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라고 노래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어둠이 고해(苦海)라면 반달은 고해를 건너 극락으로 가는 구원의 배로 읽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꼭 서쪽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육조대사는 서방정토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멀리 가지 않는다[去此不遠]고 했다. 진정한 구원은 서방으로 십만 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무명(無明)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밤하늘에 떠가는 반달도 서방정토로 가는 배가 아니라 존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되어야 구원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화엄학의 대가 현수법장도 윤극영처럼 반달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읽어내는 상징적 의미는 달랐다. 법장은 반달을 서방정토로 가는 구원의 배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법장은 십현문(十玄門)의 다섯 번째 문을 설명하면서 반달의 비유를 동원한다. 일체 모든 존재는 반달처럼 숨어 있는 부분과 드러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장은 “은현(隱顯)은 조각달이 서로 비추는 것[片月相暎]과 같다.”고 비유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은 우리 눈에는 반쪽만 보인다. 하지만 반달은 둥근 달이 찌그러져 반쪽이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반쪽이 숨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반쪽은 ‘드러남[顯]’이고, 보이지 않는 반쪽은 ‘숨음[隱]’이다. 우리는 드러난 반쪽만 보고 달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 또 다른 반쪽이 숨어 있다. 밤하늘에 떠가는 반달을 보고 시인은 서방으로 가는 구원의 상징으로 읽었고, 법장은 있음[有]과 없음[無], 드러남과 숨음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은현동시(隱顯同時)’의 이치로 읽어낸 것이다.

 

반달처럼 반은 드러나고 반은 숨어 있는 것은 존재에 내재된 모순적 특성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들은 그와 같은 상호 대립적 특성을 동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보이는 반쪽만 있다고 고집하면 그것은 실상을 반영하지 못한 ‘유견(有見)’이라는 변견이 된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반쪽에 집착하면 ‘무견(無見)’이라는 또 다른 변견에 빠지게 된다. 존재의 실상은 반달처럼 유와 무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존재는 상호 모순적인 특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중도성(中道性)을 띠고 있다.

 

비밀스럽게 작용하는 드러남과 숨음


십현연기는 화엄의 바다로 들어가는 열 개의 문이다. 이 열 개의 문은 법계의 실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존재의 중도적 특징을 드러내는 문이다. 그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다섯 번째 문이 바로 반달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눈앞에 펼쳐진 하나의 존재에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부분과 숨어 있는 부분이 비밀스럽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의미한다. 보이는 대상이라는 유(有)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인 무(無)도 동시에 있다. 그래서 법장은 존재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문을 통해 설명한다. 

 

“상호간에 서로 포섭[相攝]하므로 서로 숨고 나타남[隱顯]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상입문(相入門)이고,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의 체가 없는 것은 상즉문(相卽門)이다.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이 비록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이 은현문(隱顯門)이다.”

 

법장은 하나의 존재에 들어 있는 드러남과 숨음이라는 대립적 특성을 ‘상섭(相攝)’이라고 표현했다. 상섭이란 ‘상호 포섭’이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풀자면 ‘서로 움켜쥐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드러나 있는 반달은 숨어 있는 반쪽을 움켜쥐고 있고, 숨어 있는 반쪽은 또 드러난 반쪽을 움켜쥐고 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움켜쥐고 있는 상섭은 ‘상입(相入)’과 ‘상즉(相卽)’이라는 특성으로 설명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상입이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해 들어가면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네가 되는 상즉이 된다.

 

상입문(相入門)이란 거울이 서로의 반사면에 의지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 거울은 저 거울에 의지해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고, 저 거울은 이 거울에 의지해 자신의 형상을 드러낸다. 두 개의 거울은 ‘호상의지(互相依支)’의 관계를 통해 존재함으로 두 거울은 모두 드러난다. 반면 상즉문(相卽門)이란 바닷물과 파도가 서로 합쳐질 때 서로의 모습을 부셔버리는 것과 같다. 이 관계는 바닷물은 파도를 삼키고, 파도는 바닷물을 삼킴으로 ‘호상형탈(互相形奪)’이라고 한다. 상대의 모습을 박탈했기에 상대의 모습은 없다.

 

이것이 저것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는 쪽은 숨어버리고, 받아들이는 쪽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숨음과 드러남’이라는 ‘은현문(隱顯門)’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바위에 부딪친 하얀 파도가 검푸른 바닷물로 합쳐질 때는 하얀 파도의 특성은 숨고[隱], 검푸른 바닷물이 드러난다[賢]. 반면 거친 바람에 출렁이던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 바닷물은 숨고[隱] 새하얀 파도가 드러나게 된다[顯]. 이렇게 하나의 존재는 드러남이 있으면 반대로 숨는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파도가 바닷물을 움켜쥘 때는 바닷물이 보이지 않고, 바닷물이 파도를 움켜쥘 때는 파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측면은 보이지 않는 측면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파도에도 바닷물이 있고, 바닷물에도 파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의 존재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비밀스럽게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비밀은현구성문’이다.

 

‘숨음[隱]’과 ‘드러남[顯]’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숨는다고 해서 숨음만 있고 드러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숨음이 곧 드러남이고, 드러남이 곧 숨음이다. ‘은현구성’이란 숨음과 드러남이 동시적으로 있다는 ‘은현동시’의 특성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상입문(相入門), 상즉문(相卽門), 은현문(隱顯門)이라는 세 개의 문은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때로는 이것이 드러나고, 때로는 저것이 드러나는 존재의 관계적 실상과 중도적 특징을 설명하는 교설이다.

 

한 송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통해서 이런 이치는 여실히 드러난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해서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로 대변되는 아득한 시간이 개입하고, 천둥과 먹구름으로 대변되는 우주의 질서가 개입한다. 대기의 흐름은 먹구름을 몰고 오고, 햇살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수증기를 만들고, 바람은 수증기를 모아 먹구름을 만들고, 먹구름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작년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은 미생물의 활동으로 해체되어 자양분이 되어 국화의 줄기가 되고 꽃잎이 된다. 한 송이 국화는 이 모든 작용의 종합적 결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한 송이 국화는 단지 눈앞에 있는 한 송이 개별적 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한 송이 국화의 이면에는 온 우주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연기적 작용으로 한 송이 국화가 피어난 것이다. 만약 무수한 시간들이 숨지 않고 과거의 시간이 드러나 있다면 현재의 국화는 없다. 작년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이 비밀스럽게 숨지 않고 드러나면 화단에는 국화 대신 쓰레기만 가득할 것이다.

 

결국 눈앞에 핀 꽃은 고립적 개체의 드러남이 아니라 온 우주적 관계성이 비밀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존재들이 뒤로 숨어야 비로소 하나의 개체가 앞으로 드러날 수 있다. 햇살이 드러나고, 시간이 드러나고, 박테리아들이 드러나면 국화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숨는 것이 곧 국화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국화가 드러나는 것이 그들이 숨는 것이다. 숨는 것에 드러남이 포함되어 있고, 드러남에 숨음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존재는 이렇게 숨음과 드러남이 비밀스럽게 동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눈앞의 국화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숨어 있는 존재들을 기준으로 하면 공즉시색(空卽是色)인 셈이다.

 

이런 이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으로 확장되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은현문은 공덕천과 흑암녀가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공덕천과 불행을 초래하는 흑암녀는 자매지간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나쁜 점들도 숨어 있기 마련이다. 반면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이면에는 또 좋은 측면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눈앞에 나타난 현상만 보지만 현상 너머에는 또 다른 특성이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역경이 닥쳤을 때 역경에 굴복당하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역경을 만났지만 위기 속에 숨어 있는 기회를 포착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경의 상황에서 긍정성을 읽어내고, 긍정의 상황에서도 부정성을 읽어내는 것이 연기적 안목이며, 치우침 없는 중도의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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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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