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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나를 버리고 너에게 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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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11 월 [통권 제5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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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의 외로운 향기와 서로 포용하기[相容] 

 

산과 들이 아름답게 물드는 시월이다. 이맘때가 되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후미진 산비탈에도 노란 들국화가 피어난다. 제 혼자 힘겹게 꽃을 피운 고단함 때문일까, 들국화의 향기에는 진한 외로움이 배어난다. 누구도 그곳에 고운 꽃이 자라고 있는지 몰랐기에 들국화는 어떤 이의 손길도 없이 제 혼자서 그렇게 꽃을 피웠다.

 

하지만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피는 외로운 들국화조차도 사실은 온 우주의 동참과 배려 속에 피어났다는 것이다. 시인의 인식은 화엄(華嚴)의 사유로 이어져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기대고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화엄법계의 세계다. 화엄십현문은 그와 같은 상호의존적인 존재의 관계성, 끝없는 연기(緣起)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번 호에 들어갈 문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일다(一多)’에서 ‘일(一)’은 개체를 말하고, ‘다(多)’는 전체 또는 개체 밖에 존재하는 일체를 의미한다. 개체와 전체는 서로 분리되어 있거나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담는[容] 관계에 있다. 이런 관계를 화엄에서는 ‘상용(相容)’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담는다’는 뜻이다. 후미진 곳에서 외롭게 피는 들국화조차도 사실은 제 혼자 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고, 천둥과 먹구름도 제 할 일을 했기에 비소로 한 송이 들국화가 피어날 수 있었다.

 

지구는 광활한 우주를 돌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계절의 변화를 만들고, 따사로운 봄 햇살은 생명의 온기를 베풀고, 대기의 흐름은 구름을 움직이고, 바다와 강물은 그 구름을 타고 온 대지를 적셨다. 그렇게 소쩍새 울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무수한 낮과 밤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었다. 그런 참여와 은혜는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도 일어난다. 토양 속의 미생물들은 부지런히 나뭇잎과 무기물을 분해하고, 뿌리는 이름 없는 존재들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벌과 나비들은 꽃들의 사랑을 맺어주었다. 한 송이 들국화는 온 우주의 참여와 배려 속에 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체가 전체를 ‘받아들임[容]’으로써 일어나는 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받아들임의 관계는 전체에서 개체로 가는 일방적인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개체라도 전체의 생성과 유지를 위해 전체의 무게만큼 크게 동참한다. 전체는 무수한 개체들의 관계와 활동이 만들어낸 질서이기 때문이다. 개체의 활동은 전체의 질서를 만들고,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울의 비유와 서로 들어가기[相入]

 

개체와 전체가 이렇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관계를 화엄에서는 ‘상용(相容)’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울의 비유를 통해 이와 같은 상호 받아들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의 거울은 만물을 비출 수 있지만 그 자신은 비출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비추려면 두 개의 거울이 필요하다. 여기 거울A와 거울B가 있다. 두 개의 거울은 서로를 의지해야만 비로소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다. 거울A는 거울B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자신이 드러날 수 있고, 거울B 역시 거울A 속으로 들어가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 속으로 깊이 침투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거울A는 곧 거울 B가 되고, 거울B는 곧 거울A가 된다. 이런 관계를 ‘즉(卽)’이라고 한다. 거울A가 ‘곧[卽]’ 거울B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두 개의 거울이 벌이는 상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상즉(相卽)’이라고 한다.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라는 불이(不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는 ‘상호의지(互相依支)’, 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관계에 있어 서로 불가분에 있다는 것이 상즉이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역시 이와 같은 상즉의 논리다. 색(色)이 개별적 존재를 의미한다면 공(空)은 개별존재를 초월한 전체 또는 연기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개체가 곧 전체’라는 ‘일즉일체(一卽一切)’가 되고, 반대로 ‘전체가 곧 개체’라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는 관계가 된다.

 

거울A가 자신을 고집하면서 거울B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거울A의 존재는 드러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존재 속으로 들어가야만[相入]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식물도 암술과 수술이 서로에게 들어가야만 열매가 생기고, 동물도 정자와 난자가 서로 침투해 들어가야만 생명이 잉태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타자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엄에서는 ‘들어감[入]’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지만 어떤 걸림도 없는 ‘상통무애(相通無碍)’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자연현상들이다. 국화 홀씨는 자연이라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한 송이 국화를 피울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개체가 전체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일입일체(一入一切)’라고 한다. 전체 역시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개체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존재하는데 이를 ‘일체입일(一切入一)’이라고 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상용(相容)’은 이것이 저것 속으로 들어가고, 저것이 이것 속으로 들어가는 ‘상입(相入)’의 관계로 성립된다. 개체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고, 전체는 개체 속으로 들어가서 각각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개체와 전체는 서로에게 들어가는 ‘일다상입(一多相入)’이 된다.

 

거울의 비유와 유사한 개념이 ‘눈부처’이다. 눈부처란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말한다. 나의 존재는 너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나라는 개체가 성립된다. 반대로 너 역시 나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와 영상으로 맺힐 때 너는 존재한다.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고,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와야만 나와 네가 존재할 수 있다. 존재의 이와 같은 연기적 관계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너를 인식한다는 것은 연기적 실상에 대한 깊은 안목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의 눈동자에 비친 영상을 통해 상대를 보는 관계적 인식은 곧 부처님의 인식과 다름없다.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들어가되 같지 않다[不同]

 

그런데 받아들임은 들어옴을 전제로 한다. 나는 네게로 들어가고, 너는 내게로 들어오는 상호침투를 ‘상입(相入)’이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에게 들어가면 네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네가 되는 ‘상즉(相卽)’의 관계가 된다. 이처럼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라면 너와 나라는 개별적 경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냥 ‘우리’라는 전체만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화엄의 답은 내가 네 속으로 들어가고, 네가 내 속으로 들어와도 여전히 너는 너 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의 개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와 너는 ‘부동(不同)’ 즉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은 개체와 전체라는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치 요철(凹凸)처럼 아귀가 맞는 법이다. 이렇게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또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 화엄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이다.

 

거울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 거울은 저 거울로 인해 있고, 저 거울은 이 거울로 인해 있다. 눈부처의 관계에서 보듯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들어가고, 걸림 없이 왕래하며 소통하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라는 강고한 아상(我相)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살아간다. 나와 너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를 버리고 너에게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나에게 들어오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의 실상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중생은 이렇게 분절되고 고립된 자아관 속에 갇혀 있다.

 

결국 나와 너의 소통을 방해하는 하는 것은 아상이라는 배타적 자아관이다. 이런 고립적인 인식 때문에 사바세계는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싸우고, 테러를 가하고, 전쟁을 일삼는다. 이처럼 게토(Ghetto)화 된 자아에 대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화엄의 십현문이다. 이런 사유를 통해 우리는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고, 평화를 꿈꿀 수 있다. 여기서 화엄의 사유는 형이상학적 교리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푸는 답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단초는 ‘나’라는 울타리를 열고 ‘나’ 아닌 타자에게로 들어가고, 내게 들어오는 타자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입(相入)’과 ‘상용(相容)’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런 태도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들국화 같은 진한 향기가 배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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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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