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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묵향을 더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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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  2017 년 9 월 [통권 제5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6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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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불생불멸의 실체인 진여와 그 발현인 만유의 상주(常住)를 소개하는 것이 불교임으로 만유가 즉 불교이며 만법이 즉 불법인 것이다. 그럼으로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오 일체사(一切事)가 개시불사(皆是佛事)라 하나니 이 진리를 도피(逃避)하려고 은하계 외의 최종 성운(星雲)으로 달여가도 이 진리는 피할 수 없으니 일체처에 이 상주불멸의 대법칙이 발현 안 됨이 없는 것이다.

“이 진여의 실체는 바릴[遣] 수도 없나니 일체법이 다 진(眞)이기 따문이요 또한 잡을[立] 수도 없나니 일체법이 다 여(如)이기 따문이다. 맛당히 알지어다. 일체법이 설명할 수도 없으며 사념할 수도 없을새 진여라 부르나니라.”(此眞如体 無有可遣 以一切法 悉皆[19b]眞故 亦無有可立 以一切法 皆同如故 當知 一切法不可說不可念 故名爲眞如 - 『기신론』)(주1)

 

 





일체 만법이 불가설(不可說)이며 불가념(不可念)인 이 진여로 구성되여 있기 따문에 이 진여는 바릴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어 모든 방법과 수단이 이 진여에는 하등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우주의 근원이며 만물의 자성인 이 진여는 심심극미묘(甚深極微妙)하여 일체에 평등 작용하며 일체에 무한 활동하야 그 진상을 언설과 사념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철학상 유심(唯心) 유물(唯物)의 체계나 과학상 에너지질[20a]량의 이론으로는 천만년 추궁(追窮)하여도 절대 그 진상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뿐 안이라 백천(百千) 제불(諸佛)이 억천만 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하여도 그 자성에는 추호도 저촉(抵觸)(주2)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 과학은 고사(姑捨)하고 불교교리로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면은 이 묘리(妙理)는 엇덧케 알앗으며 엇덧케 파악하였는지 실로 난처(難處)한 바이다. 여기에 일체 과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이 추종할 수 없는 불교 독특한 묘법(妙法)이 있는 것이다. 이 묘법을 최초로 소개한 석가를 성중성(聖中聖) 천중천(天中天) 법중왕(法中王)(주3) 이라 찬탄함도 같흔 소이(所以)(주4)가 있는 것이다.

 

 





“(일체 만유의 실체인 진여는) 이름할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서 일체 방법이 다 끊어졌으니 증지(證知)로 [20b] 알 바이요 다른 경계(능력)로는 절대 알지 못하나니라.”(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 『법성게』)

일체 방법과 수단이 전혀 소용없고 오즉 증지로만으로 알 수 있다니 그 증지라 함은 과연 무었인지. 이 말은 불교의 골수라고 불리우는 『법성게』의 모두(冒頭)(주5)이다. 공연한 허언(虛言)을 나열한 것이 안이오 불교의 진생명선(眞生命線)을 표현한 것임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 삼위(三位)

 

“신심(身心)과 어언(語言)이 다 단멸(斷滅)하여도 마츰내 피(彼, 佛)의 친증(親證)한 소현(所現)(주6) 열반에 이르지 못하거든 엇지 하물며 능히 사유심(思惟心)으로써 여래의 원각 경계를 측탁(測度)(주7)하리요. 형화(螢火)(주8)를 가저 수미산을 소각하려는 것 갓하서 마츰내 불이 붓지 안느니라.”(身心[21a]語言悉皆斷滅 終不能至彼之親證所現涅槃 何況能以有思惟心 測度如來円覺境界 如取螢火燒須彌山 終不能著 - 『원각경』)(주9)

원래 불교에서는 인간의 일체 정신 활동 상태(주10)를 삼위(三位)으로 분류한다. 제일(第一)은 진여위(眞如位)니 불(佛)이 친증(親證)한 곳이오, 제이(第二)는 무심위(無心位)니 대보살의 경계오, 제삼(第三)은 유심위(有心位)니 일체 중생의 보통 정신상태이다.

 



 

 

제삼 유심위는 기멸(起滅) 부정(不定)하고(주11) 착란(錯亂) 계속한 보통 인간의 정신 상태임으로 누구든지 이해하기 용이하다. 제이 무심위는 보통 인간이 각지(覺知)하고 경험할 수 있는 정신상 활동이 전연 정지 상태에 들어가서 목석(木石)의 무심상태와 동일하다. 그러나 목석과 근본적으로 상[21b]이함은 무심위에 들어가서도 모든 정신생활은 정상 인간과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함이다.

 

그럼으로 이 무심상태는 오즉 자기 자신만이 인식할 뿐 외인(外人)은 절대 규지(窺知)(주12)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통 인간은 정신상 기멸 즉 번뇌망상이 잠시도 쉴 수 없서 무슨 생각이든지 연속(連續) 부절(不絶)하지만은 무심위에 들어가면은 그 연속 부절하든 정신상 기멸이 전연 발생하지 않고 적연(寂然) 무위(無爲)한 정지상태에 있는 것이다.

 

여차(如此) 무심상태는 일시적이 안이요 한번 진무심위(眞無心位)에 들어가면은 영원토록 이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제일(주13) 진여위라 함은 이 무심위에서 또 일층(一層) 더 심입(深入)한 단계이라서 유심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무심위에서도 절대로 [22a] 상상도 할 수 없는 구경(究竟)단계이니 여기에서 비로소 우주의 실체 즉 진여를 파악하게 됨으로 진여위라 명칭하게 되는 것이다.

(주1) 『大正藏』32, p.576a.
(주2) “닿음”
(주3) “성인 중의 성인이고 하늘 중의 하늘이며 법 중의 왕이다”
(주4) “까닭, 이유”
(주5) “앞 부분”
(주6) “부처님께서 직접 증득하여 드러내신”
(주7) “따져서 헤아림”
(주8) “반딧불”
(주9) 『大正藏』 17, p.915c.
(주10) 스님의 친필 원고에는 ‘能’ 자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態’로 읽었다.
(주11)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짐이 일정하지 않고”
(주12) “엿보아 앎”
(주13) 스님의 친필 원고에는 ‘三’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一’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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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철선사상연구원 연구원과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외래강사. 대중문화를 통해 불교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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