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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나를 살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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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7 년 8 월 [통권 제5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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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假借)는 한자어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특질 가운데 하나다. 말만 있고 글자가 없는 경우, 비슷한 소리를 가진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명칭에서 다수 발견된다. 로마를 라마(羅馬)로, 잉글랜드를 영길리(英吉利)로, 아메리카를 미리견(彌利堅)으로,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로, 이탈리아를 이태리(伊太利)로, 홀랜드(네덜란드)를 화란(和蘭)으로, 오스트리아를 오지리(墺地利)로, 이집트를 애급(埃及)으로, 필리핀을 비율빈(比律賓)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아부한사단(阿富汗斯旦)으로, 우루과이를 우류구(宇柳具)로, 탄자니아를 단좌니(旦坐尼)로 쓰는 식이다.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국명들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오랜 세월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던 한국은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우리도 한동안 중국인들의 표기법을 그대로 따랐다. 근대 이전 서구 열강들의 나라 이름을 우리는 이들을 먼저 접한 중국에서 적어주는 대로 읽었다. ‘오지리’에서,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원을 거쳐 한반도로 수입됐다. 그래서 불교의 여러 개념들은 상당수가 가차문자다. 불교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가장 긴 가차이자 가장 기괴한 가차다. anuttara(아누타라)-samyak(삼미악)-sambodhi(삼보디). 무상정각(無上正覺),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라고 번역한다. 더 이상 올라갈 경지가 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기리는 개념이다.

 

붓다의 제자인 수보리는 『금강경』에서 “어떻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이에 독립된 자아가 있다는 아상(我相), 나와는 다른 남이 있으니 열심히 이기고 빼앗아야 한다는 인상(人相), 우리는 부처가 아니라 다들 시시한 중생이니 더럽고 치사하게 살아도 된다는 중생상(衆生相), 목숨에 집착하며 오래 살길 바라는 수자상(壽者相)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붓다의 대답이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마음속에 있다.

 

제92칙 운문의 한 보배(雲門一寶, 운문일보)

 

운문문언(雲門文偃)이 대중에게 말했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영원 속에 하나의 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속에 있다(形山, 형산). 그런데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佛殿)에 갔다가 산문(山門)을 그 등롱 위에 올려놓은 채 돌아왔지.”

출생의 비밀만큼이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전생 이야기다. 그리고 전생에 임금이었다거나 독립운동가였다거나… 직전의 생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는 게 전형적인 패턴이다. 재미를 높이기 위한 장치이겠기에 이해는 한다. 하지만 현생에 옷깃이라도 스칠 인연이 되려면 전생에서 3000번은 만나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전생에선 3000×3000으로 900만 번, 그 이전 전생에선 27억 번, 그 이전에선 81조 번의 인연이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만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셈이다. 무엇이든 되어봤을 것이고 무엇이든 죽여봤을 것이고 무엇이든 사랑했을 것이다. 지금의 목숨만이 나인 줄 알지만, 사실 삼라만상이 나다.

 

절에는 부처님이 있다. 알다시피 실체가 아니라 상징일 뿐이다. 쇳덩어리가 나를 구원할 순 없는 노릇이다. 법당은 부처님의 지혜를 거울삼아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오는 곳일 뿐이다. 자기의 소중한 보물을 덜컥 내주고 돌아오지 말 것.

 

제93칙 노조의 모름(魯祖不會 노조불회)

 

노조보운(魯祖寶雲)이 남전보원(南泉普願)에게 물었다.
“‘마니주(摩尼珠)를 아는 이 없으나 여래장(如來藏) 안에서 친히 거두어 얻을 수 있다’ 하였는데 무엇이 장(藏)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내가 그대와 소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라.”
노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소통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전이 다시 답했다.
“역시 장이니라.”
노조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구슬입니까?”
남전이 “노조야.”라고 넌지시 불렀다.
노조가 말했다.
“예.”
“가거라. 그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6조 혜능은 모든 선사들의 아버지다. ‘참나’에 대해선 별달리 언급하지 않았으나 ‘나’에 대해선 입이 닳도록 말했다. 그가 완성한 조사선의 핵심은 주체성이다.

 

“마음은 광대한 허공과 같다.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선업과 악업과 천당과 지옥이 모두 마음 안에 있다” 『육조단경(六祖壇經)』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다. 세계는 마음의 반영이고 마음의 총체가 세계다. 자심진불(自心眞佛). ‘자신의 마음이 진정한 부처’라는 긍정의 언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부려먹는 사람에게도 빌어먹는 사람에게도 있다.

 

“한 생각에 깨닫는다면 중생이 곧 부처이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는 망념만 내려놓는다면 그대가 천하의 선지식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에게 “불성(佛性)은 인성(人性)”이었다. 그리하여 ‘그대도 부처님처럼 울고 웃을 줄 아니 부처님이고, 부처님처럼 먹고 잠자고 똥 눌 줄 아니 부처님’이라는 혁명적인 사유를 개발했다. 사람이 그냥 그대로 부처님인 것이다. 그리 시간도 걸리지 않을뿐더러 고행도 불필요한 최고의 깨달음이다. 오직 나만이, 나를 살아낼 수 있다.

 

여래장(如來藏)은 청정한 본래 마음을 가리킨다. 여래장에 힘입어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 사실 단순하게 따지면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그냥 사람의 마음이다. 깨달음이란 더럽고 치사한 마음을 ‘딛고’ 올라선 자리이니까. 여래장은 생각한 것들의 총체이며 그리하여 생각할 것들의 총체다.

 

알파고는 과학기술이 창조한 여래장이다. 인간계 최고수들을 한낱 ‘찌질이’로 전락시키는 알파고의 연전연승에 우리들은 탄복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바둑’이라는 게임에만 특화된 지성이다. 사람은 바둑만 두고는 살 수 없으며 밥도 먹어야 하고 밥을 벌어야 한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진심을 다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만능이다. 보석도 내 마음이 보석이라고 인식하고 추켜세워야만 비로소 돌멩이가 아니라 보석이다. 세계의 주재자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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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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