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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성철 큰스님은 모든 국민들의 스승”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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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7 년 6 월 [통권 제5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9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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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불교수도다. 신심(信心)과 원력(願力) 등은 ‘스케일’부터 다르다. 부산에서 법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불자들을 만날 때면 그냥 반갑다. 

 

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두고 불교수도의 대표사찰 범어사를 찾았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 범어사는 몇 년 전 우리시대 대표 선지식(善知識) 중의 한 분인 지유 대종사를 방장으로 모시고 금정총림(金井叢林)이 되었다. 

 

아름다운 연등을 따라 조계문(曹溪門)을 지나니 도량 곳곳이 활기차다. 평일이었지만 정성스럽게 부처님께 등(燈)을 올리는 시민들의 모습이 적지 않았다.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언론인들이 “소리 없이 강한 소임자”라고 했던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금정총림의 위상 다시 정립할 것”


총림 주지소임을 맡으신 지 벌써 1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 출가 이후 여기서 계속 정진했고 또 총무와 박물관장 등 소임만 20여년 가까이 보면서 그 누구보다 범어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지를 맡고 보니 ‘껍데기’만 알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살림 규모가 컸습니다. 대중들과 같이 공양을 하고 함께 예불을 올리면서 범어사의 진면목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1년 정도 지나니 이제 좀 파악이 됩니다. 하하.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1년 동안 그래도 일을 좀 했습니다. 범어사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선문화교육관 건립불사를 2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초파일 이후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됩니다. 참선이 좋다고 하는데 왜 좋은지를 시민들에게 직접 알려주고 싶습니다. 템플스테이 수련원 불사와 제가 16년간 관장을 맡았던 범어사 성보박물관 확장 불사도 조만간 시작됩니다. 이 불사들은 규모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의지와 유관기관의 협조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산 불교계의 화합을 위한 조치들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몇 개로 나눠져 있는 출재가 단체들을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곧 구체적인 성과들이 나올 것입니다. 

안팎의 이런 움직임들을 바탕으로 범어사가 명실상부한 종합수행도량으로 거듭나도록 할 것입니다.

 

범어사가 어떤 도량이 되기를 희망하시나요?

 

●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이고 화엄종찰(華嚴宗刹)입니다.

그럼에도 범어사는 그 위상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들과 함께 내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1000일 화엄법회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외부에서 스님들을 모셔서 법문도 듣고 있습니다.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범어사가 많이 변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범어사 조계문 

 

경선 스님이 범어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었다. 1963년 대구 파계사로 출가해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을 모시면서 공부했다. 성철 스님이 문경 김용사로 갈 때도 함께 움직였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김용사에 있을 때 동산 스님이 열반에 들었다. 성철 스님을 ‘도사’로 생각했는데, 도사의 스승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 스승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성철 스님이 동산 스님이 영결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가보고 싶었으나 자리가 없었다. 당시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이 보낸 차를 타고 범어사로 갔다. 서옹, 법전, 천제 스님등과 함께였다. 당연히 행자에게는 자리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결국 경선 스님은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범어사로 넘어온 것이다. 동산 스님의 상좌인 법륜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다시 출가했다.

 

“도사님의 스승 동산 큰스님은 안 계셨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인연이 안됐습니다. 범어사 강원에 입학해 통도사 강원을 거쳐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습니다. 범어사와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서 정진을 했습니다. 범어사에서 전강, 설봉, 자운, 도광, 소천, 성수, 고산 큰스님 등을 모시고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도 죽는 것”

 

성철 스님과의 첫 인연이 궁금합니다.

 

● 속가 부친께서는 오대산 한암 노스님을 2년 여 간 시봉할 정도로 신심 있는 불자셨습니다. 당신이 출가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하셨어요. 부친께서는 맏이인 제가 출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묘전 스님이 계시던 파계사로 저를 보냈습니다. 그때 묘전 스님께서는 성철 큰스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는데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며 다시 저를 성전암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철 큰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파계사 성전암 시절의 성철 스님 

 

 

성전암 생활은 어떠셨어요?

 

● 제가 성전암에 간 것이 1963년 말입니다. 엄청 추웠어요. 숨 돌릴 틈 없이 진행되는 하루 일정에 어찌나 피곤하던지 새벽예불만 마치면 잠이 쏟아졌어요. 한번은 높이 쌓아 놓은 볏단에 들어가 잠을 잤어요. 날이 추우니 아마 본능적으로 그렇게 움직인 것 같아요. 눈을 떠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그때 대중들이 저를 찾는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성철 스님을 모시면서 많은 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큰스님께 엄청 많이 혼났던 기억뿐입니다. 하하. 음식물 찌꺼기가 수채 구멍에 남아 있으면 한 겨울에 그것을 깨서 다시 솥에 넣어 끓여 먹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시주 공양물을 낭비하고 가볍게 여기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거든요. 

 

성전암에 있는 내내 나무하고 청소하고 밥 짓고 저녁때면 다 같이 선방에 앉았던 기억뿐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칭찬을 하실 때도 삼천배, 혼을 내실 때도 삼천배를 하라고 하셨어요. 덕분에 절을 원 없이 했습니다. 하하.

성전암에서는 저를 포함 3~4명이 큰스님을 시봉했습니다. 

저는 나중에 김용사로 가서 큰스님께 ‘만연’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당신 방에서 주로 참선을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정진을 하시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책을 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알려져 있듯이 큰스님께는 책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경전은 물론이고 영어책도 많았습니다. <타임> 잡지도 있었고요. 영어책을 보면서 ‘도사님도 영어를 공부하시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성전암에서 김용사로 가실 때 트럭 2대를 불러 책을 가져갔습니다.

 

공부에 대해 성철 스님이 따로 말씀하신 것이 있었나요?

 

●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감히 법을 묻고 가르침을 달라는 말씀을 올린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큰스님을 ‘도사’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단순한 어떤 스님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했어요.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공부 안 하면 살아도 죽은 송장과 다름없다’며 정진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사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저는 그냥 절만 열심히 했던 기억입니다. 하하.

 


경선 스님과 원택 스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성철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 평생 법(法)과 도(道)만을 보고 사신 어른이시죠. 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보다 더 훌륭한 진리가 있다면 불교를 버리고 그리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진리와 불교를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이라면 당돌하게 ‘법이 뭡니까?’라고 큰스님께 여쭈겠지만 시간은 이미 흘러버렸습니다.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성철 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진하고 법을 따랐을 때라야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중도(中道)를 체득할 수 있는 각자의 정진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아닌 이웃을 위하라고 하셨어요. 1986년 초파일 법어를 보면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을 가리키면서 큰스님께서는 세상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을 찬탄하십니다. 이 법어에 큰스님의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선 스님 성철 큰스님은 불교만의 스승이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의 스승이십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라 정진하셔서 깨달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봉암사 결사 70주년, 백일법문 강설 50주년의 해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봉암사 결사는 우리 불교의 근본을 바꾸고 납자(衲子)들이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잡아 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한국불교가 오늘날 수행가풍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어른들의 원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훗날에도 보면 성철 큰스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공부 인연을 만들어주시는 능력이 탁월하셨습니다. 

 


4월 22일 범어사 설법전에서 열린 성철 평전 북 콘서트 후 자리를 같이한 대중들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제가 보기에 봉암사 결사와 통영 안정사 천제굴 정진, 파계사 성전암 동구불출(洞口不出) 등을 통해서 당신이 공부하고 깨달았던 것을 백일법문을 통해 한꺼번에 쏟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백일법문 속에 봉암사 결사정신도 들어 있습니다. 

 

특히나 백일법문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정풍(正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어요. 반딧불처럼 잠깐 반짝한 것으로 깨달았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와 국민들에게 당부의 한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어떻게 고통을 이겨내야 할까요? 바로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실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법과 계합(契合)이 됐을 때 행복해집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부처님 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로 계율(戒律)을 들어 보겠습니다. 계율은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면 스스로 청정하고 편안합니다.

 


지난 4월 29일 봉행된 동산 대종사 열반 52주기 추모재 후 대중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집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안 계실 때에는 계로 스승을 삼으라 하셨잖아요. 더우면 열고 추우면 닫으면 되는 것이 계율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부터 몸소 실천하는 불자가 되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을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경선 스님은 ‘준비된’ 총림의 주지였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는 답변이 이어졌다. 짧지 않은 시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오니 낯익은 ‘세 글자’가 다시 보였다. 

 

‘堪忍待(감인대)’. 범어사를 중창시키고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을 세운 동산 스님이 제자와 불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씀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라’는 노사(老師)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경선 스님의 모습이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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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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