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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상좌부 불교의 성지 스리랑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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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7 년 5 월 [통권 제4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21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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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정사 불교대학을 개설한지 12년째를 맞이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지난 3월 22일 ~ 27일 5박 6일의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인도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서역으로, 서역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지고 중국 당(唐)에 이르러 불교가 꽃이 피고 더욱이 육조혜능 대사의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상의 중국 선종이 발아하여 5가 선종의 융성은 중국 전통사상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10세기 말에 송조(宋祖)가 개조되면서 목판대장경이 여기저기서 출간되는 불교출판 전성시대를 맞이한 대승불교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 않고 자기 우월성만을 가지고 있는 남방불교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담불라 석굴을 둘러보고 있는 필자

 

150명 가까운 순레단이 모두 무사히 회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콜롬보 공항에 내리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3월 23일 아침 6시에 공양을 하고 아누라다푸라로 5시간 가까이 달렸는데 우리의 경주나 부여와 같은 옛날 싱할라 왕조의 수도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에 들러 순례단원들의 조상님들의 위패를 모시고 전경으로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이곳은 아쇼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타가 보드가야 보리수 묘목을 옮겨와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 아쇼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해준 장소로 알려진 미힌탈레 언덕에 올라가 아누라다푸라의 전경과 아름다운 사방 주위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문득 6년 전 첫 번째 순례를 떠났던 인도의 8대성지 가운데 산치대탑이 떠오르며 젊은 아쇼카와 처녀 ‘데비’와의 사랑이야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석가모니 입멸 후 250여년이 지나 마우리아 왕조의 3대 황제인 아쇼카 대왕이 아직 젊은 때였습니다. 황제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래 왕위계승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 번째 왕자로서 젊은 나이에 지금의 보팔 인근에 있는 ‘비딧샤’ 지방의 태수로 부임해 갔습니다. 어느 날 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처녀 ‘데비’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들이 첫 아들을 얻고 둘째를 임신하였을 때 황제의 붕어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쇼카는 급하게 왕궁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상을 치렀습니다. 상중에 황제자리를 두고 왕자들 사이에 후계의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아쇼카도 이 권력투쟁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아쇼카는 99명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 통일에 나서서 인도 전역을 돌면서 수없는 전쟁을 치렀고 마지막으로 인도 통일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칼링가 왕국을 즉위 8년 만에 정복하여 통일 천하를 이루게 됩니다.

 


보리수 사원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모습

 

그 후 비문에 나타나는 아쇼카 대왕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불교사상에 바탕을 둔 전륜성왕의 모습이었습니다. 한편 외진 시골에 버려진 ‘데비’는 남매를 혼자서 기르며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고 아들과 딸은 어느 덧 성년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데비가 병이 들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고 아버지인 아쇼카 대왕을 찾아가라고 당부합니다.

 

그 길로 마힌다는 동생 상가미타와 둘이서 수도인 파트나로 멀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생고생을 하면서 파트나로 가며 “어떻게 해야 아쇼카 대왕을 만나 어머니의 정표를 잘 전해서 우리 남매가 황제의 아들과 딸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하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아쇼카 대왕이 궁전의 정원을 아끼고 코끼리 나무 형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마힌다는 기술을 배워 몇 년 후 궁전 정원사로 취직을 했고 코끼리 모양 등 정성스레 수목을 관리하였습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둘러보면서 아쇼카 대왕이 직접 정원사를 보고 싶다고 하였고 마침내 소원을 이룬 마힌다는 대왕 앞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왕의 칭찬의 말끝에 마힌다가 조심히 어머니의 정표들을 대왕 앞에 내놓으며 지난날의 어머니의 부탁을 대왕에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쇼카 대왕은 거의 20여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비딧샤의 아름다운 처녀 데비’를 떠올리며 마힌다를 끌어안으며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쇼카 대왕은 마힌다, 상가미타와 함께 비딧샤로 내려가서 초라한 데비의 무덤에 못 다한 사랑에 대한 보상을 초기 산치대탑을 세움으로써 뒤늦게나마 하게 되었습니다.

 


마힌다 스님이 스리랑카 왕에게 불교를 설하고 있는 모습. 이수루무니야 사원에 조성되어 있다.

 

아쇼카 대왕은 파트나의 왕궁으로 돌아와 남매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게 됩니다.
“처음 마힌다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 덤벙대지 않고 침착하고 인내하면서 오늘의 기회를 만든 너의 깊은 생각은 너무도 현명한 태도로써 나도 놀라고 감동하였다. 이제 너희 둘은 성년이 되었지만 시골에서 자라 왕궁의 예법 생활이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음모와 모함이 난무하는 궁중 정치에 희망을 갖지 말고,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밝혀 주었으면 한다. 권력의 길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걸어서 이 아버지의 불교세계화에 힘을 보태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너희 어머니가 너희를 위해 진정으로 바라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쇼카 대왕의 간곡한 당부의 말을 듣고서 두 남매는 불법(佛法) 전도를 다짐하였고, 그 후 대왕에게 약속한 대로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법을 전하게 됩니다.

 

마힌다 왕자는 비구가 되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아 삼장법사가 되고 상가미타도 비구니가 되어 부지런히 수행하였습니다. 마힌다는 다른 삼장법사 7명과 함께 미힌탈레 언덕에 도착하여 왕을 교화하고 BC 3세기에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인 이수루무니아 사원이 건립되고, 딸 상가미타는 보드가야의 성스러운 보리수 묘목을 가져왔고 데바남피야티사 왕이 스리랑카 보리수 사원을 조성하였습니다. 마힌다 왕자와 상가미타 공주의 발심으로 스리랑카에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어서 세계 상좌부 불교의 중심이 되는 초석을 쌓았습니다. 아쇼카 대왕의 ‘데비의 남매에 대한 운명의 선택’은 불교사에 있어서 경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알루비하라 대광명사 주지 난다 스님과 함께 한 순례단

 

3월 24일 셋째 날 아침 7시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계문화유산 시기리야로 출발하였는데 대중들도 들뜬 듯 기대하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시기리야는 세계 10대 혹은 8대 불가사의에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정글 한 가운데에 377m 사방 직각으로 우뚝 솟은 바위 요새이며 성벽의 길이는 정면 900m, 측면 1500m 에 이른다고 합니다. 밑에서 산꼭대기까지 올렸다는 신기한 대나무 시설들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오후에는 거대한 삼존불이 모셔진 갈비하라, 포트굴비하라, 세계문화유산인 담불라 5개 석굴군을 참배하고 돌아오니 몸은 녹초가 되었습니다.

 

3월 25일 나흘째에는 아침 출발시간이 한 시간 늦어져 여유를 갖고 최초로 패엽경이 만들어진 알루비하라 대광명사로 가서 가사불사 및 만발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난다 주지스님이 철필 끝으로 손수 패엽경에 글자를 새기고 먹물을 묻혀 닦아내는 시연을 해 보여주었습니다. 알루비하라 사원이 유명한 것은 역사가 깊었습니다. 알루비하라 사원은 원래 이름이 알루레나(ALU-LENA) 혹은 알로카레나(ALOKA-LENA)였는데 그 의미는 ‘찬란히 빛나는 석굴’이란 뜻으로 초기엔 동굴 사원만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알루비하라에는 붓다고사 스님이 머물렀던 석굴과 몇 개의 탑과 그리고 편히 쉬고 계시는 와불이 모셔진 두 곳의 석굴 사원이 남아 있습니다.

 

BC 92년 혹은 80년 사이 즈음에 쿤타가타팃사 장로를 수장으로 500여명의 장로급 승려들이 알루비하라 사원에 모여 삼장(三藏)을 결집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다 정확한 기술을 위해 인도의 저명한 불교학자 붓다고사를 초빙하여 본격적인 간경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패엽경에 새기는 작업은 초고의 완성에만도 1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기술되는 불경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서, 먼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말씀을 경(經, 니까야), 계율(戒律, 비니야), 앞의 경과 율에 관한 주석서(아비담마)로서, 이 셋을 합쳐서 삼장(트리피카타)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알루비하라의 간경 작업 이전까지는 이 빨리 삼장이 단 한 번도 문헌화 된 적이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스승에서 제자로 외워서 이어지는 짧은 구절과 운율을 더해 암송으로 전승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 알루비하라 사원에서의 문헌화 작업은 불교사 최초로 경전의 성문화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알루비하라 사원 인근에는 100여개의 석굴이 있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13개의 동굴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작업으로 만들어진 빨리어 삼장은 동굴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밀봉 보관되어 왔습니다.

 


스리랑카 국민들의 정신적 귀의처 부리사 사리함

 

1815년 영국은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합병해 버렸습니다. 1848년 7월에 알루비하라 사원이 있는 마탈레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영국군이 이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마침내 알루비하라 사원을 급습하여 사찰을 약탈하였고 주변에 숨어 있는 반란자들을 찾는다면서 사원 주변의 동굴들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동굴을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 그 동안 세상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류최고의 문헌인 빨리어 삼장이었습니다. 발견된 빨리어 삼장은 영국 식민정부의 주도로 영국본토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 빨리 삼장을 연구할 목적으로 PTS(Pali Text Society) 학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석학으로 불리던 리즈 데이비스 박사를 중심으로 1891년부터 시작되어 50여년에 걸쳐 번역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영어판 빨리어 삼장을 완결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스리랑카는 외침과 반란과 같은 전란이 많았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정통 상좌부의 위기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문헌으로 기록하여 깊은 동굴에 경전을 밀봉하여 보존할 수밖에 없었고,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항거하는 과정에서 삼장이 1800년 이상이 지난 후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설명 들으면서 저에게는 남방 상좌부스님들의 남전장경, 니까야에 대한 크나큰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듯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스리랑카 상좌부 장로스님들이 굳건히 기억하고 기록하였기에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다는 그들의 자부심에 고개를 숙여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나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같은 불교국가에서는 아침에 스님들이 줄지어 탁발 나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는데 여기 스리랑카는 탁발 나가는 풍습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나라에서는 신도들이 특별한 복장 없이 일상복으로 절을 드나드는데 비하여 스리랑카에서는 특히 보살님들은 아래위로 꼭 흰 옷을 입고 출입하는 모습이 상당히 엄숙하고 청아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지스님에게 단주나 108염주를 구하려 하니 “스리랑카에서는 그런 불구(佛具)를 전혀 쓰지 않아서 없다.”고 하여서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캔디 불치사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 우리들 모두가 불치사리를 모신 화려한 불치사리함을 가까이에서 참배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모두들 너무나 고마워했습니다. 지면 관계상 더 이야기를 못하여서 아쉬운 가운데 이번 스리랑카 성지순례는 꼭 옛 고가(古家)를 다녀오는 듯한 푸근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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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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