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오래된 미래]
불교수행의 목적과 초기불교 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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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7 년 4 월 [통권 제4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93회 / 댓글0건본문
수행의 목적
“불교에서 수행은 왜 하는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당연해서 어리석기 그지없어 보이는 질문이지만 오늘날 명상 수행을 권하는 수많은 선전 문구 앞에서 한 번쯤 떠올려보아야 할 질문이다. 명상이 대중화된 오늘날, 명상은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한 활동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심리적인 고통의 치유는 물론이고 정신집중을 통한 학습력 향상, 창의성 개발 등등 수많은 명상의 효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웰빙(wellbeing)”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잘 삶” 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갖는 유동적이고 모호한 성격을 고려하면, “잘 살기 위해 수행한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 중에는 명상을 그 정신적 종교적 수련방법으로 채택하는 종교들이 있다. 그 방법들 역시 행복에 기여하는 방법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목표를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도교 수행의 목표는 양생(養生), 즉 불로장생(不老長生)이며 그것이 도교 수행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인 것과 같이, 불교에서도 그 수행의 목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개념을 떠올린다.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풍토에서도 그런 개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교 수행의 최종적인 목표가 깨달음이라는 점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좀 더 쉽고 친절한 것으로 만들려는 요즘의 경향과 반대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 학습능력의 향상이나 창의성 개발에 의해 얻어지는 행복도 아니고, 심리적인 병증의 완화를 통해 얻게 되는 고통의 해소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른 명상법들과 불교명상의 차이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불교명상에 대한 오해 또는 오용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는 오늘날 새삼스럽게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위산영우(潙山靈祐)선사가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다(以悟爲則)”고 분명하게 밝히는 대목을 보면, 왜 수행을 하는지, 수행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은 선 수행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났던 당송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깨달음을 향한 불교수행법이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 즉 팔정도의 하나로서 위상을 갖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그 다양한 방법들의 특징과 역사적 변천을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부처님이 수행했고 가르친 수행법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최초의 형태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와 ‘뛰어남’ 사이
불교명상 수행법에 대한 수많은 주장들 가운데 어떤 것은 그것이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또 어떤 것은 그것이 가장 뛰어나다고, 또 다른 어떤 것은 그것이 부처님이 가르친 최초의 수행법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정통성의 근거를 “최초”라는 사실에 두고 있는 데 비해, 대승불교권에서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에 방점이 주어진다.
남방불교의 수용과 함께 한국불교에서도 “최초”가 갖는 권위와 정통성의 요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최초의 수행법인가에 대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최고층의 문헌을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문헌학적 연구가 최초의 수행법을 확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최초의 문헌을 가리는 작업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일뿐더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부처님의 수행법에 대한 기록이라고 확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고려할 점은 당시 인도 상황에서 부처님이 독자적인 수행법을 창시했다기보다 기존의 수행법들 중 취사선택을 통해 불교명상의 특징과 체계를 확립시켰을 것으로 보이는 측면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문헌에 기록된 수행법을 불교수행법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 역시 성급한 결론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남전 니까야의 설명을 문헌비판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와 초기 불전에 제시된 여러 가지 선정법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연구의 부족을 지적한 김준오의 지적을 염두에 두면서 팔정도의 하나로서 제시된 “정념” 수행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염(念)”은 빨리어 sati, 산스크리트어 smŗti의 한문 번역어로, 티벳어에서는 dran pa으로, 영어로는 mindfulness, insight으로 번역된다. “염”에 대한 현대 한국어 번역어로 ‘주시’, ‘관찰’, ‘각성’,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의깊음’, ‘마음집중’, ‘마음지킴’, ‘수동적 주의집중’ 등 다양한 번역어가 제시되었지만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사실상 사띠의 영어 번역어인 “mindfulness”에 대한 번역어로 통용되고 있는 이들 번역어는 사띠의 특정 의미만 강조하기 때문에 도리어 사띠에 대한 균형있는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mindfulness”의 의미는 사띠의 의미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사띠는 영어 단어 “mindfulness”가 원래 갖고 있었던 의미와 중첩되어 “순간에 대해 완전하게 의식하는 것, 동시에 그런 의식을 자각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순간에 대해 완전하게 의식하는 명상의 상태”로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번역상의 불일치가 도리어 지난 20년간 인지심리학, 신경과학, 임상심리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불교명상에 대한 연구와 적용이 활발하게 시도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볼 때 빨리어 sati의 원래 의미는 ‘기억’이다. 한역어 “염”은 ‘기억’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영어 번역어와 비교하면 상당한 괴리를 느끼게 한다. 다른 한역어 “억념(憶念)”, “수의(守意)”를 보더라도 ‘기억’이란 의미는 사띠가 갖고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문헌에 사용된 이후로, 사띠의 의미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변화를 바라보는 입장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한 부류의 학자들은 사띠 용어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주의 집중’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억’이라는 의미는 불교문헌 속에 사용된 사띠 개념에 적용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이러한 의미 분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 건너기 어려운 간극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Rupert Gethin이 제안한 해결은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그는 사띠의 ‘기억’을 심리학에서 말하는 ‘작업 기억(working memory)’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동안 순서와 과정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사띠는 기억된 내용보다 기억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처럼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 주의 집중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억을 작업기억이라고 해석하면 기억과 주의 집중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양립은 가능하다.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사띠를 불교명상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사띠의 인지적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초기불교 문헌을 보면 사띠와 “이해”가 밀접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때문에 사띠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띠가 인지적인 통찰뿐 아니라 사마타를 기르는 것으로 이해한 설명들을 초기불교 문헌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마음을 제대로 집중시키고 안정시키는 것이다(D2.216). 이처럼 염처를 고요함과 통찰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방식은 상좌부 주석 전통에 따른 이해방법으로, 정념은 정정(正定)과 함께 집중력을 기르는 수행으로 간주된다. 특히 정념이 어떻게 번뇌의 소멸을 가져오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주장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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