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공(空)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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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7 년 3 월 [통권 제4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39회 / 댓글0건본문
공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지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말하라면 단연 공사상을 들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 공사상의 요지다. 그런데 공사상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모든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이른바 악취공(惡取空)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용수 보살은 공사상을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체계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이것이 연기설이다. 일체 존재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으로 불리는 개체적 실체는 없기 때문에 무자성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개체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의 실상은 공(空)이다.
이렇게 보면 공사상은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다. 따라서 공사상도 고(苦)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공을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과 번뇌를 해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첫째, 공의 이치를 알면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과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실체가 있고 영원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아와 대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집착에서 가장 큰 번뇌와 고통이 비롯된다. 따라서 모든 개체의 실체가 텅 빈 것임을 깨닫게 되면 자아와 대상에 대한 강고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공은 단지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공은 곧 연기이므로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공에 입각해 보면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가 해체된다. ‘나’라는 경계가 허물어질 때 무수한 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함으로 자기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게 된다.
셋째, 공을 이해하면 나와 나 밖에 있는 존재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깨닫게 된다. 나와 남을 나누는 경계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연민과 모두가 한 몸이라는 자비심이 나오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존의 가치관이 형성된다.
진공의 네 가지 의미와 마음의 평화
이처럼 공에 대한 이해는 집착의 해소와 불이와 공존의 인식을 열어준다. 그런데 사람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공의 지혜는 화엄사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지난 호에 살펴본 바와 같이 현수법장은 참다운 공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남을 숨기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며, 셋째는 나와 남이 함께 드러나는 것이고, 넷째는 나와 남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이들 내용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남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첫째 ‘폐기성타(廢己成他)’이다. 자신은 뒤로 숨고 남을 먼저 이루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나를 앞세우며 산다. 이익이 있을 때도 내가 먼저이고, 명예 앞에서도 내가 먼저이다. 도덕과 윤리 때문에 그런 속내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심리는 개인적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미국 먼저를 외치고 있다. 어떤 힘센 사람이 자기만을 외치며 군림하면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서로가 자기 먼저를 주장하면 온 세상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이리와 같은 관계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미 퍼스트(Me First)를 외치고, 좋은 것은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나를 내세우며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것은 나와 남은 다르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 공사상은 바로 그와 같은 무지를 일깨운다. 비록 색이 전면에 드러나고 공이 뒤에 숨어 있어도[色現空隱] 결국에는 공이 드러나게 된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色不異空]. 내가 일등이 되고 싶고, 내가 앞서고 싶지만 나와 타인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 공사상이다. 따라서 공의 지혜를 체득한 사람이 취하는 첫 번째 태도는 자신은 뒤로 숨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상대방을 전면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인식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굳이 자신이 드러나야 하고, 내가 먼저 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 먼저’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내가 그런 생각을 내려놓으면 갈등과 경쟁도 완화된다. 상대방도 자기중심적이고 자기가 먼저이고자 하는 인식과 행동을 멈추기 때문이다. 공을 인식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로써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르다면 남이 먼저 드러나면 내가 손해 본다. 하지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은 사라진다. 이렇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공의 두 번째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즉 먼저 드러나 있던 남이 뒤로 숨고, 이번에는 내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민타현기(泯他顯己)’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空]를 숨기고 남[色]을 먼저 드러나게 했다. 하지만 공과 색이 다르지 않음으로 색이 드러나면 결과적으로 공이 드러나게 된다.
결국 공사상은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를 통해 나와 남이라는 인식을 해체한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님으로 색이 완전하게 드러날 때 공도 저절로 드러난다[色盡空顯]. 남을 잘 되게 하면 나도 저절로 잘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될 때 타자에 대한 배려의 행동이 나올 수 있고, 공존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사라짐
공의 세 번째 의미는 자기와 남이 함께 존재하는 ‘자타구존(自他俱存)’이다. 남을 먼저 드러나게 하고, 남이 잘 되면 결국은 내가 드러난다. 따라서 내가 숨는다고 해도 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소외되는 것도 아니다. 남이 드러난다고 해서 남만 잘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내게도 돌아온다. 그래서 법장은 드러남과 숨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隱顯無二].
드러남과 숨는 것이 둘이 아니므로 색[남]이 드러나는 것이 곧 공[나]이 드러나는 것이 된다. 남이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것이며, 내가 잘 되는 것이 남이 잘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남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도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남을 먼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와 남이 함께 드러나기 위한 전제가 바로 남을 먼저 배려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나와 남이 함께 존재하는 공존과 상생의 삶이 열린다.
공의 네 번째 의미는 너와 내가 함께 사라지는 ‘자타구민(自他俱泯)’이다. 사실은 너도 나도 모두 연기적 관계에 있는 존재들일 뿐 실체가 없다. 실상에서 보면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사라짐이 곧 드러남이므로 내가 사라져 남을 드러나게 하고, 남이 사라져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공의 네 번째 의미다. 서로가 함께 드러남은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서로가 함께 사라짐은 상호배려와 공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따라서 공을 이해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아상(我相)을 꺾고, 자신을 먼저 숨기고, 남을 이익 되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며,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서로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나도 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남도 그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공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진공사의(眞空四義) 역시 존재의 실상에 대한 교설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공을 실상론으로만 이해하면 형이상학적 내용이 되고 만다. 공에 대한 이해가 실제적 삶에 도움이 되려면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가짐과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
공에 대한 네 가지 해석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공사상은 구체적인 삶의 지침이 되고, 마음 다스림의 지혜가 된다. 이런 맥락으로 공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공의 이치를 실천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회복되고, 함께 살 수 있는 공존의 윤리가 나온다. 여기서 공은 어려운 교리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넘어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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